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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하느님께서 손수 알려주신 이름[9] / 이집트 체류[1] / 탈출기[9]
작성자박윤식 쪽지 캡슐 작성일2020-07-08 조회수1,879 추천수2 반대(0) 신고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9. 하느님께서 손수 알려주신 이름

 

드디어 모세가 그 사명을 받아들이고자 하느님께 아뢴다. “제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가서, ‘너희 조상들의 하느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고 말하면, 그들이 저에게 그분 이름이 무엇이오?’ 하고 물을 터인데, 제가 그들에게 무엇이라고 대답해야 하겠습니까?” 참으로 초원에서 양을 치는 목자다운 순진한 질문이다. 의당 누군가가 물어볼 질문으로, 꼭 대답해 주어야 할 이름이다.

 

이 질문을 언젠가 야곱이 한 적도 있었다. 야뽁 건널목 건너 프니엘에서 하였다. 밤새도록 하느님과 씨름을 하고서는, “당신의 이름을 알려 주십시오.”(창세 32,30) 하고 여쭈었지만, 그분 대답은 내 이름은 무엇 때문에 물어보느냐?”(창세 32,30) 라는 답변만 들을 뿐이었다. 그 자리에서 야곱은 이스라엘이란 새로운 이름을 부여받았고 복도 담뿍 받았다. 그렇지만 그분의 답은 아예 없었다. 복을 주는 것으로만 그쳤다. 사실 이런 질문을 감히 하느님 면전에서 대놓고 한 이가 얼마나 될까?

 

그렇지만 이번에는 하느님도 별수 없이 당신 신원인 이름을 밝혀야만 한다. 하느님의 큰 심부름꾼 노릇을 할 이가 묻는데, 어디 답을 아니 줄 수가! 그렇지 않아도 소명을 받을까 말까 한 모세에게, 그래도 그의 물음인 답만은 말해 주어야 했다. 하느님께서 그에게 나는 있는 나다.” 하고 대답하시고, 이어서 말씀하셨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돌아가서, ''있는 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여라.” 하고 일러 주어도 된다고 하신다. 이번 참에 있는 나로 아예 줄여 불러도 된다는 거다.

 

사실 이름은 사람들에게 어떤 분인지를 알게 하고, 또 이 이름을 부르는 이들을 그분을 생각해 주게 한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다시 모세가 좀 더 쉽게 알아듣기 쉬우면서 이해도 확실하게 하도록 추가로 말씀하셨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이 길로 곧장 돌아가서, ‘너희 조상들의 하느님, 곧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신 야훼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여라. 그러므로 이것이 영원히 불릴 나의 이름이며, 이것이 대대로 기릴 나의 칭호이다.”

 

따라서 모세의 이 질문에 하느님께서 당신 이름을 더 쉽게 이해하도록 하신 대답은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 그러므로 있는 나라는 분은 선조들의 하느님 곧 과거의 하느님이시자, 지금의 당신 백성의 하느님 곧 현재의 하느님이시며, 앞으로 당신 자신을 드러내시면서 계시하게 될 미래의 하느님이시다. 그리고 이를 한 마디로 줄여서는 야훼이라나. 그렇지만 이 문자의 발음이 정확한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들은 하나같이 하느님의 이 이름인 야훼를 감히 부르지 못해 아도나이라고 불렀기에.

 

아무튼 이 기회에 하느님께서 호렙에서 모세에게 손수 일러주신 당신 이름에 대해서 좀 더 소상히 알아보자. 하느님께서는 모세의 물음에, “나는 있는 나다.” 라고 대답하시고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돌아가서는 있는 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고 일러 주어도 좋다 하셨다. 쉬운 말로 하느님 존함은 나는 있는 나다라는 한 문장이다. 이름이 간단한 명사형이 아닌, 주어와 동사가 있는 문장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아니 이런 이름이 세상 어디에 또 있을까? 하느님께서는 모세가 여쭌 이름의 물음에, 처음으로 세상에 밝히신 게 이런 어처구니가 없는 문장 형태를 지닌 이름을 주셨다. 한 마디로 나는 있는 나다라고.

 

그리고 더 답답한 것은 이 수수께끼 같은 문장으로 된 이름마저 그 뜻이 그리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는 거다. 사실 이는 어쩌면 나는 내가 누구인지 말하고 싶지 않다. 또는 말할 수가 없다.’라는 의미로 우선은 해석할 수가 있다. 달리 본다면 굳이 알 필요가 없다는 것일 수도. 그리고 이렇게 있는 나의 문장으로 꾸민 것은 이 세상에 나 말고는 신다운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거나(이사 43,10), 또는 아무것도 아닌 하찮은 다른 신(이사 41,24)들과는 엄연히 반대되는 분으로 뚜렷이 구별되어야 하는 것으로 이해를 해야만 한다는 강력한 의미를 가진 으미이다.

 

물론 문장으로 이렇게 이름을 모세에게 소개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당신 구원 행위를 위해 모세를 도와주시고자, 모세와 언제나 함께 계심을 분명하게 알려주려는 뜻도 담겨 있을 게다. 사실 여기에 사용된 히브리 말 동사는 미래와 현재의 의미를 함께 지닌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있는 나다라는 말은 나는 너희가 장차 보게 될 너희와 함께 있는 나다와 같은 의미도 가진다고 보아도 된다. 결국 나는 있는 나다는 하느님은 언제 어디서나 인류를 위하여 함께 계시는 분임을 알게 하려는 것이리라. 따라서 그분께서는 인류의 구원 역사를 통하여 당신이 어떤 분이신지를 조금씩 드러내실 것이다.

 

있는 나인 하느님의 실제 이름은 야훼이다. 아마도 우리가 일상에서 그분을 간편하게 부를 수만 있다면, 어쩌면 야훼 하느님‘, 또는 야훼님이라면서 마음 놓고 정답게 부르면서 다가갈 수도. 그리고 이 야훼는 자음의 글자로만 음역으로 ’YHWH‘로 기록되어 있기에 하느님 이름 네 글자(신명사문자: 神名四文字)‘라고 부르기도 한다. 기원전부터 유다교 및 이스라엘인들은 히브리 말 자음으로 구성된 이 이름을 처음에는 어떤 식으로든 발음을 하였으나, 하느님의 이름을 감히 부를 수 없었기에 점차 그 발음을 어쩌다보니 아예 잊어버렸다나.

 

그것은 바빌로니아 유배 이후에 대사제가 일 년에 겨우 한 번 속죄의 날에 지성소에서 대사제가 작은 소리로 부르는 것 외에는, 이 단어인 이름을 발음하는 것은 일절 금지가 되었던 것도 한 몫을 했다. 더구나 이 신성한 하늘같은 하느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못하도록 아예 계명에다 집어넣었으니, 어느 누가 감히 입으로 말을 할 수가. 그래서 하느님의 이 이름을 발음하면서 읽는 대신 그들은 이 이름을 그냥 아도나이로 바꾸어 읽는 관습이 자리 잡았다. 그리하여 유다교의 미소라 학파가 히브리어 모음을 만들어 성경에 표기할 때에도 이 단어는 아예 아도나이로 읽게 하였다. 또 야훼를 주님이라 부르는 이유는 야훼를 그리스말 칠십인역에서 키리오스(주님)‘로 옮겨 적은 것이 그 계기가 되었다.

 

있는 나의 이름을 가진 하느님의 본성은 유일하다. 그리고 이것만이 진실로 처음부터 존재한다. 절대 존재는 이 이름뿐이다. 그 어떤 다른 것에서 비롯되지 않고, 그 자신이 모든 것이기에. 다른 창조된 것은 존재하는 것 같지만, 곧 존재하지 않는다. 하느님만이 창조되지 않으시고 본디 계신 있는 나이다. 다시 말해 홀로 영원하시기에 시작이 없으시고 그 끝도 없는 분이시다. 있는 나이신 야훼님께서 모세를 당신 구원의 도구로 삼으셨다.

 

이리하여 모세에게 당신 이름을 알려주신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취할 구원 계획을 일러 주시며 그가 해야 할 소명을 지시하신다. [계속]

 

[참조] : 이어서 '모세의 소명에 관한 지침이 소개될 예정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태그 야훼,아도나이,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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