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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강론] <연중 제3주일 본문+해설+묵상> - 김수복
작성자김종연 쪽지 캡슐 작성일2010-01-20 조회수1,860 추천수0
 

<연중 제3주일 본문+해설+묵상>

연중 제3주일


제1독서


<백성은 읽어 준 것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느헤미야기의 말씀입니다. 8,2-4ㄱ.5-6.8-10

그 무렵 2 에즈라 사제는 남자와 여자, 그리고 말귀를 알아들을 수 있는 모든 이로 이루어진 회중 앞에 율법서를 가져왔다. 때는 일곱째 달 초하룻날이었다. 3 그는 ‘물 문’ 앞 광장에서, 해 뜰 때부터 한낮이 되기까지 남자와 여자와 알아들을 수 있는 이들에게 그것을 읽어 주었다. 백성은 모두 율법서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다.

4 율법 학자 에즈라는 이 일에 쓰려고 만든 나무 단 위에 섰다. 5 에즈라는 온 백성보다 높은 곳에 자리를 잡았으므로, 그들이 모두 보는 앞에서 책을 폈다. 그가 책을 펴자 온 백성이 일어섰다. 6 에즈라가 위대하신 주 하느님을 찬양하자, 온 백성은 손을 쳐들고 “아멘, 아멘!” 하고 응답하였다. 그런 다음에 무릎을 꿇고 땅에 엎드려 주님께 경배하였다.

8 레위인들은 그 책, 곧 하느님의 율법을 번역하고 설명하면서 읽어 주었다. 그래서 백성은 읽어 준 것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9 느헤미야 총독과 율법 학자며 사제인 에즈라와 백성을 가르치던 레위인들이 온 백성에게 타일렀다. “오늘은 주 여러분의 하느님께 거룩한 날이니, 슬퍼하지도 울지도 마십시오.” 율법의 말씀을 들으면서 온 백성이 울었기 때문이다. 10 에즈라가 다시 그들에게 말하였다. “가서 맛있는 음식을 먹고 단 술을 마시십시오.

오늘은 우리 주님께 거룩한 날이니, 미처 마련하지 못한 이에게는 그의 몫을 보내 주십시오.

주님께서 베푸시는 기쁨이 바로 여러분의 힘이니, 서러워하지들 마십시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19(18),8.9.10.15(◎ 요한 6,63ㄷ)

◎ 주님, 주님의 말씀은 영이며 생명이시옵니다.

○ 주님의 법은 완전하여 생기를 돋게 하고,

주님의 가르침은 참되어 어리석은 이를 슬기롭게 하도다.

◎ 주님, 주님의 말씀은 영이며 생명이시옵니다.

○ 주님의 규정은 올발라서 마음을 기쁘게 하고,

주님의 계명은 맑아서 눈에 빛을 주도다. ◎

○ 주님을 경외함은 순수하니 영원히 이어지고,

주님의 법규들은 진실이니 모두가 의롭도다. ◎

○ 주님, 저의 반석, 저의 구원자,

주님 앞에 드리는 제 입의 말씀과 제 마음의 생각이

주님 마음에 들게 하소서. ◎ 

 

제2독서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몸이고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지체입니다.>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말씀입니다. 12,12-30 또는 12,12-14.27

짧은 독서를 할 때에는 < > 부분을 생략한다.

형제 여러분, 12 몸은 하나이지만 많은 지체를 가지고 있고 몸의 지체는 많지만 모두 한 몸인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도 그러하십니다. 13 우리는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종이든 자유인이든 모두 한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습니다. 또 모두 한 성령을 받아 마셨습니다. 14 몸은 한 지체가 아니라 많은 지체로 되어 있습니다. <15 발이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속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해서, 몸에 속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16 또 귀가 “나는 눈이 아니니 몸에 속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해서, 몸에 속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17 온몸이 눈이라면 듣는 일은 어디에서 하겠습니까? 온몸이 듣는 것뿐이면 냄새 맡는 일은 어디에서 하겠습니까?

18 사실은 하느님께서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각각의 지체들을 그 몸에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19 모두 한 지체로 되어 있다면 몸은 어디에 있겠습니까? 20 사실 지체는 많지만 몸은 하나입니다. 21 눈이 손에게 “나는 네가 필요 없다.” 할 수도 없고, 또 머리가 두 발에게 “나는 너희가 필요 없다.” 할 수도 없습니다.

22 몸의 지체 가운데에서 약하다고 여겨지는 것들이 오히려 더 요긴합니다. 23 우리는 몸의 지체 가운데에서 덜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특별히 소중하게 감쌉니다. 또 우리의 점잖지 못한 지체들이 아주 점잖게 다루어집니다. 24 그러나 우리의 점잖은 지체들은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자란 지체에 더 큰 영예를 주시는 방식으로 사람 몸을 짜 맞추셨습니다. 25 그래서 몸에 분열이 생기지 않고 지체들이 서로 똑같이 돌보게 하셨습니다. 26 한 지체가 고통을 겪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겪습니다. 한 지체가 영광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기뻐합니다.>

27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몸이고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지체입니다. <28 하느님께서 교회 안에 세우신 이들은, 첫째가 사도들이고 둘째가 예언자들이며 셋째가 교사들입니다. 그다음은 기적을 일으키는 사람들, 그다음은 병을 고치는 은사, 도와주는 은사, 지도하는 은사, 여러 가지 신령한 언어를 말하는 은사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29 모두 사도일 수야 없지 않습니까? 모두 예언자일 수야 없지 않습니까? 모두 교사일 수야 없지 않습니까? 모두 기적을 일으킬 수야 없지 않습니까? 30 모두 병을 고치는 은사를 가질 수야 없지 않습니까? 모두 신령한 언어로 말할 수야 없지 않습니까? 모두 신령한 언어를 해석할 수야 없지 않습니까?>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환호송


루카 4,18

◎ 알렐루야.

○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게 하셨도다.

◎ 알렐루야. 

 

복음


<오늘 이 성경의 말씀이 이루어졌다.>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1-4; 4,14-21

1 우리 가운데에서 이루어진 일들에 관한 이야기를 엮는 작업에 많은 이가 손을 대었습니다. 2 처음부터 목격자로서 말씀의 종이 된 이들이 우리에게 전해 준 것을 그대로 엮은 것입니다. 3 존귀하신 테오필로스 님, 이 모든 일을 처음부터 자세히 살펴본 저도 귀하께 순서대로 적어 드리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4 이는 귀하께서 배우신 것들이 진실임을 알게 해 드리려는 것입니다.

그때에 4,14 예수님께서 성령의 힘을 지니고 갈릴래아로 돌아가시니, 그분의 소문이 그 주변 모든 지방에 퍼졌다. 15 예수님께서는 그곳의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모든 사람에게 칭송을 받으셨다.

16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자라신 나자렛으로 가시어,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셨다. 그리고 성경을 봉독하려고 일어서시자, 17 이사야 예언자의 두루마리가 그분께 건네졌다. 그분께서는 두루마리를 펴시고 이러한 말씀이 기록된 부분을 찾으셨다.

18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19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20 예수님께서 두루마리를 말아 시중드는 이에게 돌려주시고 자리에 앉으시니,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의 눈이 예수님을 주시하였다. 2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영성체송


시편 34(33),6

주님을 바라보아라.

기쁨에 넘치고 너희 얼굴에 부끄러움이 없으리라. 

 

해설과 묵상


제1독서(느헤 8,2-4ㄱ 5-6. 8-10) 해설

<이날은 주님께서 마련하신 거룩한 날이니

너희는 슬퍼하지 말고 주님께서 주시는

기쁨을 받아 힘과 용기를 내어라>


기원 전 538년 키루스 황제가 바빌론에서 귀양살이하는 사람들에게 조국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 준 칙령을 발표함에 따라 귀양살이하던 유다인들도 수많은 난관을 이겨내면서 조국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특히 느헤미야와 에즈라 두 인물이 열성적으로 적극 나서서 히브리인들에게 민족의식과 국가의식을 일깨우고 그들을 다시 조직하는 데 성공했다. 에즈라는 법전을 중심으로 공동체를 재조직할 임무를 떠맡았다.

오늘 독서에서 묘사된 예식은 에즈라가 이스라엘 백성을 다시 모아들여서 예로부터 이스라엘의 생활 기초가 되어 왔던 하느님과 맺은 계약들을 다시금 일깨우려고 기울인 노력을 나타내고 있다. 즐거운 축제인 초막절 동안 법전을 공적으로 낭독한 의미가 거기에 있었다.

이처럼 귀양살이에서 돌아온 후 맨 먼저 이스라엘 백성은 축제를 벌이는 백성으로서 새로이 모여 말씀의 전례를 거행하고 친교의 예식에 참여한다. 여기에서 전례 모임의 전통적인 구조를 엿볼 수 있다. 그 전례와 예식에서는 과거에 맺은 계약을 기념하는 데 그치지 않고 미래를 바라보면서 하느님과 맺은 계약을 충실히 지키겠다고 다짐하고 약속한다. 전례를 거행하는 동안 에즈라는 법전을 자세하게 풀이하여 백성으로 하여금 알아듣고 깨칠 수 있게 해 준다.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가르침을 받아 깨달은 온 백성은 마냥 기뻐하며 돌아가서 크게 잔치를 벌이고, 가진 것이 없는 사람에게 그 몫을 챙겨 주면서 먹고 마시며 즐겼다. 온 인류는 하느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귀담아듣고 실천하여 당신이 주신 모든 것과 능력을 모조리 한 밥상 위에 올려놓고 나눔의 큰 잔치를 벌이고 친교의 기쁨을 누리라는 초대를 받고 있다.


화답송(시편 19[18],8.9.10.15[◎ 요한 6,63ㄷ]) 해설

<주님, 주님의 말씀은 영이요 생명이나이다>


참된 말씀, 기쁨을 주는 말씀, 빛나는 말씀은 사람으로 하여금 해방을 체험하게 해 준다. 하느님께서 오랫동안 침묵을 지키시던 귀양살이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의 법전을 낭독하고 새로이 풀이해 주자, 그런 깨달음과 생기와 기쁨과 감격에 넘친다.

하느님의 말씀은 사람을 얽어매기는커녕 오히려 사람을 자유롭게 하고 생기에 넘치게 한다. 하느님의 말씀이 현실의 진정한 모습을 있는 그대로 벗겨 주기 때문이다. 주님의 판단만이 참되고 옳으며 주님의 계명을 따르는 것만이 올바른 인생길이다.


제2독서(1코린 12,12-30) 해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몸이요 서로 그 지체이다>


그리스도인들이 받은 영적 특은의 다양성 및 그에 따라 공동체 안에서 맡은 임무와 구실의 다양성은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단일성을 해치기는커녕, 오히려 그 공동체에 풍요로움을 더해 준다.

사람의 몸이 하나인 것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께서도 오직 한 분뿐이시다. 몸에 지체가 여럿이고 다양한 것처럼 그리스도의 지체도 여럿이고 다양하다(12절).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고 같은 성령을 받아 마신 우리 모두는 죽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을 이룬다(13-14절). 그리스도의 몸을 이룬 우리 모두는 세상과 역사 한가운데서 그리스도를 드러내고 그리스도처럼 살아 그리스도의 삶을 이어가야 하는 무거운 사명을 띠고 있다. 그리스도의 몸을 이룬 우리 모두는 먼저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에 참여한 다음, 그리스도의 부활과 영광에 참여하도록 되어 있다.

그리스도의 신비체를 사람의 몸에 비긴 설명은 14-16절에도 나온다.

사람 몸의 지체들과 마찬가지로, 온갖 선물과 특은은 그리스도인 공동체 전체의 공동선을 위하여 베풀어졌다. 모든 사람이 서로 몸 바쳐 섬기도록 하기 위하여 베풀어졌다. 그리스도의 각 지체가 맡은 임무는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한 것이 따로 없고 모두 똑같이 중요하다. 살아 움직이는 유기체를 이루기 위해서는 작은 임무가 따로 없으며 모든 지체와 세포가 다 건강해야 하고 활력에 넘쳐야 한다.


복음(루카 1,1-4; 4,14-21) 해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채워졌다>


오늘 복음에는 루카 복음서의 두 대목이 연결되어 있다. 서론(1,1-4)과 예수께서 당신 고향 나자렛을 방문하신 이야기(4,14-21)가 연결되어 있다.

서론 부분은 일정한 양식에 따른 문장 구조와 격식을 갖춘 말투로 보아 그리스 문학 형식을 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오늘 복음은 예수께서 나자렛을 첫 번째로 방문하신 이야기 가운데서 당신을 메시아로 제시하는 첫째 부분만을 낭독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이 당신을 배척한다는 이야기를 뒤로 미룬다.

예수께서는 안식일에 나자렛 회당에 들어가 이사 6,1-2를 낭독하고, 그 예언이 당신 안에서 실현되었다고 설명하신다.

루카 복음서 저자가 이사야서의 구절을 인용하면서 ‘은총의 해’를 선포하는 구절만을 취하면서 민족들을 심판하시는 구절은 빼놓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 대신 루카 복음서 저자는 “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내보낸다.”는 이사 58,6을 덧붙이고 있다. 루카 복음서 저자가 강조하려는 점은 바로 예수님의 현존이 가져다주는 ‘은총’과 ‘구원’의 성격이다.

예수께서는 “오늘 이 성경 말씀이 이루어졌다.”라고 말씀하신다. 오늘의 인류 역사 안에서도 다름 아닌 예수께서 메시아이시다. 오늘도 예수께서는 가난한 사람들과 억눌린 사람들과 갇힌 사람들을 구출하고 풀어 주는 구세주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그리스도와 함께 살고 있는 사람이며,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말씀은 언제나 우리 역사의 현실을 고발하면서 끊임없는 변혁을 요구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안겨 주는 말씀을 계속 들려주고 계신다.


묵상

<가장 높으신 하느님의 말씀>


백성에게 선포되는 하느님의 말씀은 오늘 전례의 본질 내용이다. 에즈라는 하느님의 법전을 선포함으로써 히브리인들의 공동체를 새롭게 조직한다. 예수께서도 성경을 풀이해 주심으로써 당신 공적 생활을 시작하신다. 하느님의 말씀은 그리스도 안에서 몸을 취하여 사람이 되고, 오늘날에는 신앙공동체에 베풀어 주시는 갖가지 특은을 통하여 전달된다.

성경은 창조사업을 하느님 말씀의 사업으로 제시한다(참조. 창세 1-2). 이스라엘 백성이 존재하게 된 것도 하느님의 말씀 덕분이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은 자기 역사가 가장 비극적인 순간과 위기에 처할 때마다 하느님의 말씀 안에서 구원을 발견한다. 정치적 또는 사회적 여러 실패와 좌절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저버린 데 대한 벌로 여겼다.

에즈라도 나라를 재건하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정치적 내지 윤리적으로 새로운 깨우침을 주기 위하여 역시 주님의 말씀을 귀 기울여 듣고 따르는 공동체를 조직한다. 이스라엘 백성은 주님의 말씀을 다시 주의 깊게 들음으로써 하느님께 대한 자기네 의무를 다시 발견하게 되며 충실하지 못한 자기 과거를 반성하여 뉘우치고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기까지 한다. 우리는 하느님을 경외하며 겸손한 마음으로 당신께 다가갈 때, 당신 말씀을 받아들이기 위해 마음을 비울 때, 비로소 그런 감격을 느낄 수 있다. 회개한 백성에게 하느님께서는 커다란 기쁨을 주고, 축제를 지내게 하신다. 하느님의 말씀을 알아듣고 체험으로 깨달으면 축제를 벌이지 않을 수 없다. 그 깨달음으로 온갖 속박과 억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말씀이시다>


성경의 하느님은 불경한 자들이 섬기는 우상들과 달리 말 못하는 신이 아니시다. 성경의 하느님은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말씀을 건네는 살아계신 분이다. 또한 기쁨과 분노를 표현하는 사람과 같은 감정을 지닌 하느님이시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동서고금의 숱한 예언자와 현자를 통하여 그리고 율법을 통하여 계시해 주신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무엇보다도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 자신을 온전히 계시하신다. 하느님의 말씀이 사람이 되어 오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다.

예수께서는 나자렛에 사는 당신 고향 사람들에게 성경의 말씀이 “오늘 이루어졌다.”고 기쁜 소식을 선포함으로써 당신의 공적 활동을 시작하신다. 메시아에 관한 약속이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실현된다. 성령으로 축성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난한 사람들과 억눌린 사람들, 갇힌 사람들과 눈먼 사람들에게 해방과 구원을 가져다주신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하느님의 나라가 마침내 인류 역사 가운데로 들어가게 되었다. 구원이 그저 희망사항에 그치지 않고 가난한 사람들과 억눌리는 사람들을 구출해 내는 해방작업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예수께서는 자기 ‘고향 사람들’로부터 배척을 당하신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 몸과 삶으로 직접 보여 주신 기쁜 소식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구원과 해방을 체험할 수 없다. 즉, 그리스도께서 몸소 실천하신 ‘나누는 정의’와 ‘용서하는 형제애’의 기쁜 소식을 배척하는 사람은 구원과 친교의 기쁨과 진정 사람다운 따뜻함을 체험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그 기쁜 소식을 받아들이면 그리스도의 신비체는 사랑을 나누는 친교의 공동체로 자란다. 그리스도의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하느님과 이웃에게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들은 서로 한 몸을 이룬다. 그런 사람들은 서로 깊은 정을 나누고 서로 돕고 채워 주면서 하느님의 나라를 건설해간다. 그리고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고 서로 섬기며 몸 바치려는 노력을 하게 된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형제자매가 되어야 하는 온 인류의 해방과 일치를 위하여 그리스도처럼 가난하고 보잘 것 없는 이웃들과 똑같은 삶을 살게 된다. 무엇보다 하느님의 말씀으로 사람이 되신 그리스도 자신이야말로 우리에게 무한한 위로와 용기를 주고 목숨까지 바치는 희생정신을 불어넣어 준다.




복음해설(2)(해설번역 끝내 놓고, 성경본문사용허락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루카 1,1-4

머리말(1,1-4)

이 서언에서는 어휘를 세심하게 선택하고, 문체를 매우 조심스럽게 동원하고 있다. 루카는 그리스 시대의 역사가들(디오스코리데스, 아리스테아스 등)을 본받는다. 루카 복음서는 ‘완벽하게 연결되어 있는 단 하나의 연설’이라고도 할 수 있다. 주요한 한 연설 안에 작은 연설들이 들어 있는 형국이다. 가정문과 귀결문이 분명하게 보인다. “너희는… 들었다. 나는 말한다.…” 그런 모양으로, 루카는 자기 복음서의 목적을 표현한다. 서언 부분은 다음과 같이 나눌 수 있을 것이다. ㄱ) 앞선 사람들의 시도(1-2절). ㄴ) 루카의 작업(3절). ㄷ) 루카 복음서의 목적(4절).

1절: 루카 앞에 이미 많은 사람이 주 예수님의 인생・수난・죽음・부활을 이야기하려 시도했다. 이제 루카는 그 이야기들은 다시 취하고 다시 해석하기로 결단을 내린다. 그것은 자기 독자들에게 그 이야기들을 정리해서 내놓기 위해서다. ‘많은 이’는, 의심할 여지없이, 강조하는 표현일 것이다. 실제, 그 많은 사람들은 ‘몇몇’ 사람을 가리킬 것이다. ‘플레로포레오’(“우리 가운데서 이루어진 일들”)라는 동사는 이야기하는 사건들 속에서 하느님이 구약 시대에 해 주신 약속이 이루어졌음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2절: 복음서 저자는 자기가 복음서를 쓰기 전에 있던 자료를 알고 있다. 루카는 아마 예수님과 더불어 살던 사람들로서 지금은 ‘말씀의 종’이 된 사람들에 대해서 말을 하고 있을 것이다. 더구나, 루카는 초기 교회의 전승들을 의식적으로 찾고 있었다(‘카토스 파레도산 헤민’). 초기 설교자들을 가리키는 데 루카는 예수님과 함께 살던 사도들에게만 붙이던 ‘순교자들’(‘증인들’)이라는 낱말을 사용하지 않고, ‘아우톱타이’(‘목격 증인들’)와 ‘히페레타이’(‘임무를 맡은 사람들’)에 대하여 말한다.

3절: 루카는 정해진 목적에 따라서 자기가 모은 자료를 정리한다. ‘파라콜루테오’(‘양심적으로 탐구하다.’)라는 동사의 분사는 그 전승에 충실하게 자기 복음서를 기록하고 편집할 수 있는 자기 능력과 자격을 가리킨다. 루카의 목적은 단순히 정보를 주고 가르치는 데 있지 않다. 그 목적은 하느님이 당신 계시를 우리에게 전하실 때 가지고 계시던 목적이다. 그 목적은 믿는 태도로 당신 말씀을 받아들이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는 데 있다.

루카는 자기 복음서를 테오필로스라는 사람에게 바친다. 그렇게 바치는 데서도, 루카는 당시의 관습을 따른다. 옛날 저술가들이나 역사가들은 자기 작품을 중요한 어떤 인물에게 바치는 습관이 있었다(예를 들어서, 의사 디오스코리데스는 자기 의학서를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아레오에게 바친다).

테오필로스라는 이름은 ‘하느님께 사랑받는 사람’을 뜻한다. 이 이름은 구약성경에 여러 가지 형태로 나오는 히브리어 ‘예디디아’와 매우 비슷하다(2열왕 22,1; 2사무 12,25). 그리스어 이름은 주전 3세기서부터 기록물과 두루마리에서 발견된다. ‘존귀하신’(‘저명하신’)이라는 수식어는 그가 높은 관리였음을 가리킨다(사도 23,26; 24,3; 26,25). 어떤 사람들은 테오필로스가 루카의 고향 안티오키아에 살던 그리스도인이었으리라 생각한다. 자기 작품을 그에게 바칠 때, 루카는 문학적 형식을 넘어선다. 왜냐하면 테오필로스가 자기가 정리해서 쓴 이야기를 알아들 수 있고 또 자기 전언을 소화할 수 있는 신자였기 때문일 것이다. 다시 말해서, 루카가 만나고 싶어 하는 독자들의 귀감이기 때문이다.

4절. “귀하께서 배우신 것들이 진실임을 알게 해 드리려는 것입니다.” 테오필로스는 이미 교리를 배웠고, 복음의 가르침을 알고 있다. 믿음에서 성장하려면, 이제 그 가르침을 더 확실하게 다질 필요가 있다(성경의 의미로 ‘안다.’는 것은 받아들여 생활화하는 것을 뜻한다). 루카의 복음은 그리스도 예수를 믿으라는 기쁜 선포에 그치지 않는다. 그 복음은 또한 ‘교리교육’이기도 하다. 즉 독자가 이미 받은 믿음, 즉 사랑을 통하여 행동으로 옮겨야 할 믿음에 대한 더 체계적인 가르침을 가리키기도 한다. 

위에서 한 말을 요약해 본다. ㄱ) 예수님 생애에서 일어난 사건들과 당신 말씀들은 예수님의 교회인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통하여 우리에게 전해졌다. ㄴ) 루카는 하느님의 계시를 정성스럽게 탐구하고, 충실하게 전하려고 애썼다. ㄷ) 복음서 저자의 명백한 목적은 그의 작품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를 우리에게 가리켜 보이고 있다. 즉 과거 사건에 대한 단순한 역사 보고서로 읽어서는 안 되고, 믿음에서 성장하도록 도와주는 교리교육으로서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루카는 ‘에피뇨스케인’(‘깊이 아는 일.’)과 ‘카테체오’(‘가르치는 일’)에 대하여 말한다.


 

루카 4,14-21


예수께서 나자렛을 방문하심(4,14-30)

루카는 예수님의 공적 활동을 나자렛 회당에서, 바로 회당의 안식일 전례에서 선보인다. 예수께서는 벌써 나이 서른이 되셨다. 그래서 성경 말씀을 낭독하고 해설할 권리를 가지고 계셨다. 루카의 이야기에 따르면, 예수께서 행하신 첫 번째 연설은 전례 강론이었다.

이 대목은 기본적으로 두 부분으로 되어 있다. ㄱ) 예수께서 갈릴래아에서 펼치신 활동 전체를 소개하기 위한 요약(14-15절). 이 요약은 다음 일화(16-30절)를 알아듣는 데 필수적인 전제다. ㄴ) 나자렛 방문(16-30절).

나자렛 방문도 다음과 같은 부분들을 담고 있다. ㄱ) 이야기 서두(16-17ㄱ절). ㄴ) 성경 낭독과 그에 대한 해설(17ㄴ-21절). ㄷ) 사람들이 보인 긍정적인 반응(22ㄱ절). ㄹ) 사람들이 보인 뜻밖의 부정적인 반응(22ㄴ-29절). ㅁ) 이야기 마침말(30절). 내가 보기에는, 예수님의 삼중적인 주장과 그에 따른 사람들의 삼중적인 반응(17-29절)을 종합적으로 짜 맞추려는 시도는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할 것 같다.

고향 사람들이 예수님을 배척한 사실에 관한 루카의 이야기는 당신이 그 고을에 들른 세 차례 방문을 한 데 엮어놓은 것으로 보인다. 첫 번째 방문은 루카 4,6-22ㄱ에 나온 방문일 것이고, 마태 4,13에서도 그렇게 말하고 있다. 이 점에서 그 두 복음서 저자가 하나의 공통된 원천자료에 매여 있다는 사실은 신약성경 다른 어느 곳에도 나오지 않는 ‘나자라’(나자렛)가 언급되는 점으로 입증되는 것 같다. 마태오는 이 방문의 역사적인 맥락을 제공한다.

루카 4,22ㄴ-30도 나름대로 나자렛 방문과 다른 두 차례 방문을 반영하고 있다. 이 방문이 세 차례에 걸친 방문에 전체적인 윤곽을 제공하고 있다. 그 이유는 22ㄴ-24절만이 마태 13,54-58 및 마르 6,1-6(= 요한 4,44; 참조. 6,42)과 병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25-27절은 아마 나자렛에 들르신 예수님의 세 번째 방문을 제시하기 위하여 기록된 것 같다. 그러나 이 구절들은 마태오 복음서와 마르코 복음서에 병행 구절들이 없을 뿐 아니라, 그 신학적 범위가 모두 루카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결국, 어떤 탐구가들은 여기에서는 예수님의 업적 전체를 요약하는 루카의 독립적인 구성을 다루고 있다는 주장을 늘 의심해 왔다. 심지어 우리는 25-30절이 그 내용 때문만이 아니라 교리적 관점에서도 루카 특유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루카가 여기에서 예수께서 당신 고향 사람들과 동족들에게서 배척을 받고 그 대신 이방인들이 구원을 받으라고 부르심을 받고 있다는 자기 고유한 신학을 펼치려 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피츠마이어는 이 일화에서 단순히 마르 6,1-6ㄱ의 본문이 늘어났다고 본다.

역사-비평적 방법들, 특히 이른바 ‘문학비평’과 ‘형성사’에 기초한 이 주장들은 흥미를 끈다. 왜냐하면 본문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볼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왜 저자가 그런 식으로 편집을 했는지 이유를 밝히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그 문학유형을 고려하지 않고, 본문이 기록된 이유와 최종 목적을 제시하지 않는다. 그리고 단절된 곳들과 분명히 일치하지 않는 곳들을 보여주지 않고, 왜 본문이 문학적인 통일성을 이루고 있는 이유를 설명하지 않고 있으며, 저자가 본문을 알아들을 수 있게 또 일관성 있게 쓰려 했음을 전제로 하지 않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독자의 임무는 본문의 일관성, 논리, 이해가능성을 찾는 데 있지, 그 반대가 아니라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런 목적을 위해서라면 독자가 대목 전체의 문체와 문학유형을 아는 일이 본질적이다.

문학비평과 역사-비평 방법상의 주장들에 대하여 말한 다음, 예루살렘 성경은 이렇게 해설하고 있다. “이 복잡한 본문에서 루카는 경탄할만한 대목을 끄집어낼 줄 알았다. 그 대목은 예수께서 당신 직무를 수행하기 시작하신 장면으로서 보존되었다. 그곳에서는 예수님의 은혜로운 사명과 당신 백성의 거절을 상징적인 도식으로 묘사하고 있다.”

14-15절: 들어가는 말에 해당하는 이 두 구절에서 루카는 성령의 개입을 강조한다. 그리고 예수님 앞에서 군중이 보여준 열정을 지적하고자 한다. 그와 비슷한 표현이 루카 5,25 이하; 7,16; 13,13; 17,15; 18,43; 23,47; 사도 4,21; 13,48; 21,20에 나온다. 14절에는 복음서 저자의 고유한 후렴이 나온다: 4,17; 5,15; 7,17; 참조. 사도 2,41; 6,7; 루카 1,20. 군중이 예수님을 경탄하고 찬양한다는 말은 루카가 좋아하는 또 다른 주제다: 4,22; 8,25; 9,43; 11,27; 13,17; 19,48. 이 생각과 병행하는 것으로는 하느님을 찬양하고(2,20) 종교적인 경외심을 갖는다는(1,12) 주제가 있다.

마르 1,14-15에서,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와 있으니 회개하라고 촉구하신다. 그와 반대로, 루카는 예수님을 예언자로 제시하거나 또는 주님이 내리시는 은총의 해를 선포하라고 기름부음으로 축성된 전령으로서 제시한다(18-19절; 이사 61,1-2).

16-17ㄱ절: 루카는 이 자리에서 ‘나자렛’ 대신 ‘나자라’라는 명사를 사용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 사실에서 루카가 마르코와 달리 아주 오래된 아람어 자료를 사용했다고 본다. 그러나 우리가 이미 지적한 대로, 이 일화에서 마르 6이 부풀려 있다고 보는 사람들도 있다.  

예수께서 사실 무렵 회당 예절은 다음과 같은 모양으로 진행되었다. ㄱ) 두 가지 기도: ‘쉐마’(“이스라엘아 들어라.” 신명 6,4-9; 11,13-21; 민수 15,37-41; 참조. 루카 10,27)와 ‘쉐모네에스레’(복을 빌어주는 축원). ㄴ) 하나는 토라(모세오경)에서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예언서들(열두 소예언자들을 포함한 전기 예언자들 또는 후기 예언자들)에서 뽑아낸 두 가지 독서. ㄷ) 설명 또는 강론(참조. 사도 13,15). ㄹ) 마지막으로, 사제의 축복(민수 6,22-27).

예수께서 책을 펴들고 이사 61,1-2를 낭독하신다. “주님의 영이 나에게 내리셨다.…” 루카는 자기 복음서에서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생애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시게 해 드린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께서 당신께 메시아가 되라는 소명을 주신다(4,1). 성령께서는 아버지께서 주시는 선물이시다(11,13). 그리고 성령께서는 마지막 시대를 특징지으신다(루카 24,49; 사도 1,4-8; 2,16-21; 11,16). 이제 이사 61,1-2가 왜 예수님의 사명을 묘사하는 데 특별히 적합한지를 알 수 있다. 예수께서는 당신 위에 성령께서 내려오심으로써 축성을 받으셨다. 이는 구약시대에 기름부음으로 축성된 왕이나 사제의 경우와 다르다.

성인(成人)이 된 모든 유다인은, 회당장의 허락을 받아, 성경 본문을 공적으로 낭독하고 해설까지 할 수 있었다. 예수께서 “이러한 말씀이 기록된 부분을 찾으셨다.”는 글을 읽고, 어떤 사람들은 그런 일이 우연히 일어났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많은 해설가들은 상당한 이유를 들어 예수께서 일부러 그 성경 대목을 찾아내셨다는 의견을 밝힌다. 예수께서는 히브리어로 된 성경 본문을 낭독한 다음, 사람들이 히브리어를 알아듣지 못하기 때문에, 아람어로 풀이해 주셨을 것이다. 루카는 어느 정도 자유롭게 70인 역 그리스어 번역본을 인용한다.

17ㄴ-21절: 루카는 이사야 예언자의 위로하는 활동에 집중된 찬미가인 제2이사야서 대목(61,1-11)을 인용문으로 뽑아낸다. 이 본문은 예수께서 행하신 연설 전체를 소개하지는 않지만,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21절)라는 단 한 구절로 그 연설을 요약하고 있다. 이 말씀의 내용은 이미 단순한 도덕적 교훈이나 메시아에 대한 희망을 촉구하는 내용이 아니라, 예언자들이 예고한 하느님의 계획이 ‘오늘’ 이루어졌음을 선포하는 내용이다. 이제 과거를 돌아볼 때가 아니고 무슨 굉장한 미래를 꿈꿀 때가 아니다. 현재의 순간을 주께서 오고 계시는 특권적인 기회로 알고 살아가야 할 때이다.

루카는 이사 61의 예언이 주께서 은총을 베푸시는 해를 예고한 순간(19절)에 의도적으로 성경 낭독을 멈추게 한다. 그리고 뭇 나라와 뭇 민족에 대한 심판을 예고한 다음 구절을 그냥 지나친다. “우리 하느님의 응보하는 날을 선포하게 하셨다.”(이사 61,2) 이 구절을 뺀 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하느님의 은총만을 강조하려는 의도에서 나왔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은총의 해’는 빼어난 희년(참조. 레위 24,10-13)이요, 구원이 내리는 메시아 시대다.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한다.”는 구절은 이사 58,6에서 취한 것으로서 이사 61,1-2에 표현된 생각을 다시 강조한다. 예수께서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선포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 해방을 선포하신다. 그분은 단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원하기 위해서 오신다.

이사 61,1-2를 인용하면서, 루카는 또 한 줄을 뺀다. “마음이 부서진 이들을 싸매어 주게 하셨다.” 그렇게 함으로써 ‘치유하다.’라는 동사를 육체적인 치유에만 적용하고 있다. 이 순간에 루카의 관심은 다른 쪽으로 향한다. 그래서 일부러 뺀 한 줄 대신에,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게 하셨다.”(이사 58,6)라는 다른 인용문을 집어넣는다.

예수께 기름을 부으시는 성령께 대한 언급은 예수께서 받으신 세례에 대한 언급으로 알아들을 수 있다(3,22; 사도 10,38).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라는 구절은 예수께서 수행하실 사명의 가장 적합한 목적 가운데 한 가지를 가리킨다. 즉 예수께서는 궁핍하고 곤경에 처한 모든 사람의 고통을 덜어주시리라는 것이다. 루카 7,22는 이 대목에 대한 뛰어난 설명이 될 수 있다. 예수께서는 메시아인 당신 사명에 대한 증명으로서 사람들이 당하는 고통을 덜어주는 행위를 보여주신다는 것이다(참조. 사도 10,34-43). 그렇게 하여, 하느님의 교육학이 드러난다. 즉 하느님께서 당신을 아버지로서 나타내고자 할 때, 이스라엘을 노예살이에서 벗어나게 하여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이르기까지 광야를 통과하여 놀라운 모양으로 인도하셨다는 것이다.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이는 이스라엘의 유명한 제도, 즉 희년에 기초한 은유적인 표현이다. 희년에는 노예들이 자유를 되찾고 땅도 원래 주인에게 돌아갔다(레위 25,8-55).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이는 하느님의 말씀이 지닌 위력을 암시하는 것 같다(이사 55,10 이하). 그리스어에서, ‘이루어졌다.’라는 표현은 완전동사(‘페플레로타이’)로 나와 있다. 다시 말해서, 채워지고 완성되었다는 것이다. 예수라는 인물 안에 구원이 이미 들어 있다는 것이다. 성령과 예언자들과 사도들의 설교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구원의 효과(에페 2,20)는 하느님께서 하시는 말씀의 위력을 끊임없이 체험하게 해 준다.

22ㄱ절: 이 구절은 루카 4,15.17과 똑같은 울림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더 적극적인 4,14-44 대목과도 똑같은 울림을 가지고 있다. 복음서 저자는 예수님의 현존과 말씀으로 빚어진 분위기를 암시한다. 예수님의 메시지는 놀라움과 복잡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면서도, 또한 의심을 불러일으킨다. 고향 사람들은 하잘것없는 요셉의 아들이 정말 이사야의 말씀을 자기 자신에게 적용해도 되는지 그리고 자기 자신을 굉장한 인물로 제시해도 되는지 의아해 한다.

루카는 예수님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이 놀라는 모습을 불완전하게 표현한다(‘놀라워하였다.’). 그 놀람에 대한 언급은 예수께서 하신 말씀에 그들이 큰 관심을 보였음을 암시한다. 예수님의 설교는 ‘은혜로운 말씀’으로서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 표현은 이사야서를 인용한 표현으로서 ‘마음에 드는 말씀’ 또는 ‘좋은 말씀’ 이상을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영적인 의미 이상을 지닌 것으로 보인다. 즉 예수님 안에서 나타난 하느님의 호의, 은혜, 사랑을 선포하는 말씀으로 보인다. 이상한 것은 이어지는 구절들의 부정적인 내용이다(22ㄴ-9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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