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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미사] 성찬례 안에서 평화의 인사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04-10-29 조회수3,797 추천수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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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찬례 안에서 평화의 인사

 

 

1. 형식적 인사와 진실한 인사

 

오래 전 일이다. 주임 신부로 있을 때였는데 처음 보는 할머니가 주일 미사 후 층계를 힘들게 내려가시기에 손을 잡아 드리면서 다정히 인사하였다. 너무 바빠서 어디서 오셨느냐고 묻지도 못했다. 다음 주일에도 그 할머니가 나타나셨다. 나는 또 다정히 인사하며 손을 잡아드렸다. 그리고 나서 미사 후 수백 명이 몰려나오기에 성당 입구에서 그저 다정히 “할머니 안녕히 가세요.” 하고 인사만 했다.

 

얼마 후 어떤 부인이 나를 보자고 했다. 그녀는 내게 “신부님, 한 가지 부탁을 드려도 될까요?” 하는 것이다. 나는 어려운 부탁 말고 쉬운 부탁을 하라고 했다. 그러자 그녀는 뜻밖의 부탁을 했다. “저희 시어머니께서 여기 한 번 오시더니 매주일 여기로 성당을 다니시겠다는군요. 신부님이 좋으시다나 봐요. 신부님께서 서울 성당으로 다니시라고 말씀 좀 해주세요. 노인께서 매주일 여기로 오시기는 힘드시거든요.” 그녀는 난처한 얼굴로 내게 말하였다. 며느리인 그녀는 신자가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시어머니가 매주일 성당에 데려다 달라고 하면 참으로 난감한 일이었을 것이다. 

 

사정을 들어보니 딱하여 할머니께 말씀드리겠다고 약속하였다. 다음 주일 어김없이 그 할머니가 나타나셨다. 나는 그 분의 손을 꼭 잡아 드리면서 “할머니, 어디 사세요?” 하고 물었다. “서울 살아요.”, “그런데 왜 힘들게 여기까지 오세요?”, “신부님이 좋으니까. 인사도 잘하고 친절하게 해주니까.” 

 

나는 그분의 손을 잡고 참으로 힘든 말을 해야 했다. “할머니, 여기까지 오시기는 너무 힘드세요. 예수님은 서울 성당에 가셔도 만나실 수 있어요. 아마 예수님은 할머니가 서울 성당에 다니시는 것을 더 좋아하실 거예요.”

 

할머니 안색이 변하였다. 참으로 안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울에서야 신자들이 너무 많아서 본당 신부가 일일이 따뜻한 인사를 해주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한 번의 다정한 인사가 그 할머니에게 그토록 큰 감명으로 다가갔다는 것은 의미 심장하다. 만일 내가 그 할머니께 형식적인 인사만 했다면 멀리까지 찾아오시지는 않았을 것이다. 인간은 정이 그리운 존재이다. 특히 한국인에게 정이 이성보다도 앞서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된다. 인간의 정은 누구에게나 그리운 것인지도 모른다. 결혼하여 가정을 꾸리고 사는 사람들도 정이 그리워서 때로는 고독하다는 말을 하는 것을 보면 인간은 서로의 고독을 달래면서 살아야 하는지도 모른다.

 

사랑을 그리워하는 인간 세상에서 다정한 인사는 상대방에게 호감을 준다. 그래서 “인사하여 뺨맞는 일은 없다.”라는 말까지 있나 보다. 그러나 인사도 인사 나름이다. 형식적인 인사가 있는가 하면 진실한 인사도 있다.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세미나나 파티에 참석하게 되면 형식적인 인사를 많이 나누게 된다. 스치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큰 관심을 둘 수도 없고, 어쩌면 그럴 필요도 없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이러한 현상은 북적대는 관광지 음식점에서도 자주 볼 수 있다. 만리 타향에서 온 사람들이고 잠시 스치고 지나가는 사람들이기에 푸대접을 하는지도 모른다. 다시 올 가망이 없는 사람들이기에 입으로는 “어서 오세요.” 하면서도, 속으로는 ‘오거나 말거나’라고 말하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같은 동네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형식적인 인사를 할 수 없다. 그랬다가는 장사를 계속하기 힘들 것이다. 

 

이러한 인사의 특성을 살려, 교회는 영성체에 앞서서 진실한 인사를 서로 나누도록 한다.

 

 

2. 평화의 인사가 지닌 의미

 

영성체 전에 서로 평화의 인사를 나누도록 하는 이유는, 평화를 주려고 오시는 예수님을 모시려는 사람이 아직도 미워하는 마음이나 시기하는 마음으로 가득하다면 안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제단에 예물을 드리려 할 때, 서로 마음 상한 일이 있으면 먼저 화해하고 나서 예물을 바치라고 하셨다.1) 

 

예물을 바치는 사람이 화해를 우선으로 해야 한다면, 예수님을 마음에 모시려는 사람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예수님을 마음에 영접하기 위해서는 성찬례에 참석한 사람들간에 화해와 일치가 필요하다. 서로 미워하면서 영성체를 한다면 성체를 모독하는 것이다. 미사에 참석하는 사람은 모두 하느님의 자녀이기에 서로 형제며 자매다. 그러므로 서로 평화를 기원해 주고 격려하여 더욱 기쁜 마음으로 영성체할 수 있다.

 

평화 예식이 미사에 들어온 것은 2세기부터다. 155년경에 기록된 유스티노의 [호교론]에는 말씀전례를 마감하는 공동 기도를 바친 다음, 신자들은 평화와 화해의 표시로 서로 입맞춤으로 인사를 하고서 예물을 봉헌하였다. 이와 같이 대부분의 동, 서방 교회의 전례에서는 일찍부터 말씀전례 끝에 평화 예식을 거행하였고 동방에서는 이 관습을 아직까지 유지하고 있다.2) 

 

평화 예식은 ‘평화의 기도’가 있은 다음, 사제가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며 평화를 기원한다. 이에 신자들은 “또한 사제와 함께” 하며 응답한다. 그리고 나서 사제는 “평화의 인사를 나누십시오.”라고 권유한다. 평화의 인사를 나누는 요령은 지역의 관습에 따라 묵례, 합장, 입맞춤 등을 할 수 있다.3) 

 

개방된 문화가 숨쉬는 지역에서는 포옹이나 입맞춤으로 할 것이다. 그러나 보수적인 지역에서는 악수나 묵례 정도로 대신할 것이다.

 

우리 나라의 전통은 악수나 묵례를 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과연 우리가 나누는 평화의 인사가 얼마나 진지할까? 너무 형식적인 것은 아닐까? 세대간이나 빈부, 학력 차가 다양한 사람들이 적어도 성당에서만은 한 가족임을, 같은 하느님의 자녀임을 인식하고 서로에게 진심으로 평화를 기원하는 인사를 나누는 것일까? 아니면 하라니까 마지못해 하는 것일까?

 

성찬례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적어도 예수님께서 어떻게 평화의 인사를 나누셨는지 살펴야 한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무서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이렇게 인사하셨다.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무서워서 벌벌 떨고 있었다. 그들은 문을 닫아걸고 있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평화였다. 그런데 그 자리에는 사도 토마스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믿지 못하겠다고 단호하게 밝혔다. 자신의 손가락으로 예수님의 상처를 만져보고 나서 믿겠다는 것이었다. 8일 뒤에 예수님께서 다시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요한 20,26) 하고 인사하셨다. 이렇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만나실 때마다 평화를 빌어주셨을 뿐만 아니라 떠나실 때가 오자 유언처럼 마지막 분부를 하신 때도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루가 24,36) 하고 인사하셨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평화가 있기를 간절히 바라셨다. 우리는 그분의 소망대로 서로에게 평화를 빌어주면서 평화를 간직하고 살아야 할 것이다.

 

 

3. 바람직한 평화의 인사

 

“자모이신 성교회는 모든 신자들이 제반 전례 의식에 깊은 이해를 가지고 능동적으로 완전히 참여하도록 지도되기를 원한다. 이와 같은 참여는 전례 그 자체의 성질이 요구되는 바이며, 또 간택된 백성, 왕다운 사제, 거룩한 국민, 하느님의 소유가 된 백성인 그리스도 신자는 세례로 인하여 이에 대한 권리와 직무를 가지고 있다.”4)

 

공의회 문헌이 밝히는 바와 같이 사목자들은 평화의 인사가 형식적이 되지 않도록 가르치고 평신도들은 능동적으로 참여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오늘 우리의 현실은 형식적인 인사가 많다. “평화의 인사를 나누십시오.”라고 사제가 말하면 어떤 이는 고개만 끄덕이며 남의 인사를 성의 없이 받는가 하면 어떤 이는 심지어 화난 얼굴로 인상을 쓰면서 고개만 끄덕이는 경우도 있다고 들었다. 남들에게 먼저 인사하기보다는 남들이 나에게 인사해 주기를 바라면서 거만한 자세로 서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앞뒤를 둘러보면서 인사하는 적극파도 있다. 참으로 각양각색이다. 일부 본당에서는 평화의 인사 시간을 3분 정도 주면서 자신이 모르는 사람 10명에게 의무적으로 인사를 나누도록 권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아마도 대축일 같은 때에는 이런 방법을 이용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어느 집에 방문하든 그 집에 평화를 먼저 빌어주라고 하셨다.5) 주님의 이름으로 평화를 빌어주는 것은 남에게 줄 수 있는 선물 가운데 귀중한 선물이다.

 

 

4. 한국적인 평화의 인사

 

한국식 평화의 인사로는 무엇이 어울릴까?

 

내가 미국에 가서 처음 소개 받은 사람은 초등 학교 교장 수녀였다. 미국 신부가 나를 소개하자 그녀는 돌진하는 식으로 내게 달려들어 포옹하고 내 볼에 키스하였다. 그녀는 친근함의 표시로 또한 반갑다는 표시로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녀는 90kg도 넘는 큰 몸집이었다. 

 

한국인에게 포옹이나 키스는 어울리지 않는다. 만일 부부가 다정히 미사에 갔는데 평화의 인사 시간에 남편이 옆에 있는 젊은 여자와 포옹을 한다면 부인은 기절하고 말 것이다. 또한 아내가 낯모르는 남자와 키스를 했다면 남편은 기겁을 하고 부인을 데리고 나갈 것이다. 그리고 다시는 성당에 얼씬도 못하게 할 것이다.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포옹이나 키스는 평화의 인사로 적합하지 않다.

 

악수는 웬 만큼은 보편화되었지만 서로 모르는 남녀가 악수한다는 것도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사실 인간은 신체의 접촉으로 가까워진다. 부모가 어린아이에게 말로만 사랑한다고 외치기보다는 안아주고 쓰다듬어 주고, 업어주고, 뽀뽀해 주어야 정상적으로 잘 자랄 수 있다.

 

이와 같이 어른도 친구가 되려면 말로만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 서로 어깨동무도 하고, 악수도 하고, 때로는 치고받기도 해야 한다. 그러므로 평화의 인사를 할 때 입으로만이 아닌 악수를 한다는 것은 사랑의 표시로 제격이다. 그러나 이 또한 이성간에는 어색하다. 또한 처음 보는 동성끼리도 악수한다는 것이 그리 쉽지 않다. 어색한 악수는 오히려 기쁨보다는 불안을 낳을 수도 있다.

 

한국을 일컬어 동방예의지국이라 했으니 손을 합장하고 정중히 인사하며, “평화를 빕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정성스럽고 자연스러워 보일 뿐 아니라 품위 있어 보인다. 아주 가까운 사람끼리나 가족끼리는 악수라든가 가벼운 입맞춤도 괜찮을 것이다. 더 나가서 포옹도 괜찮을 것이다. 형식이야 어떻든 어떤 마음가짐으로 하느냐가 중요하다. 팔짱을 낀 채 성의 없는 몸짓을 하며 평화를 빈다고 말한다면, 그 인사를 받는 사람에게 참 평화가 전달될 수 없다.

 

영성체 전에 서로 평화의 인사를 나누며 기뻐하고, 축하해 주는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일이다. 영성체로 한 몸을 이루게 될 터인데 서로 기뻐하자는 인사를 나누면서 시큰둥한 자세로 있다면 본질을 파악하지 못한 것이다. 진실이 없는 전례의 형식은 자칫 신앙의 부흥이 아니라 신앙의 퇴조를 부를 위험이 있다.

 

하느님 나라에 가서도 함께 영원히 살아가야 할 우리는 이 세상에서부터 다정한 인사를 나누고 평화를 빌어 주는 사랑의 사람들이어야 한다. 공의회 문헌에는 “미사 순서는, 각 부분의 고유한 뜻과 상호 연관성이 더 명백히 드러나고 또 신자들의 경건하고 능동적인 참여가 더 쉽게 이루어지도록 개정되어야 한다.”6)고 했다. 미사 때마다 하게 되는 평화의 인사가 성찬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좀더 의미있고 능동적으로 이루어지도록 사목자와 신자들은 함께 노력해야 할 것이다.

 

 

5. 삶으로 연결되어야 하는 평화의 인사

 

미사 때에 나눈 평화의 인사는 실제의 삶과 연결되도록 훈련되어야 한다. 미사 때에는 친절한 미소로 평화를 기원하지만 일단 성당 밖으로 나가면 안면을 바꾸고 비신자와 다를 바 없는 인생관,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간다면 안될 말이다.

 

실제로 어떤 사람들은 “이마에 십자가를 그으면서 그럴 수가 있느냐?” 하고 한탄하는 사람도 보았다. 가톨릭 신앙 생활 연구소에서 조사한 바에 따르면 평신도들이 교회 생활에 대한 회의를 갖고 있는 이유들 중 신자에 대한 실망이 46.1%나 되었다.7)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평화의 인사를 성당에서 했다면 그 평화가 신자들의 삶 속에서도 가득 넘쳐야 한다. 서로 비방한다든지, 미워하거나 시기한다면 그것은 큰 잘못이다. 특히 성당의 어떤 단체에 가입한 경우 서로 우위를 차지하려고 힘겨루기를 한다든지 비방하거나 편가르기를 하여 남들에게 나쁜 표양을 주어서는 안된다.

 

많은 사람들에게 성당에 나오는 이유를 물으면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해서라고 대답한다. ‘과연 우리는 평화를 그들에게 주고 있는가?’ 반문하지 않을 수 없다. 때때로 새로 영세한 사람들에게 소감을 물으면 “영세를 해서 좋기는 하지만 성당은 너무 메마르고 찬 것 같아요.”라고 말하는 것을 듣는다. 차디찬 눈초리에서 평화를 느낄 수는 없다. 부드럽고 친절한 말씨와 미소에서만 평화를 느낄 수 있다.

 

성 프란치스코는 유명한 평화의 기도를 우리에게 남겨 놓았다.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오게 하는 자가 되게 하소서. …”라고 하는 이 기도를 드릴 때마다, 참 평화를 전해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결심을 한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평화가 아쉬운 세상이다. 가정마다 직장마다 평화보다는 근심과 슬픔이 가득하다. 경제적으로 온 나라가 초토화된 듯한 느낌마저 드는 것은 슬픔이 아닐 수 없다. 수많은 실직자들이 생겨나고, 이 때문에 어깨 쳐진 남자들이 가정에서, 사회에서 슬픔 속에 살아간다. 많은 가정들이 불화하여 깨지고 있다. 이러한 때에 우리는 참 평화가 물질의 풍요로만 주어지는 것이 아님을 알릴 소명이 있다. 또한 서로가 어려움을 나누는 사랑을 통해서만 이 사회에 참 평화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몸소 실천하고 이웃들에게도 전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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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마태 5,23-24 참조.

2) 이홍기, [미사 전례], 분도 출판사, 1997, 284면 참조.

3) Allan Bouldy, Editor, “Catholic Rites Today”, The Order of St. Benedict, Inc. Collegevilie,

   Minnesota, 1992, 29면.

4) 전례헌장, 14항.

5) 마태 10,12-13 참조.

6) 전례헌장, 50항.

7) [신앙 생활 실태], 가톨릭 신앙 생활 연구소, 1995, 122면 참조.

 

[사목, 1998년 7월호, 최기산(인천 가톨릭 대학교 교수,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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