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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강론] <주님 승천 대축일 본문+해설+묵상>-김수복
작성자김종연 쪽지 캡슐 작성일2010-05-16 조회수2,527 추천수0

주님 승천 대축일

(부활 제7주일; 홍보 주일)


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이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오르셨다.>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1,1-11

1 테오필로스 님, 첫 번째 책에서 저는 예수님의 행적과 가르침을 처음부터 다 다루었습니다. 2 예수님께서 당신이 뽑으신 사도들에게 성령을 통하여 분부를 내리시고 나서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다 다루었습니다. 3 그분께서는 수난을 받으신 뒤, 당신이 살아 계신 분이심을 여러 가지 증거로 사도들에게 드러내셨습니다. 그러면서 사십 일 동안 그들에게 여러 번 나타나시어, 하느님 나라에 관한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4 예수님께서는 사도들과 함께 계실 때에 그들에게 명령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나에게서 들은 대로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분을 기다려라. 5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너희는 며칠 뒤에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것이다.”

6 사도들이 함께 모여 있을 때에 예수님께 물었다. “주님, 지금이 주님께서 이스라엘에 다시 나라를 일으키실 때입니까?” 7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그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권한으로 정하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다. 8 그러나 성령께서 너희에게 내리시면 너희는 힘을 받아,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 그리고 땅 끝에 이르기까지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

9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이르신 다음 그들이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오르셨는데, 구름에 감싸여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지셨다. 10 예수님께서 올라가시는 동안 그들이 하늘을 유심히 바라보는데, 갑자기 흰옷을 입은 두 사람이 그들 곁에 서서, 11 이렇게 말하였다.

“갈릴래아 사람들아, 왜 하늘을 쳐다보며 서 있느냐? 너희를 떠나 승천하신 저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라가신 모습 그대로 다시 오실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47(46),2-3.6-7.8-9(◎ 6)

◎ 하느님께서 환호 소리와 함께 오르시도다.

주님께서 나팔 소리와 함께 오르시도다.

○ 모든 민족들아, 손뼉을 쳐라.

기뻐 소리치며 하느님께 환호하여라.

주님은 지극히 높으신 분이시고 경외로우신 분,

온 세상의 위대하신 임금이시로다. ◎

○ 하느님께서 환호 소리와 함께 오르시도다.

주님께서 나팔 소리와 함께 오르시도다.

노래하여라, 하느님께 노래하여라.

노래하여라, 우리 임금님께 노래하여라. ◎

○ 하느님께서 온 누리의 임금이시니 찬미가를 불러라.

하느님께서 민족들을 다스리시도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거룩한 어좌에 앉으시도다. ◎ 

 

제2독서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하늘에 올리시어

당신 오른쪽에 앉히셨습니다.>

사도 바오로의 에페소서 말씀입니다.

1,17-23 또는 히브 9,24-28; 10,19-23

형제 여러분, 1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느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여러분에게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시어 여러분이 그분을 알게 되고, 18 여러분 마음의 눈을 밝혀 주시어, 그분의 부르심으로 여러분이 지니게 된 희망이 어떠한 것인지, 성도들 사이에서 받게 될 그분 상속의 영광이 얼마나 풍성한지 여러분이 알게 되기를 빕니다. 19 또 우리 믿는 이들을 위한 그분의 힘이 얼마나 엄청나게 큰지를 그분의 강한 능력의 활동으로 알게 되기를 빕니다. 20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 능력을 펼치시어, 그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시고 하늘에 올리시어 당신 오른쪽에 앉히셨습니다. 21 모든 권세와 권력과 권능과 주권 위에, 그리고 현세만이 아니라 내세에서도 불릴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신 것입니다.

22 또한 만물을 그리스도의 발아래 굴복시키시고, 만물 위에 계신 그분을 교회에 머리로 주셨습니다. 23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모든 면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그리스도로 충만해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또는 <그리스도께서는 두 번째로 나타나실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의 히브리서 말씀입니다. 9,24-28

24 그리스도께서는, 참성소의 모조품에 지나지 않는 곳에, 곧 사람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않으셨습니다.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느님 앞에 나타나시려고 바로 하늘에 들어가신 것입니다. 25 대사제가 해마다 다른 생물의 피를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듯이, 당신 자신을 여러 번 바치시려고 들어가신 것이 아닙니다. 26 만일 그렇다면 세상 창조 때부터 여러 번 고난을 받으셔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분께서는 마지막 시대에 당신 자신을 제물로 바쳐 죄를 없애시려고 단 한 번 나타나셨습니다. 27 사람은 단 한 번 죽게 마련이고 그 뒤에 심판이 이어지듯이, 28 그리스도께서도 많은 사람의 죄를 짊어지시려고 단 한 번 당신 자신을 바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을 고대하는 이들을 구원하시려고 죄와는 상관없이 두 번째로 나타나실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또는 <충실한 신앙생활>


사도 바오로의 히브리서 말씀입니다. 10,19-23

19 형제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의 피 덕분에 성소에 들어간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20 그분께서는 그 휘장을 관통하는 새롭고도 살아 있는 길을 우리에게 열어 주셨습니다. 곧 당신의 몸을 통하여 그리해 주셨습니다. 21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집을 다스리시는 위대한 사제가 계십니다. 22그러니 진실한 마음과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하느님께 나아갑시다. 우리의 마음은 그리스도의 피가 뿌려져 악에 물든 양심을 벗고 깨끗해졌으며, 우리의 몸은 맑은 물로 말끔히 씻겨졌습니다. 23 우리가 고백하는 희망을 굳게 간직합시다. 약속해 주신 분은 성실하신 분이십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환호송


마태 28,19ㄱ.20ㄴ 참조

◎ 알렐루야.

○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가르쳐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 알렐루야. 

 

복음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강복하시면서

하늘로 올라가셨다.>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의 끝입니다. 24,46ㄴ-53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46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 47 그리고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48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 49 그리고 보라,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분을 내가 너희에게 보내 주겠다. 그러니 너희는 높은 데에서 오는 힘을 입을 때까지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어라.”

50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베타니아 근처까지 데리고 나가신 다음, 손을 드시어 그들에게 강복하셨다. 51 이렇게 강복하시며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셨다. 52 그들은 예수님께 경배하고 나서 크게 기뻐하며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 53 그리고 줄곧 성전에서 하느님을 찬미하며 지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영성체송


마태 28,20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알렐루야. 

 

해설과 묵상


제1독서(사도 1,1-11) 해설

<예수님 승천으로 성령의 시대가 열렸다>


사도행전의 서두는 루카 24,44-52를 존중하면서도 고유한 의미를 가진 몇 가지 특수한 점을 제시하고 있다.

첫째는 부활하신 예수께서 당신 제자들에게 ‘교훈을 주기 위하여’ 40일 동안 나타나셨다는 말씀이다. 이 말씀은 특별한 뜻을 지니고 있다. 제자들이 그리스도께로부터 완벽하게 교훈을 받았다는 뜻이다(40이라는 숫자는 완벽함, 충만함을 뜻한다. 율법 교사들도 자기의 가르침을 40번 반복하여 교육하는 습관이 있었고, 제자들은 40번을 들어야 그 가르침을 받은 것으로 여겼다.). 그리하여 제자들은 ‘증인’이 된다. 증인이라는 단어는 사도행전에서 중요한 단어이다. 증인들은 교회(신앙공동체)의 초석이다.

그 다음으로 이스라엘 왕국을 회복되기 시작하는 순간, 하느님께서 성령을 선물로 주시는 순간이 분명하게 구별되어 나타난다(6-8절). 여기서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의 희망이 물거품이 되지 않았음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메시아께서 이스라엘 왕국을 회복하시리라는 사실은 교회의 희망에 속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어디까지나 하느님의 백성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방인들이 구원으로 다가갈 수 있게 된 것은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아브라함으로부터 내려오는 백성에 속하기 때문이다.

흰 옷을 입은 ‘두 사람’은 예수님의 변모 때(참조. 루카 9,30)와 파스카의 날(참조. 루카 24,4)에 이미 나타났었다. 그 두 사람은 모세와 엘리야였다. 예수께서 하느님으로부터 파견 받은 분이심을 증언하는 두 가지, 즉 율법과 예언이었다.

끝으로 승천의 사건에 ‘구름’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이것은 신현(神顯)을 가리킨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세상 시작부터 끝까지 역사를 다스리시는 하느님 자신 외에 다른 분이 아니심을 가리킨다. 현실적으로 그리스도의 나라는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땅 끝까지 제자들의 증언으로 드러날 것이다.


화답송(시편 47[46],2-3.6-7.8-9[◎ 6])

<하느님께서 환호 소리와 함께 오르시도다

주님께서 나팔 소리와 함께 오르시도다>


‘왕’에 관한 시편은 하느님을 왕 중의 왕이시라고 노래한다. 귀양살이 후로는 이스라엘에 더 이상 군주가 없고, 하느님께서 계속 이스라엘의 참된 왕이 되셨다. 나팔 소리가 성전으로 울려 퍼지는 전례와 행렬을 주재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었다. 나팔 소리는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이 나타나 십계명을 새겨 주시는 그분의 목소리를 기념하고 나타냈다(참조. 탈출 19,16-20,1).

예수님 승천은 모든 백성과 온 인류가 하느님을 흠숭하기 위하여 성전으로 올라가는 위대한 행렬의 시작이다(이사 2,2 이하; 즈카 8,20 이하; 14,16 이하).


제2독서(에페 1,17-23) 해설

<그리스도의 승리 속에 하느님의 능력이 드러난다

이제는 교회가 하느님의 능력을 드러내야 한다>


바오로의 이 위대한 기도는 성령을 선물로 주시는 예수 승천의 신비와 직접 맞닿아 있다. 오직 성령께서만이 ‘승천’이라 부르는 사건을 이해하게 해 주신다.

예수 승천은 세 가지 요소를 가지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온 세상의 주님이시다(20-22절): 이 ‘주님 되심’은 분명 감춰져 있지만, 성령의 권능으로 알아차릴 수 있다.

만물의 주님이신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신비체인 교회의 머리가 되신다(22-23절): 이 말을 제대로 알아들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로서 당신의 권능을 행사하여 온 인류에 대한 ‘주님 되심’을 획득해 나가시는 것으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교회의 머리가 되어주는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온 인류의 주님이시다.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주님이시라는 사실은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과 모든 백성과 온 인류의 주님이라는 보증이요 증언일 따름이다. 그리스도께서 주님이 되심으로써 온 인류가 하느님의 백성이 되고 하느님의 성전이 되고 커다란 교회가 되었다.

끝으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모든 면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그리스도로 충만해 있다.”(23절): 이 말씀은 그리스도께서는 마치 온 인류와 만물이라야 가득 채울 수 있는 그릇과 같다는 뜻이다. 교회는 언젠가 온 우주가 그리스도의 품 안에 안기리라는 보증이 된다.


또는 (히브 9,24-28) 해설 

<그리스도께서는 충만한 구원을 주기 위해서 다시 오실 것이다>


구약의 사제직과 예배와 예절이 추구하되 얻지 못한 바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안에서 이루어진다. 즉, 죄를 용서받고, 하느님께 가까이 갈 수 있는 길이 열리고, 화해가 실현된다. 파스카 사건은 생생하고 효과를 낳고 영원하다. 예수께서는 당신 자신을 봉헌했고 지금은 하느님과 더불어 계시면서 인간들을 위하여 전구하고 계신다. 그리스도께서는 새로운 제사를 바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신자들에게 충만한 구원을 주기 위해서 다시 오실 것이다.


또는 (히브 10,19-23) 해설

<참된 신앙생활>


이제 앞으로, 인간들을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길은 예수 자신이시다. 우리는 예수님의 활동과 제사를 통하여 하느님께 나아갈 수가 있다. 세례를 받음으로써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다. 이 결합은 공동체의 분위기 속에서 서로 사랑하고 나누고 섬김으로써 사회를 바꾸어 가는 적극적인 증거를 통하여 나타난다. 그리고 그 사랑과 나눔과 섬김이 증거를 받쳐 준다. 또한 예수님 및 형제자매인 타인들과 하나가 되면 하느님과 친교를 맺는 셈이 된다. 그 하느님과 맺는 친교는 우리가 결정적인 안식에 들어갈 때(주님의 날에) 완성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 몸 속에 돌고 그래서 우리 마음과 몸이 그리스도의 마음과 몸이 되었다. 그러니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처럼, ‘또 다른 그리스도’로서 서로 부축해 주고 다독이면서 좋은 열매를 맺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의심하는 사람들을 격려하자면 하느님 아버지께 대한 신뢰를 일깨워주어야 한다.

공동체 모임을 소홀히 하는 것은 큰 잘못이다.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천사들의 모임이 아니기 때문에, 자주 모이지 않으면 깨지고 만다. 우리가 신앙공동체 모임에 참여하지 않으면 계속해서 그리스도와 하나 될 수 없다. 우리가 신앙을 가진 형제자매들과 친교를 나누지 않으면 우리 사명의 의미를 잃고 말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인 공동체들이 서로 손잡지 않으면 결코 신앙을 증거할 수 없다.


복음(루카 24,46-53) 해설

<승천은 ‘예수님 변모’의 새롭고도 우주적인 형태다>


루카 복음서에서는 예수 승천을 사도행전에서와는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고 있다. 사도행전에서는 승천이 사명의 출발점이 되어 있다. 그러나 루카 복음서에서는 승천을 ‘파스카 날’과 파스카 사건의 결론으로 제시한다.

물론 사도행전에도 그 같은 관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사도행전은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이 구약성경과 맞아떨어지고, 그 기쁜 소식이 모든 사람에게 전달되어야 하고, 모든 사람이 회개하고 죄를 용서받아야 하고, 제자들은 성령을 받은 다음 예루살렘을 떠나 사명을 수행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47-49절). 그러나 루카 복음서에서는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복이 내려온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 이야기는 틀림없이 루카 복음서 1장을 상기시킨다. 1장에서 백성은 즈카르야의 축복을 기다리면서 성전 밖에 서 있었다. 그러나 즈카르야가 갑자기 벙어리가 되었기 때문에 그 축복을 받을 수 없었다(참조. 루카 1,21 이하). 그러나 이제 죽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축복과 구원의 신비가 모든 백성의 첫 열매인 제자들 위에 내려진다. 여기에서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였음을 강조한 이유는, 복을 내려 주시는 분이 이제는 더 이상 차례로 전례를 집전하는 사제가 아니라(참조. 1,8), 하느님과 동등하신 주님, 부활하여 하느님 외아들 자리에 앉아 흠숭을 받아 마땅한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은 그분 제자들이 걸어가고 거치고 도달해야 할 신비이다.


묵상

<주 예수께서 승천하셨다>


예수 승천: 그리스도께서 아버지께서 누리는 영광을 받으셨다

예수 승천이라는 사건은 부활하신 그리스도께 대한 감각적 체험의 결론적인 국면으로서 그리스도의 구원사업 전체를 완성하고 비추어 준다. 부활의 우주적이고 보편적인 차원을 나타내는 승천은 루카 복음서 저자에 따르자면 이미 예수님의 변모(變貌) 때에 미리 보여준 사건으로서 그리스도의 탈출(이집트 탈출)이요, 아버지께로 되돌아가심이요, 당신 영광에 도달함이요, 당신 사제직의 충만한 실현이요, 당신의 재림을 기다리는 우리에게 성령을 선물로 주시겠다는 약속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생각하는

하늘과 땅 사이의 관계>


거의 모든 종교에서처럼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하늘은 하느님의 거룩하심이 머무는 곳이요, 하느님의 거처요, 하느님의 고유한 영역이고, 한편 땅은 사람들의 영역이다(시편 115,16).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당신의 성령과 말씀을 보내어 그들을 만나실 수 있지만, 사람들은 제 힘으로 하늘에 도달할 수 없다. 감히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하느님, 가까이 계시는 것 같으면서도 멀리 계시고 사람과 전적으로 다르신(사람은 어디까지나 하느님의 피조물이라는 뜻) 하느님께 도달하려는 사람 자신의 열망과 노력만으로는 항상 거짓된 환상에 떨어지고 만다.

사람이 하느님께 도달할 수 있기 위해서는 하느님께서 몸소 사람의 영역 안으로 들어오고 사람의 역사 안으로 들어오실 필요가 있었다. 예수 승천의 신비는 이미 육화(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으로 되심)의 신비에 들어 있었다.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사람의 아들 말고는 하늘에 올라간 이가 없다.”(요한 3,13)


<그리스도의 승천은 곧 사람의 승천이다>


예수 승천은 그리스도의 부활과 현양되심에 속하여 있는 하나의 전체적인 구원 사건에 들어 있으면서도, 그 나름의 고유한 신학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에페 4,10; 1티모 3,16; 히브 4,14).

원시(原始) 그리스도론의 몇몇 표현이 예수 승천에서 단지 예수님의 승리만을 보려고 하는 것 같지만(사도 2,33 이하), 즉시 예수 승천을 “그리스도께서 당신이 오신 세계로 되돌아가심”으로 표현하고 있다. 사실 승천을 묘사하기 위해 쓴 그리스어 낱말들을 보면 ‘하느님께서 데려가심’을 가리키고 있다. 승천은 그리스도께서 몸소 올라가셨다기보다, 하느님께서 불러올리신 것으로 표현되고 있다.

아버지께로부터 오신 예수께서 다시 아버지께로 되돌아가신다. 승천은 아버지께 순종하여 받아들인 죽음을 통과한 다음에 일어난 사건이고, 당신 자신을 무화(無化)하고 나서 영광을 받으신 다음에 일어난 사건이다(필리 2,7 이하).

승천은 그리스도의 존재 방식일 뿐 아니라 하나의 영원한 사건이다.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아들은 당신의 사람들을 통하여 끊임없이 아버지의 품으로 되돌아가시고 당신 영광을 향해 승천하고 계신다. 하느님의 아들이시자 동시에 우리와 온전히 똑같은 사람인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안에 온 인류를 껴안고 인격화(人格化)하신다. 승천은 온 인류를 영원 속으로 들여보내시는 사건이다. 승천은 하느님께서 인류를 당신 품속에 받아들이시는 사건이다. 인류와 인간성 안에 불어넣어 주신 당신을 향한 열망을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 주시는 사건이다.

성경의 언어에서 하늘은 분명히 허공(창공)을 가리키거나, 우리가 도달할 수 있는 어떤 장소를 가리키거나 미래에 어떤 시간을 가리키거나 어떤 꾸며 낸 가공의 것을 가리키지 않고, 땅에 사는 사람으로서 감히 가까이 할 수 없는 하느님의 초월성의 신비를 나타내는 말이다. “하느님께서 들어 높여 주시지 않은 이상 아무도 하느님 아버지께 도달할 수 없다. 하느님 아들의 신성에까지 올라갈 수 없다.”(오리게네스, 요한 1,27주해) 오직 하느님만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의 신비에 접근할 수 있게 하실 수 있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러 간다.”(요한 14,2)


<그리스도의 승천으로 인간이 하느님을 닮는다>


하늘로 올라가는 예수께서는 아버지께로 올라가는 ‘하느님의 아들’이시다. 사람들과 똑같은 한 형제로서 그분은 온 인류를 아버지와 친밀한 관계, 즉 부모와 자녀로서의 관계를 맺어 주신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아버지와 맺게 된 자녀로서의 친교는 그야말로 새로운 관계이다. 아버지와 맺은 이 새로운 관계로 인하여 우리 사이에도 아주 새롭게 하느님의 똑같은 자녀로서 형제자매지간이라는 관계가 생긴다.

우리 모든 사람이 서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정과 사랑을 느끼게 된 것은, 그리고 인류가 서로 아름답고 풍요하고 심오한 친교(親交)를 누리게 된 것은, 또 모든 사람이 내부 깊숙이 파고든 사랑의 신비로 길러지고 변화된 것은 하느님께서 모든 사람과 인류를 그리스도 안에서 총애하시게 되었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총애는 그리스도 안에서 가장 구체적인 인정(人情)으로 드러났다. 육화(肉化: 하느님 아들의 사람되심)는 하느님 자신이신 은총이 베풀어진 첫 순간이면서 그 안에 이미 모든 것을 품고 있었고, 예수 승천은 우리 인류가 하느님과 맺는 친교를 향해 끊임없이 나아가게 되는 순간이며, 죄악의 일그러진 상태에서 구속으로 얻어진 순수한 새로움으로 올라가는 영원한 순간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에서 벗어나고, 우리를 형제들과 갈라놓은 이기심을 극복할 때, 그리고 마음속에 도사린 못나 보이는 사람들에 대한 멸시와 무관심과 피해감정과 몰인정과 수탈과 박해를 걷어치울 때, 우리 자신을 남김없이 열어 보이고 친교를 나누고 헌신하고 바칠 때 비로소 우리는 승천의 신비 속으로 들어가고, 우리가 처한 구체적인 상황에서 온 인류를 아버지께로 인도하려고 세상 한가운데 살아계시는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게 된다. “나는 네가 한 일을 안다. 보라, 나는 아무도 닫을 수 없는 문을 네 앞에 열어 두었다.”(묵시 3,8)

인류의 합심과 공동선을 위하여 자신을 열어놓고 몸 바치는 창조적인 행위와 거기서 우러나오는 기쁨과 사랑은 우리를 하늘로 인도하며 주 그리스도의 현존으로 인도한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야말로 세상 한가운데서 합심과 친교와 들어 높임의 원천이시다.

이처럼 우리의 승천은 세상에서 이탈하는 승천이 아니고 세상과 더불어 올라가는 승천이다. 온갖 인간사에 철저하게 뿌리를 내리고 역사 안에서 고뇌하며 살고 있는 구체적인 사람들 모두와 더불어 또 그 중에 하나로서 그리스도께 열리고 아버지께로 올라가는 것이다.

이 올라감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닫아 버리고 걸림돌을 만들지 않은 이상 끝이 없다. “어떠한 눈도 본 적이 없고 어떠한 귀도 들은 적이 없으며 사람의 마음에도 떠오른 적이 없는 것들을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을 위하여 마련해 두셨다.”(1코린 2,9)

아버지 곁에서 인류를 위해 전구하려고 승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성령을 통하여 당신의 구원사업을 계속하고 계신다. 그 구원 사업은 그리스도의 삶을 이어가는 모든 사람들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들이 온 인류를 이끌어 아버지께로 올라가는 것이다.


복음해설(2)


예수님의 승천(24,46-53)    

예수승천 이야기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발현 이야기 가운데 하나다. 부활한 예수께서 마지막으로 발현하여 당신 제자들과 헤어지신다(참조. 사도 1,13-14). 이 이야기의 특징은 전례적 성격을 강조한 데 있다.

예수님의 떠나심은 예루살렘에서 이루어져야 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 곧 세상을 떠나실 일을 말하고 있었다.”(루카 9,31) 예수께서는 단호하게 예루살렘을 향하여 나아가셨다. “하늘로 올라가실 때가 차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루카 9,51) 그리고 사도들은 예루살렘에서 성령의 힘을 받았다. 성령께서는 사도들에게 복음화 사명을 다 할 수 있게 해 주셨다(사도 1,4). 사도행전에서 부활한 예수께서 승천하신 장소는 올리브 산이다(사도 1,12). 이 이야기에서 예수께서는 사도들을 “베타니아 근처까지 데리고 가신다.”(24,50) 베타니아는 올리브 산 동쪽에 있는 마을이었다. 예루살렘에서 3킬로미터 떨어진 곳이었다(참조. 19,29).

그리스도께서는 사도들이 보는 앞에서 사라지셨다고 말한다. 이는 대사제가 지성소에 들어갈 때 유다인들이 보는 앞에서 사라진 것과 같다(참조. 히브 9,1-14). 전형적인 사제의 동작으로 예수께서는 손을 들어 그들에게 강복하신다. 강복에 대한 이 언급은 루카로 하여금 자기 복음서의 시작과 마침을 연결할 수 있도록 해 준다. 시작할 때에는 즈카르야 사제가 자기 불신 때문에 백성에게 강복을 줄 수가 없었다(루카 1,22). 그러나 마지막 장면에서는 예수께서 땅 위에서 펼친 당신 활동을 효과를 낳는 강복으로 마감하신다.

예수께서는 강복하는 동안(강복한 다음이 아니다.) 당신 제자들에게서 떠나신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느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복을 이루어주신다. 루카는 성전 전례에서 사용하는 그 심상들을 취함으로서 그때부터 앞으로 부활하신 주님이 펼치실 사제 기능을 깨닫게 해 주고 싶어 한다.

예수님을 수행하던 사람들이 취한 태도 역시 전례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 즉 그 사람들은 주님 앞에 엎드려 감사하는 마음으로 가득 차 성전에서 하느님을 찬양했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떠나가셨어도 제자들은 커다란 기쁨을 안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간다. 기뻐하는 이 감정은 이상하게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정녕 주님께서 되살아나셨음을’ 목격했기 때문에 기쁨에 사로잡힌다. 그리고 제자들은 자기들이 곧 ‘높은 데서 오는 힘을 입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24,49). 그 ‘큰 기쁨’은 천사가 즈카르야에게 약속한 기쁜 일이 이루어진 결과다(루카 1,14). 또한 천사가 목자들에게 약속한 커다란 기쁨이 실현된 결과다(루카 2,10).

루카는, 자기가 드러내놓고 말한 것처럼(1,7-8; 24,53), 예루살렘 성전을 언급하면서 자기 복음서를 마감한다. 그러나 그 동안에 모든 것이 바뀌었다. ‘이스라엘의 시대’가 ‘그리스도의 시대’에 자리를 내주었다. 그리고 벌써 교회의 시대를 예고한다. 교회의 시대는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더불어 기도하는 가운데 모여 있는 회중 위에 성령께 내려오심으로써 시작될 것이다(사도 1,14; 2,1-4).

예수승천의 신비는 성령의 파견을 가능하게 해 준다. 그리고 교회의 시대를 열어준다. 또한 파루시아(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전제가 된다. 뒤에 가서 루카는 사도행전에서 예수승천의 이 신학적 측면, 즉 그 선교적 차원을 더 조심스럽게 펼쳐 보일 것이다. 주님의 승천과 ‘위로의 때’(다시 말해서, 주님이 영광스럽게 다시 오실 때, 참조. 사도 3,20-21) 사이에 교회의 시대가 들어 있다. 교회의 시대는 성령강림으로 시작되었다. 교회는 예루살렘에서 “땅 끝에 이르기까지”(사도 1,8) 구원의 말씀을 전해야 한다.

사도행전의 서언(사도 1,1-2)은 셋째 복음서인 루카 복음서와 사도행전이 두 권으로 된 한 작품임을 분명히 보여준다. 그래서 루카의 고유한 관점을 알기 위해서는 그 두 기록물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그 필요성은 특히 루카 복음서 마지막 대목과 사도행전 시작 대목을 비교해보면 분명히 드러난다. 루카 복음서에는 예수님의 생애가 예루살렘에서 절정에 다다른다. 그곳에서 루카 복음서의 마지막 국면이 모두 펼쳐진다(루카는 예수께서 갈릴래아에서 나타나신 발현에 대해서는 말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국면은 두 부분으로 되어 있다. 즉 예수님이 성전에서 행하신 설교(19,28-21,38)와 당신 수난, 부활, 승천(22,1-24,53)이 그것이다.

사도행전에서는 그와 반대로 예루살렘과 관련하여 원심력이라 부를 수 있는 거꾸로 된 운동을 만날 수 있다. 갓 태어난 교회의 요람인 거룩한 도시 예루살렘으로부터 구원이 계속 퍼져가는 파동처럼 카이사리아와 안티오키아를 비추어간다. 바오로가 로마 세계의 주요 주(州)들에서 선포한 복음이 마침내 제국의 심장부인 로마까지 다다른다. 그런 식으로 사도행전 시작부터 예수님의 예언이 실현되기 시작한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내리시면 너희는 힘을 받아,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 그리고 땅 끝에 이르기까지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사도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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