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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주님 공현 대축일 후 화요일]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마르6,34-44)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21-01-05 조회수1,190 추천수0 반대(0) 신고

 

 

2021년 1월 5일 화요일

[주님 공현 대축일 후 화요일]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마르6,34-44)

   20210105 하느님이 사랑이신 이유 (나해 주님 공현 대축일 후 화요일)

 

1독서<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1요한4,7-10)

사랑하는 여러분서로 사랑합시다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사랑하는 이는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났습니다곧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

10 그 사랑은 이렇습니다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 주신 것입니다.

 

화답송 시편 72(71),1-2.3-4ㄱㄴ.7-8(◎ 11 참조)

◎ 주님세상 모든 민족들이 당신을 경배하리이다.

○ 하느님당신의 공정을 임금에게당신의 정의를 임금의 아들에게 베푸소서그가 당신 백성을 정의로가련한 이들을 공정으로 다스리게 하소서

○ 산들은 백성에게 평화를언덕들은 정의를 가져오게 하소서그가 가련한 백성의 권리를 보살피고불쌍한 이에게 도움을 베풀게 하소서

○ 저 달이 다할 그때까지정의와 큰 평화가 그의 시대에 꽃피게 하소서그가 바다에서 바다까지강에서 땅끝까지 다스리게 하소서

 

복음<예수님께서는 예언자로 나타나셨다.>(마르6,34-44)

34 예수님께서는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

35 어느덧 늦은 시간이 되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말하였다. “여기는 외딴곳이고 시간도 이미 늦었습니다.

36 그러니 저들을 돌려보내시어주변 촌락이나 마을로 가서 스스로 먹을 것을 사게 하십시오.”

37 예수님께서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하고 이르시니제자들은 그러면 저희가 가서 빵을 이백 데나리온어치나 사다가 그들을 먹이라는 말씀입니까?” 하고 물었다.

38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에게 빵이 몇 개나 있느냐가서 보아라.” 하고 이르셨다그들이 알아보고서, “빵 다섯 개그리고 물고기 두 마리가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39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명령하시어모두 푸른 풀밭에 한 무리씩 어울려 자리 잡게 하셨다.

40 그래서 사람들은 백 명씩 또는 쉰 명씩 떼를 지어 자리를 잡았다.

41 예수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하셨다물고기 두 마리도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 주셨다.

42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43 그리고 남은 빵 조각과 물고기를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

44 빵을 먹은 사람은 장정만도 오천 명이었다.

 

 

 십자가의 언덕

  주님 공현 후 화요일 제1독서 (1요한4,7-10)

  

"사랑하지 않는 자는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 주신 것입니다." (4, 8.10)  

 

사도 요한은 요한 1서 4장 7절 후반절에 '사랑하는 이는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고 말했는데, 이제 반의적 대구를 이루는 요한 1서 4장 8절 상반절을 통해 사랑을 실천하지 않는 자는 자기 스스로 하느님을 알지 못한다는 것을 입증하는 자임을 밝힌다. 

진정한 의미에서 사랑의 실천은 사랑이신 하느님을 알아야만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사랑이신 하느님을 모르고서는 참된 사랑의 의미조차 모르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로 번역된 '호티 호 테오스 아가페 에스틴' (hoti theos agape estin)에서 '호티'(hoti)는 '왜냐하면'이라는 뜻을 나타내는 접속사로서 요한 1서 4장 7절의 이유, 즉 거듭(새로)나서 하느님을 아는 자들이 서로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이유를 드러낸다.

그리고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라는 표현은 하느님과 사랑과의 불가분의 관계를 보여준다.

즉 하느님이 아니면 사랑이 없고, 사랑이 없으면 하느님이 아니라는 의미인 것이다.


하느님이 사랑이시라는 것은 결정적 증거는 바로 자신의 가장 소중한 독생 성자를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죄인들을 위해서 인류 구원의 제물로 십자가에 내어 놓으신 사건이다.

'이렇습니다'로 번역된 '엔 투토'(en tuto; 여기; here)는 어떤 장소를 가리키는 단어로서 사랑의 출처와 기원, 사랑의 본질에 대한 설명을 하기 위한 전치사구를 이끌고 있다.


사도 요한은 사랑의 기원과 출처가 하느님께 있을 뿐만 아니라 사랑의 본질이 하느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임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이 먼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사랑을 베푸셨는데 그 사랑은 바로 우리 인간을 위해 독생성자를 속죄제물로 보내신 사건을 통해 분명히 입증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사명 안에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이 깃들어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사명의 기원이 된 하느님의 사랑은 세상에 나타난 사랑의 본질이요, 모든 그리스도인이 따라야 할 모범이다(4,11).

 

또한 사도 요한은 이러한 하느님의 사랑을 표현하면서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라는 부정적인 내용을 먼저 언급함으로써 긍정적인 내용을 강조하고 있다.

즉 사랑의 출발이 인간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구현된 하느님의 계획과 마음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하느님을 향한 인간의 사랑은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지극히 작은 응답일 뿐임을 알 수 있다.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 주신 것'


본문에는 로마서 5장 1절과 10절에 나타난 사상이 들어 있다. 여기에서 '속죄 제물'로 번역된 '힐라스몬'(hillasmon; to be the propitiation)의 원형 '힐라스모스'(hillasmos)는 죄로 말미암아 하느님과 분리된 인간을 하느님과 화해하기 위한 목적으로 드려지는 제사를 가리킨다.

'속죄제'는 피의 희생이 필요하다. 이 피의 희생 제사를 드리기 위하여 구약 시대에는 '양'이나 '염소'의 피가 사용되었다.

그러나 그러한 제사는 불완전한 것이어서 죄의 문제를 완전히 해결해 주지 못했다.


따라서 완전하고도 영원한 제사가 드려지기 전까지 계속적으로 반복되어야 했다.

이러한 사정을 누구보다도 잘 아시는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위한 온전한 화해 제사를 계획하시고 속죄제물을 준비하셨는데,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이시다.

그리스도는 화해 제물이기 이전에 속죄 제물이 되셨다.

죄인들의 모든 죄를 속죄하실 뿐만 아니라 화해 제물이 되셔서  하느님의 원수였던 자들을 그와 화해시키셨던 것이다.


한편 그리스도의 화해와 속죄제사에 대한 사도 요한의 이같은 진술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의 사실성과 능력을 부인하는 자들을 간접적으로 경계한 표현이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여기지 않던 자들을 향하여 하느님의 사랑에 대해 설파하면서, 화해 제물이 되신 십자가 희생 제사속에 하느님의 사랑이 깃들어 있음을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화해 제물로 보내신 사건과 그로 인한 우리의 죄에 대한 용서는 하느님의 사랑에 기인한 것이다. 

 

 

 

(백) 주님 공현 대축일 후 화요일 - 01월08일


하느님께서는 사랑이시다. (요한1서 4,7-10)

 

사랑하는 여러분서로 사랑합시다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사랑하는 이는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하느님에게서 오는 사랑그 하느님의 사랑을 전해주고 받는그 사랑을 서로 하라 하심입니다그 사랑을 알고 그 사랑을 말하는 이가 하느님을 아는 것입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9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났습니다곧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 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대속 그 죽음으로그 죽음 안에서 죄의 없음의 존재들이 살게 되었습니다.

 

고린도2서 5, 21 하느님께서는 죄를 모르시는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하여 죄로 만드시어(대속),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의로움이 되게 하셨습니다.

 

10 그 사랑은 이렇습니다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 주신 것입니다.

피조물인 우리는 창조주 하느님의 사랑을 알 수 없습니다그분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깊은지 인간의 감정능력으로 감지할 수 없는 것이 하느님의 사랑입니다그래서 우리는 사랑을 받는 존재이지 사랑을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신이 당신 외아들을 인간들의 속죄 제물로 내주시는 그 사랑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그 사랑 인간의 지혜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사랑이기에 성령의 도우심으로 믿는 것입니다그 사랑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믿는 것입니다그 사랑의 힘은 전에도 있었고지금도 있고앞으로도 있을 세상의 모든 죄악보다 더 큰 사랑입니다.

 

요한묵시록 1, 8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으며 또 앞으로 오실 전능하신 주 하느님께서, “나는 알파요 오메가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히브리서 10, 14 한 번의 예물로거룩해지는 이들을 영구히 완전하게 해 주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피그 십자가의 단 한번의 죽음그 예물로 죄인들이 영구히 완전하게 되는 하늘의 사랑입니다

 

그 하늘의 사랑은 모른 체 인간들의 사랑을 위한 신앙을 산다면?

로마서 10, 2 나는 그들에 관하여 증언할 수 있습니다그들은 하느님을 위한 열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깨달음에 바탕을 두지 않은 열성입니다. 3 하느님에게서 오는 의로움을 알지 못한 채 자기의 의로움(사랑)을 내세우려고 힘을 쓰면서하느님의 의로움(사랑)에 복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못 받는다 입니다그러니 하느님의 사랑 그 참 의로움을 찾아야지요.

 

아모스 5, 4 정녕 주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집안에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는 나를 찾아라그러면 살리라.

 

스바니아 2, 3 주님을 찾아라그분의 법규를 실천하는 이 땅의 모든 겸손한 이들아의로움을 찾아라겸손함을 찾아라그러면 주님의 분노의 날에 너희가 화를 피할 수 있으리라.

주님의 분노는 인간의 의로움으로 피할 수 없습니다하느님 법규의 실천 곧 십자나무 하나의 희생대속 그 하느님의 약속을 진리로 믿었을 때입니다. (탈출15,25 요한14,6)

 

마태오 6, 33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요한 8, 31 예수님께서 당신을 믿는 유다인들에게 말씀하셨다.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32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교회는 하늘의 의로움겸손이신 그리스도를~~ 그분의 말씀사랑 곧 진리의 성령을 담으러 오는 곳입니다.

아멘♡♡♡

 

 

 

 

 주님 공현 후 화요일 복음 (마르6,34-44)

 

"예수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하셨다. 물고기 두마리도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 주셨다.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41~42)


'찬미를 드리신'에 해당하는 '율로게센'(eulogesen; blessed; gave thanks)의 기본형 '율로게오'(eulogeo)는 '축복하다'(1코린4,12), '찬미하다'는 뜻이다.

여기서는 직설법 부정 과거로 쓰였으므로, 직역하면 '그가 찬미하였다'이다.


예수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일반적으로 식사할 때 감사 기도를 드린 것과 같이 양식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하며 찬미를 드리신 것이다(마태26,26; 루카24,30).

예수님의 감사와 찬미는 성부 하느님께 돌려 드려지고 있지만, 이 기적을 가능케 한 권능은 예수님 자신의 신적 속성 가운데서 나온 것이다.


공관 복음의 병행 구절에서는 모두 여기처럼 '율로게오'(eulogeo)동사를 사용하였지만 (마태14,19; 루카9,16), 요한 복음에서는 '감사하다' 뜻의 '유카리스테오'(eucharisteo) 동사를 사용하여(요한6,11) 본문에 나타난 예수님의 기도가 간구가 아니라 '감사'였음을 직접적으로 표현해 주고 있다.


'빵을 떼어'


'빵을 떼어'에 해당하는 '카테클라센 투스 아르투스'(kateklasen tous artous; broke the loaves)에서 '빵'을 '아르토스'(artos)의 복수 '아르투스'(artous; loaves)로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예수님께서 빵 한 개로 여러 조각을 낸 것이 아니라,  여러 개의 빵을 여러 조각으로 나누셨음을 나타낸다.


한편 빵을 떼는 행위는 유대 관습에 의하면 주인이나 가족의 웃어른이 식사 시작을 알리는 신호였다.

바로 이러한 차원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빵을 떼어 나눠 주신 것은, 이제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새로운 공동체 안에서 예수님께서 그 주인으로서 잔치를 베풀고 있다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이것은 사람의 육신 생명이 빵으로 지탱되듯이, 예수님 당신이 인간 생명의 절대권을 가지신 분이시며, 당신 자신이 영혼 생명의 주인이시고, 당신 없이는 인간이 구원을 받을 수 없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러기에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투스 펜테 아르투스 카이 투스 뒤오 익튀아스; (tous pente artous kai tous dyo ichthyas; the five loaves and the two fishes)로 남자만도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 사화는 성체성사의 예표가 된다.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여기서 사용된 동사 '파라티토신'(paratithosin; set before)의 기본형 '파라티테미'(paratithemi)는 '곁에'를 뜻하는 전치사 '파라'(para)와 '두다'는 뜻의 동사 '티테미'(tithemi)가 결합된 형태로 '곁에 두다'는 뜻이다.

말하자면 이 동사는 현재형으로 사용되어 '계속적으로 사람들 곁에 갖다  놓고 있는' 현재 진행의 성격을 띠고 있다.


사람들이 오십 명씩 또는 백명 씩 앉아 있었기 때문에, 각 무리가 다 먹도록 하기 위해서는 제자들이 한 번에 빵을 다 갖다주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게다가 그 모인 무리가 성인 남자만 오천 명이었기 때문에, 계수에 들지 않는 어린 아이들과 여자까지 합치면 엄청난 수였을 것이다.


따라서 그 많은 숫자의 사람들에게 빵과 물고기를 나눠 주기 위해서는 제자들이 계속적으로 예수님께로 가서 빵을 받아와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반복적인 수고를 거듭해야 했던 것이다.


'배불리'


동일한 표현이 마태오 복음 14장 20절에도 나온다. 이 동사가 '에코르타스테산'(echortasthesan; were satisfied; were filled) 으로 원문에 나오는데, 여기처럼 수동태로 사용될 때에는 '배부르게 먹다'는 뜻으로서 실컷 먹고 배부른 상태를 강조하여 드러내고 있다.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배푸신 양식은 조금도 부족함이 없었던 것이다(시편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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