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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전례] 전례주년1-5: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 거행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09-07-15 조회수2,143 추천수0

[전례] 전례주년 1-5 :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 거행

 

 

이번 호부터는 ‘전례주년’에 관한 글을 싣습니다. 그러나 이 글은 연구 결과를 발표하는 것이 아니라 A. Adam. Das Kirchenjahr mitfeiern, Herder, Freiburg im B. 1979의 이탈리아 번역판 L’Anno Liturgico Celebrazione del Mistero di Cristo, elle di ci(Torino) 1984를 번역한 것입니다. 그리고 본래의 저서를 충실히 번역하되 우리 실정에 맞지 않는 부분은 역자의 판단에 따라 적절히 가감할 것입니다.

 

 

머리말

 

전례주년은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룩하신 구원의 업적을 일년의 주기 안에서 기념하여 거행하는 것이다. 교회 문헌은 전례주년에 대하여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교회는 일년의 주기 안에서 탄생에서부터 성령강림, 그리고 주님의 재림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의 모든 신비를 거행한다”(전례주년과 전례력 총지침, 17항, 참조, 전례헌장, 102항).

 

전례주년은 일반 달력을 교회가 사용하려고 적당히 변형시킨 것이 아니다. 일년이라는 ‘세속’의 시간도 그리스도인에게 내리시는 창조주의 은총이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구원하시려고 여러 차례 이 역사적인 시간 안에 들어오셨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러한 구원의 뜻을 분명히 보여주심으로써 모든 시간은 구원의 시간이요 하느님의 시간이 되게 하셨다. 이렇게 하여 하느님의 구원 계획이 모든 시대의 모든 사람들에게 미치게 되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구원 계획은 보편적이라고 말한다.

 

이제, 교회가 해야 할 일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구원의 업적을 모든 시대의 사람들에게 선포하고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다. 교회는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성사를 거행하며, 신자들을 믿음과 희망과 사랑으로 이끌고 은총 안에 성장하게 하는 길을 준비하는 여러 가지 사목활동을 통하여 그 과업을 수행한다.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의 구원업적을 감사하며 기념하는 축제를 거행하는 것은 끊임없이 선포의 사명을 수행하고 구원을 다시 이루는 것이다. 여기에 일년이라는 주기적인 시간을 이용한다. 이 일년이라는 시간 안에서 그리스도의 구원사건을 주기적으로 반복할 수 있도록 일정한 날에 각각의 기념일이 정해진다. 그런데 어떤 기념일은 성서에 따라, 역사적 상황에 따라 정해지기도 한다. 그러므로 그 기념일의 날짜는 필요에 따라 변경될 수 있다.

 

그러므로 이제 전례주년의 거행은 과거에 일어나 구원사건을 돌이켜 회상하는 정도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세례를 받아 구원된 그리스도인은 끊임없이 위기에 놓이는 자기 자신의 구원을 확고히 하기 위해 민첩해야 한다. 더 나아가 전례 거행 안에서 또 그것을 통하여 그리스도인은 다른 사람들의 구원에 대한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 왜냐하면 그는 모든 이에게 주어지는 구원의 길을 증언하고 준비하기 때문이다.

 

전례주년은 일년이라는 주기 안에 하나의 고정된 자리를 찾은 모든 전례 거행의 총체로 이해된다. 이러한 전례가 거행될 때 새로운 계약의 대사제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신자들을 구원하시고 하늘에 계신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고자 공동체 안에서 전례를 거행하는 회중과 하나가 되신다(전례헌장, 7항 참조).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전례 거행을 통하여 실현되고 구체화된다. 그렇게 해서 전례주년은 교회 자신의 표현이 되고 그리스도인 삶의 기초가 된다. 그리스도인은 그 기초 위에서 삶을 구체적으로 이끌어가게 된다. 전례주년에 대한 깨달음은 매우 긴급한 일로 보인다. 그것은 바른 이해와 실천을 통하여 이룩해야 할 일이다. 전례주년을 올바로 이해해야 한다는 주장은 세속화되고 신앙의 내용과 그리스도인 삶의 가치를 무시하는 현대인들에게는 별로 중요하게 생각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전례주년에 대한 이 글은 역사의 발전 과정에서 전례주년이 어떤 양식으로 거행되었고 또 그 신학적 영성적 내용은 무엇인지를 소개하고, 신자들이 전례주년의 거행을 통해서 풍요로운 열매를 맺게 하려는 것이다. 사실 올바로 이해하고 또 믿음을 가지고 전례주년을 거행하는 이는 해를 거듭할수록 구원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총체적 메시지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고, 우리를 구원하고자 하시고 또 실제로 구원하시는 주님과 나날이 새로워지는 만남을 체험하게 된다.

 

이 글에서는 방대한 분야를 다 다루지는 못할 것이기 때문에 한계를 분명하게 할 필요가 있다. 특별히 역사적인 부분과 기념 미사의 양식들을 기술하고 설명하는 데에 머무를 것이다. 전체적으로 볼 때 전례의 중요한 한부분인 시간전례에 대해서도 그 역사와 의미 그리고 양식에 관해 따로 한 장으로 기술할 것이다.

 

 

제1장 시간과 인간의 삶

 

인간의 삶은 우주의 질서에 따라 이루어진 조건을 따르게 되어 있다. 인간이 살 수 있는 공간으로 지정된 지구는 우주라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거대한 규모에 비하면 큰 바위산의 먼지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태양을 따라 도는 지구의 움직임은 일년이라는 시간의 주기를 갖게 한다. 지구를 따라 도는 달(luna)은 약 29일 반이라는 시간의 단위를 이루고 있는 달(mese)을 갖게 한다. 여기에서 모든 달은 29일 또는 30일의 길이를 갖게 되었다. 또 자기 축을 따라 도는(자전하는) 지구는 24시간으로 나누어진 하루를 낳았다. 더 나아가 각기 자기 규칙을 가지고 있는 항성의 조화는 빛과 어둠, 더위와 추위가 교차되는 시간의 구분을 낳아 유기적인 삶을 살게 한다.

 

사람은 빛과 어둠의 시간으로 되어있는 하루라는 시간 안에서 살아간다. 그 사람은 또 하지와 동지, 춘분과 추분으로 구분되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이라는 네 계절에 따라 기후가 변하는 일년의 주기를 체험한다. 지구를 따라 도는 달은 초생달, 상현달, 보름달과 하현달의 변화를 보여 또 다른 시간의 구분을 사람에게 체험하게 한다. 어부, 농부, 목자, 사냥꾼과 천문학자를 제의하고는 오늘과 같은 산업화 시대 안에 살아가는 사람들은 별로 느끼지 못할지라도 이러한 현상들은 우리 나라 사람들뿐만 아니라 중동 지방과 지중해 지역의 사람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다음에 우리가 살펴보겠지만 달의 네 가지 변화는 7일로 이루어진 주간의 가장 중요한 기초가 된다.

 

같은 시간에 각 민족에게 지정된 지구 공간에 적응해 살아야 하는 인류는 하루, 주간, 달과 일년이라고 하는 시간의 단위를 따라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고 있다. 그 시간들의 규칙적인 순환은 사람에게 각자의 삶과 그 지속되는 시간을 재게 하고, 그에 따라 처신과 활동을 결정하게 한다. 옛 사람들 가운데 아주 종교적이었던 사람은 시간의 이러한 흐름을 초자연적인 우주의 선물 또는 그 힘의 현시로 보았다. 그 사람은 어떤 시간을 구원의 시간으로, 또 다른 시간을 위협과 불행을 가져오는 시간으로 보았다. 그래서 창조의 실체는 시간의 변화에 따라 종교적 태도를 갖게 하고, 기도와 단식, 행렬, 또는 파공으로 이루어지는 감사와 보속의 희생 제사를 바치는, 일년을 주기로 하는 종교력(ca1endario re1igioso annuale)을 갖게 했다.

 

옛 사람들이 사용했던 이러한 종교력에 대해 기술하자면 엄청난 양이 될 것이다. 유목 민족과 농경민, 사냥을 하거나 물고기를 잡아 살아가던 민족들의 축제와 예식에 관해서 보더라도 서로 다른 많은 예식들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지리적인 차이나 역사의 변천에 따라서도 각기 다른 특징을 보인다. 그러나 이 백성들은 다음과 같은 공통성을 가지고 있다. 땅의 경작과 초원을 양떼가 따라 이동하는 것과 관련된 봄 축제, 그리고 여러 가지 추수와 사는 지역으로 양떼가 귀환하는 시기로 특징지어지는 가을 축제가 있었다는 것이다.

 

또 모든 백성들에게는 이른바 ‘통과 의례’라는 특별한 의식이 있었다. 이 축제들은 살아가면서 일정한 순간들에 거행되는 것이다. 출생과 이유기, 사춘기, 혼인과 죽음과 관련된 종교 예식들이 있다. 이러한 생애의 사건들은 개인적인 문제이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한 민족, 한 공동체의 삶에 속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생애의 사건들은 여러 시기에 걸쳐 공개적으로 거행되었다. 이러한 예식말고도 자연적인 재앙이나 전쟁의 승리와 패배, 땅의 정복, 유명한 통치자들의 탄생과 대관 그리고 ‘공현(epifanie, 장엄한 의식으로 이루어지는 공식적인 방문)’과 같은 역사적인 사건들도 한 민족을 특징지어 주고 그것은 제도화되어 기념적인 축제나 기념일의 기원이 된다.

 

옛 사람들은 공적 또는 사적으로 이루어지는 그러한 사건들 안에서 초자연적인 힘의 개입과 현시를 보았다. 그래서 옛 시대의 축제들은 모두 종교적인 특성을 지니게 된 것이다. 옛 사람들, 특히 지중해 연안의 민족들에게서 볼 수 있는 이른바 ‘신비 축제들’은 자연적인 사건에 어떤 신적인 힘을 연결시켜, 그것을 예식으로 거행함으로써 신적인 생명을 받고자 하는 바람을 표현했다.

 

이스라엘의 선조들도 그들이 본래 살았던 땅의 관습과 종교적, 문화적 이해에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한 분이신 하느님께 대한 믿음으로 그것들을 수정하거나 배척하였다.

 

 

제2장 히브리 축제력

 

그리스도교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과 맺은 계약은 그 뿌리를 구약에 가지고 있지만 구약을 완성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 전례력을 올바로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은 한 해의 히브리 축제들이 어떻게 갈마드는지, 그 주기를 잘 알아야 한다. 이 축제들이 역사적인 발전 과정에서 수적으로 늘어나고, 그 뜻의 강조점도 달라졌더라도 우리는 예수님 시대의 축제들에 대해서만 살펴보게 될 것이다. 복음서와 사도행전의 증언에 따르면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 그리고 성령의 파견은 히브리 축제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그 축제들은 히브리 축제들을 바탕으로 새롭게 해석하고 충만한 의미를 지니게 된 것이다.

 

히브리 축제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음의 세 가지 전제가 필요하다.

 

여기에서 우리는 태음 태양력을 기준으로 할 것이다. 이 태음 태양력에서는 달의 운행에 기준을 두면서 태양의 변화에 따라 계절을 구분한다. 그러므로 초생달과 보름달의 변화는 중요하다. 이 달력에서는 한 달이 29.5일이므로 일년 열두 달을 날짜로 계산하면 354일이었다. 히브리 달력의 한 달은 한 달 건너 29일과 30일의 주기로 계산하였다.

 

시간의 구분은 분명히 바빌론의 영향을 받았다. 이 점에서는 그리스인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러한 일년의 구분이 365일 5시간 49분으로 이루어지는 태양년과 맞지 않음을 곧 알게 되어 윤달을 두어 그 차이를 메웠다. 이스라엘에서는 2년 또는 3년마다 춘분 바로 전달인 아다르(Adar) 달 다음에 베아다르(Veadar)라고 하는 두 번째 아다르 달을 끼워넣었다. 이스라엘에서는 본래 추분이 지난 다음 새로운 달(luna nuova)이 가까워지는 가을에 새해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바빌론의 영향을 받아 새해의 시작을 춘분이 지난 다음에 오는 보름으로 옮겼다. 그리고 니산(Nisan)이라고 하는 이 달을 첫 달로 삼았다. 그러나 히브리인들은 오늘날까지 종교적으로는 옛 관습대로 일곱 번째 달(Tishri달)의 첫날에 새해를 시작하였다.

 

모든 축일은 그 전날 저녁에 시작하고 다음날 저녁에 마친다.

 

 

1. 안식일

 

일년 중 안식일은 가장 중요한 날이다. 이날은 7일로 된 한 주간의 끝날이고 완성이다. 이 안식일은 히브리 백성의 근원적 축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날은 휴식의 날이지만 하느님과 그분의 말씀을 위해 자신을 내어놓는 날이기도 하다.

 

안식일을 의무일로 제정한 것은 유배시대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그보다 더 이전에 안식일이 제정되었다고 보지는 않더라도 오늘날에도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고대 근동의 종교들에서 “나쁜 날들”로 간주된 날들 안에 오늘날의 주간과 안식일의 전례(前例)를 보게 하는 기록들이 있다. “일곱으로 나눌 수 있는 날들, 곧 7일, 14일, 21일, 28일 그리고 19일이 있다. 거의 모든 이들에게 이날들에 어떤 일도 하지 않는 것이 의무로 되어있었다. … 처음에는 나쁜 날들의 일곱이라는 수는 아직 시간을 재는 단위로 쓰이지 않았다. 시간의 리듬을 말하는 데에 달 외에 ‘주간’이라는 말은 쓰이지 않았다. 다음에 더 정확하게 지적할 일련의 발전 과정을 통하여 히브리인들의 안식일에 이르렀다는 사실은 논의의 여지가 없다. 이러한 변화는 이방인 세계에서 시작되었다. 라가쉬(Lagash)에서 발견된 기원전 2500년경의 비문에 따르면 제사를 바쳐 이날들을 이미 거룩하게 하였다”(Th. Maertens, Heidnisch-judische Wurzeln der christlichen Feste, Mainz 1965. 19).

 

이러한 일련의 날들은 각각 초생달, 상현달, 보름달, 하현달 등의 달의 변화와 관련이 있다. 19라는 수는 7 곱하기 7에서 한 달의 30일을 뺀 것으로 해석한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들이 본래 살던 땅에서 사용하던 이러한 관습을 알고 있었고, 그것을 한 분이신 하느님을 믿는 그들의 종교관에 적절히 변용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십계명의 하나는 특별히 일을 하지 말고 쉴 것을 강조한다. ‘안식일(sabato)’이라고 하는 말은 히브리말의 shabbat(=그치다, 쉬다)에서 나온 것이다. “안식일을 거룩히 지내라.”는 계명은 안식일을 하느님께서 6일 동안 창조하시고 다음날 쉬셨다는 사실과 밀접히 연결시키고 있다(출애 20,8-11).

 

구약성서는 또 다른 관점에서 안식일의 사회적이고 경제적인 기능을 특별히 강조한다. “너희는 엿새 동안 일을 하고, 이레째 되는 날에는 쉬어라. 그래야 너희 소와 나귀도 쉴 수가 있고, 계집종의 자식과 몸붙여 사는 사람도 숨을 돌릴 것이 아니냐?”(출애 23,12) 또 안식일은 에집트의 종살이에서 해방된 것을 기념하는 날이고 계약 이행의 표징이다(신명 5,15 참조).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과 맺은 계약을 기억하여 축제를 지내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은 안식일을 대대로 지킬 영원한 계약으로 삼아야 한다. 야훼가 엿새 동안에 하늘과 땅을 만들고 이렛날은 쉬며 숨을 돌렸으니, 안식일은 나와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세워진 영원한 표가 된다”(출애 31,16-17).

 

안식일이 지닌 이러한 깊은 의미와 안식일을 지키라는 강력한 권고는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이에게 커다란 벌을 내리게 한다. “너희는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 이날을 범하는 자는 반드시 사형에 처하여야 한다. 엿새 동안 일하고, 이렛날은 야훼를 섬기는 거룩한 날이니 철저하게 쉬어야 한다”(출애 31,14-15).

 

신약성서도 그 시대 유다교가 얼마나 엄격하게 안식일을 지키도록 강요했는지에 관한 이야기를 우리에게 전해준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은 아니다”(마르 2,27).

 

히브리인들의 안식일은 하느님께서 엿새 동안 일하시고 쉬셨다는 ‘하느님의 휴식’을 본뜬, 일하지 않고 쉬는 휴식의 날일 뿐만 아니라 주님을 예배하기 위해 쉬는 ‘거룩한 집회의 날’(레위 23,3)이다. 예루살렘 성전에서는 안식일의 특별한 제사가 봉헌되었다(민수 28,9-10 참조). 성전을 갖지 못했던 유배 시절과 그보다 뒷 시대의 예루살렘 밖의 히브리 공동체들은 성서 봉독과 기도로 이루어지는 전례를 거행하기 위해 모였다.

 

히브리인들은 각 가정에서도 안식일을 거행하였다. 그들은 회당 전례에 참여할 뿐만 아니라 풍부한 가정 전례도 거행하였다. 이 가정 전례는 깊은 신앙과 참된 신심의 표현이지만 또한 그것들을 더 풍요롭게 하는 것이다. “항구히 반복되는 안식일에서 안식일로 이어지는 리듬 없이는 히브리 백성은 시간과 계속해서 그들을 찾아오고 또 그들을 거슬러 일어나는 모든 어려움을 이겨낼 수 없을 것이다”(R.R. Geis. Vom unbekannten Judentum, Freiburg, 1977, 62).

 

 

2. 큰 순례축일들

 

예수님 시대의 히브리 축일에는 ‘순례축일’이라는 축일들이 있었는데, 이때에는 열두 살이 넘은 모든 히브라인은 해마다 그러한 축일 가운데 적어도 한 번은 예루살렘 성전으로 순례를 가야 했다. 이 축일들은 본래 목축이나 농사, 봄과 추수와 관련된 축제였으나, 후대에 히브리 구원사의 특정한 사건들의 기억과 연결되어 신학적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파스카 축일(Pesak)과 누룩없는 빵의 축일(Mazzot)

 

본래 서로 다른 기원을 가진 두 축제가 후대에 가서 모두 봄의 첫 만월에 있다는 이유에서 쉽게 하나의 축제가 되었다. ‘파스카 축제’는 봄에 어린 숫양을 제물로 바치고, 악령의 기운을 몰아내고자 천막 기둥에 그양의 피를 뿌리고, 불에 구운 고기를 먹는 유목민의 축제였다.

 

누룩없는 빵의 축제는 농부들이 보리의 첫 수확을 하느님께 바치고, 새 수확에서 ‘새 누룩’을 얻을 때까지 7일 동안 누룩 안 넣은 빵을 먹던 관습에 기초를 두고 있다. 이스라엘이 에집트에서 탈출하는 이야기에서는 두 개의 축제가 한 번에 거행되고, 종살이에서 해방되었음을 확인하는 표지가 되었다(출애 12,1-28 참조). 이처럼 두 개의 축제가 에집트 탈출 사건과 연결되면서 해마다 거행해야 하는 단 하나의 기념축제가 되었다(출애 13,8-10 참조).

 

바빌론 유배 다음에는 이 파스카 만찬이 뚜렷하게 의식의 형태를 띠게 되었다. 이 만찬은 네 차례의 잔을 올리는 예식으로 틀을 갖추었다. 2세기에 고정된 구전 전승에 따르면 파스카 만찬은 다음과 같은 예식으로 행해졌다. 예수님께서도 마지막 만찬을 나누실 때 이렇게 하셨다. “포도주와 물을 첫 잔에 채우는 것으로 시작했다. 식사를 하는 사람들 가운데 가장 어른이 그 잔에 두 가지 양식의 축복을 한다. … 그런 다음 첫 잔을 마신다. 이어서 누룩 안 든 빵과 쓴 풀이 식탁에 차려진다. 가장이 손을 씻고 감사의 기도를 바친 다음 그것들을 맛보고 나서 참석자들에게 돌린다. 그때 불에 구운 어린 양을 식탁으로 가져온다. 포도주로 두 번째 잔을 채우고 이 식사의 뜻과 예식의 상징성을 에집트 탈출과 연결시켜 설명하고 나면 할렐의 첫 부분(시편 112와 113의 전반부)을 노래한다. 다시 한번 손을 씻고 찬미기도를 바치고 나서 쓴 풀과 카로세트(karoseth = 여러 가지 과일을 섞어놓은 것)에 적신 누룩 안 든 빵과 함께 파스카 양을 먹는다. … 그러고 나면 ‘축복의 잔’(1고린 10,16)이라고 하는 세 번째 잔이 이어진다. 이 잔을 축복의 잔이라고 한 것은 이때 이 식사에 대한 감사가 따랐기 때문이었다. 그 다음 네 번째 잔을 들고 할렐의 두 번째 부분(시편 113 후반부-117)을 노래하였다.” 여기에서 메시아를 통한 이스라엘의 재건을 바라는 그들의 마음을 표현하였다.

 

히브리 사람들은 특히 바빌론 유배 뒤에 이루어진 개혁 시기 뒤에 이 파스카 축제를 지내면서 매우 오랫동안 계속된 구원의 사건들을 역사적으로 기억할 뿐만 아니라 그들이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구원하시는 행위의 직접적인 대상이라고 생각했다. 이로써 그들은 에집트를 탈출하던 때의 그들의 조상들이 행했던 종교의식을 의무로 받아들였다. 이것은 오늘날 그들이 행하는 파스카 축제의 의식 안에 분명히 드러난다. 이 예식에서 이렇게 말한다. “모든 시대에 누구나 자기 자신을 에집트에서 직접 탈출해 나온 사람으로 여겨야 한다. … 거룩하신 분, 찬미받으소서. 거룩하신 분께서는 우리의 조상들만을 해방시키신 것이 아니라 그들과 함께 우리 자신도 해방시키셨습니다”(The Haggadah of Passover, New York 1955, 31).

 

 

주간축제(Shavuot, Pentecoste)

 

누룩 없는 빵의 축제 뒤에 이어지는 7주간은 ‘(칠) 주간축제’를 거행하는데, 이는 밀을 수확하고 감사하는 축제이다. 이 축제는 누룩 없는 빵의 축제일(보리 수확 시작)로부터 50일째 되는 날(고대의 시간 계산 방법에 따르면 첫날과 마지막날은 언제나 하루로 계산했다.)이어서 뒤에는 이 축제를 오순절(Pentecoste)이라고 했다(토비 2,1 참조). 추수를 하느라고 많은 노동을 한 뒤에 감사의 뜻으로 지내는 이 주간축제는 기쁨의 축제였고, 성전에서 여러 가지 제사를 바친 날이었다(레위 23,15-21). 세월이 흐르면서 이 축제는 시나이 계약과 그 결과로 주어진 십계명을 받은 사건을 기억하는 날이 된다. 그렇게 해서 오순절은 이스라엘의 구세사를 기념하는 축제가 된다.

 

 

초막절(Sukkot)과 율법을 통한 기쁨의 축제(Simkat Torah)

 

순례축일의 세 번째도 그 기원을 보면 농사와 관련된 축제이다. 곧 포도 수확축제로서 초막절이라고 하는 축제이다. 이 축제는 일곱째 달(Tishiri)의 만월에 시작해 이레 동안 계속된다(레위 23,33-36 참조). 이 축제는 수확에 감사하며 지낸 기쁨의 축제이다(신명 16,13-15 참조).

 

이 축제를 지내는 한 주간 동안 이스라엘 사람들은 초막에서 살아야 한다. 제관기 전승은 이러한 관습의 이유를 설명하려고 이 농사축제도 이스라엘의 구세사와 연결시키고자 했다(레위 23,42-43 참조).

 

한편 세월이 흐르면서 생긴 또 다른 관습에 따르면, 왼손엔 체드로 과일을 들고 오른손엔 여러 가지 나뭇가지로 이루어진 이른바 ‘축제 나뭇단’을 들고 흔들면서 즐거워했다. 이러한 관습은 그리스도교 시대 초기에 분명하게 확인된다. 그러나 레위기 23장 40절과 마카베오 후서 10장 6절과 7절은 이러한 관습이 이미 그리스도교 이전에 도입되었음을 추측하게 한다.

 

축제 기간 동안의 기쁨은 7-8세기에 여덟 번째 날까지 이어지게 된다. 이 여덟 번째 날을 이른바 ‘마감축제(festa di conclusione)’ 또는 ‘율법을 통한 기쁨의 축제(Simkat Torah)’라고 했다. 이 축제는 율법서 봉독의 연중 주기를 마감하고, 창세기 첫 절부터 다시 시작한다. 율법서의 마지막 절을 봉독하는 이를 “율법의 신랑”이라 하고, 그를 임금처럼 축하해 주었다.

 

 

3. 새해맞이(ROSH HA-SHANAH)

 

이스라엘의 초기 달력에 따르면 이스라엘 백성은 티쉬리(Tishiri) 달의 첫날, 곧 가을을 맞는 첫달(primo mese)의 새 달(luna nuova)의 날을 새해 첫날로 지냈다. 우리는 이와 관련된 묘사를 후대에 재편집된 부분인 레위기 23장 23절부터 25절과 민수기 29장 1절부터 6절에서 찾아볼 수 있다.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일러라. ‘칠월 초하룻날 너희는 쉬어야 한다. 나팔을 불어 거룩한 모임을 알려야 한다. 너희는 모든 생업에서 손을 떼고 주님께 제물을 살라 바쳐야 한다’”(레위 23,23-25).

 

위에 들은 민수기는 이 축제에 관하여 훨씬 더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위의 두 성서 구절은 이 축제의 이름을 전해주지 않는다. 이 이름은 더 후대에 쓰여진 구약성서 작품들에서도 나타나지 않는다. 그래서 이 축제의 기원에 관한 문제는 학자들에게 많은 의문을 갖게 하여 많은 가설을 내놓게 하였다. 현대의 한 히브리 사람은 이 축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 나팔 소리가 울리는 날, 금속 나팔이 아니라 쇼파르(shofar), 오늘날에도 회당 전례에서 듣는 숫양의 뿔로 된 나팔이다. 이 뿔나팔을 부는 것은 (하느님께서) 못하게 하신 이사악의 희생과 연결된다. 아들 대신에 숫양을 희생제물로 바쳤다. 숫양의 뿔은 이제 이사악의 대속물이신 하느님을 생각해야 한다. 바빌론 유배생활을 할 때에 이스라엘 백성은 마르둑(Marduk)의 대관(intronizzazione) 축제를 알았다. 이 축제는 바로 새해맞이 축제였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 축제를 야훼 하느님께 예배를 드리는 축제로 바꾸었다. (그렇게 해서) 뿔나팔을 부는 날이 새해를 맞는 첫날 축일이 되었다. 이날 전례에서는 심판주이신 하느님의 대관을 기억한다”(Schlom Ben-Chorin, Die Feste des judischen Jahres, in ThPQ 125 (1977) 160s).

 

 

4. 속죄의 날(JOM KIPPUR)

 

속죄의 날은 티쉬리 달 10일, 곧 가을의 첫달(prima 1una)이 뜨는 날에 지냈다. 이날이 그리스도교 이전 유다교의 새로운 축제일의 하나이지만 이날은 세월이 지나면서 더 풍요로운 뜻을 지니게 된다. 이날은 완전히 일에서 손을 떼고 쉬는 날이고 참회의 재를 지키는 날이며 전례 집회의 날이다.

 

레위기 16장은 이날의 예식을 특별히 묘사하고 있다. 이날에, 오직 이날만 대사제는 성전 휘장 안쪽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었다. 대사제는 자기 집안과 자기 자신의 죄를 벗기기 위하여 어린 황소를 제물로 바쳤다. 그리고 그 피를 계약의 궤 덮개 위에 뿌렸다. 그 다음에 지성소에서 향을 피우는 제사를 드렸다. 이어서 숫염소 두 마리 가운데 한 마리를 “백성을 위한 속죄 제물”로 바치고 피를 성전 휘장의 안팎에 뿌렸다. 끝으로 어린 황소와 숫염소의 피로 “지성소와 만남의 장막과 제단의 정화 예식”(레위 16,20)을 했다. ‘아자젤(Azazel, 악마 또는 마귀)을 위한 숫염소’(뒤에는 ‘속죄 숫염소’라고도 했다)라고 하는 나머지 한 마리의 숫염소에게 대사제가 두 손을 얹어 상징적으로 백성의 죄를 씌우고 한 사람을 시켜 광야로 내보냈다. “그 염소는 그들의 죄를 모두 지고 황무지로 나간다”(레위 16,22).

 

‘속죄의 날’은 그리스도 강생 70년에 성전 파괴로 희생제사가 중단된 뒤에도 히브리 축제력에서 중요한 날이었다. 티쉬리 달의 첫날과 10일 사이의 날들은 참회의 날이었다. 속죄의 날 당일은 기도하고 성서를 봉독하며 엄격하게 단식을 지켰다. 그리고 백성은 죄를 거듭거듭 고백하였다.

 

 

성전봉헌 축제(Kanukkah)

 

마카베오 1서를 보면 유다와 그의 형제들이 적에게 승리를 거둔 다음에 파괴되고 더럽혀진 성전을 정화하고 다시 봉헌하려고 온 군대와 함께 예루살렘으로 행군한다. 그들은 더럽혀진 번제제단 대신에 새 제단을 세운다. “그들은 성소와 성전의 내부를 수리하고 성전 뜰을 정화했다. 새로 거룩한 기물을 만들고 등경과 분향제단과 상을 성소 안에 들여다 놓았다. 그리고 나서 제단에서 향을 피우고 등경의 등에 불을 붙였다. 등불이 성소 안을 환하게 비추었다. 또 상에 빵을 얹어놓고 휘장을 쳤다. 이렇게 해서 그들은 성소 꾸미는 일을 모두 끝마쳤다”(1마카 4,48-51).

 

그 다음, 기원전 164년 기슬레우(Kisleu 열한번째 달) 달 25일에, 성전이 더럽혀진 지 꼭 3년이 되었을 때에 다시 세운 성전을 새로 봉헌하고 새 번제제단에서 첫 제사를 바쳤다. “제단봉헌 축제는 팔일 동안 계속되었는데, 그들은 기쁜 마음으로 번제물을 바치고 구원의 제물과 감사의 제물을 드렸다”(1마카 4,56). “유다와 그의 형제들과 이스라엘의 온 회중은 매년 기슬레우 달 25일부터 팔일 동안 기쁜 마음으로 제단봉헌 축일을 지키기로 정하였다”(1마카 4,59).

 

그때부터 히브리인들은 이 축일을 크게 기뻐하며 지냈다. 이 성전 봉헌 축제는 장식된 막대와 잎이 무성한 나뭇가지들을 들고 찬미와 감사의 찬가를 부르고, 모든 집에 불을 밝히는 예식으로 거행되었다. 축제가 계속되는 한 주간 동안 날마다 새 빛을 하나씩 더 밝혔다. 이를 위해 카누카 촛대(candeliere di Kanukkah)’라고도 하는 팔지(八枝) 촛대를 사용했다. 마카베오 1서 4장 50절이 이 빛의 예식의 기원을 말해주는 것이지만, 또한 히브리 전승은 이 예식을 유다 마카베오에 의해서 끝난 성전 정화 때에 일어났던 기적과 연결시킨다. 이방인들 손에 더럽혀진 예루살렘 성전에서 대사제의 인장이 찍힌 기름병을 찾았다. 7지 촛대, 메노라(Menorah)를 위하여 마련한 기름은 하루치였는데, 기적이 일어나 새 기름을 채울 때까지 8일 동안 계속 뒀다는 것이다.

 

 

‘부림(Purim)’ 축제

 

이 축제는 페르시아에 흩어져 사는 히브리인들이 은혜를 입은 특별한 구원에서 시작되었다. 이에 대하여 에스텔서는 풍부한 정보를 제공한다. 이 축제의 이름은 히브리인들의 원수인 하만이 주사위(= 운명, 부림)를 던져 히브리 백성을 학살할 날짜를 정했다는 데서 나왔다. 페르시아 왕의 궁정에서 영향력 있는 히브리인이었던 모르드개는 그때 페르시아 왕국에 사는 모든 히브리인들에게 앞으로 아달(Adar, 일년의 마지막 달) 달 l4일과 15일을 축제일로 지내도록 명하였다. 13일은 단식일이었다. 에스텔서는 이 축제를 아주 성대한 기쁨으로 지내도록 했다(9,19 참조). 이 축제는 점차로 사육제(謝肉祭)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이틀 동안의 축제 전례에서 에스텔서가 읽혀진다. 읽는 동안 거기에 참석한 사람들이 하만과 그의 일당들을 향하여 독설을 퍼붓느라고 읽는 것이 잠시 중단된다…. 이 성서봉독말고 선물을 나누고 희사를 하면서(9,19 참조) 이 축제는 완전히 세속의 축제가 되어갔다. 즐거운 잔치도 벌였다. 랍비들도 “하만에게 저주 있어라!”와 “모르드개는 찬미를 받을지어다!”를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취하곤 했다. 더 세월이 흐르면서 가면을 쓰는 관습이 들어와 결국 부림절은 히브리인들의 사육제가 되었다.

 

 

국가적 슬픔의 날(TESHA-BEAB)

 

아브(Ab, 우리 달력으로는 7월에서 8월) 달 9일은 히브리인들이 국가적으로 당한 네 번의 재앙을 기억하며 슬퍼하는 날이다. 네 번의 재앙은 다음과 같다.

 

1) 기원전 586년의 첫 성전 파괴

2) 70년의 두 번째 성전 파괴

3) 135년의 로마에 대한 히브리인들의 봉기 진압

4) 1492년의 스페인에서 히브리인들의 추방

 

이날들은 비운의 역사 속에 살아온 히브리 백성이 최근에 겪은 모든 다른 재앙들도 기억한다. 이날은 엄격히 단식을 지킨다. 그리고 회당에서 예레미야의 애가를 읽으며 전례적으로 이 슬픔을 표현한다.

 

 

이스라엘의 독립 기념일

 

가장 최근에 생겨난 히브리인들의 축제인 이날은 임시 국가평의회에서 이스라엘이라는 국가의 설립을 장엄하게 선포한 것(1948년 5월 14일)을 기념한다. 이날은 특별한 회당 전례를 거행하는 이스라엘의 국가 축제일이다.

 

* 김종수 요한 - 주교회의 사무총장 · 신부.

 

[경향잡지, 1997년 5-9월호, 김종수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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