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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고해성사] 고해성사, 용서하시는 그리스도와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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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주호식 [ jpatrick ] 작성일2009-07-21

고해성사, 용서하시는 그리스도와 만남

 

 

우리는 세례성사로써 모든 죄를 용서받고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났지만, 죄로 이끌리는 경향은 우리 안에 그대로 남아있기 때문에 죄를 지어 영혼의 건강을 해치게 된다. 손상된 영혼의 건강을 회복하려면 지은 죄를 용서받아야 하는데, 죄의 용서는 고해성사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그러면 영혼의 ‘약국’이요 ‘병원’이라고 할 수 있는 고해성사는 어떻게 생겨났을까? 고해성사는 죄인들에게 용서를 베푸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유래한다.

 

예수께서는 여러 가지 비유를 통해서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명확하게 알려주셨다. 예를 들어, 그 유명한 ‘잃어버린 아들의 비유’(루가 15,11-24)에서 하느님은 집을 떠나서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잘못을 뉘우치고 돌아오는 아들을 너그럽게 받아들이는 자비로운 아버지로 드러난다. 말씀으로 선포된 하느님 아버지의 용서는 예수님을 통해서 실현되었다. 예수께서는 당신에게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마르 2,10)이 있다고 하시면서, 조금이라도 회개하려는 의지를 보인 사람들에게 관대하게 용서를 베푸신다.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씻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은 죄 많은 여인은 ‘너의 죄는 용서받았다.”(루가 7,36-50)는 말씀을 듣는다. 또한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서 마지막 순간에 당신에게 의지하는 죄인에게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루가 20,40-43)라고 약속하신다.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당신의 제자들에게 위임해 주신다. “성령을 받아라. 누구의 죄든지 너희가 용서해 주면 그들의 죄는 용서받을 것이고 용서해 주지 않으면 용서받지 못한 채 남아있을 것이다”(요한 20,20-23). 이렇게 사도들에게 위임된 사죄권은 다시 사도들의 후계자인 주교들과 그의 협조자인 사제들에게 계승된다. 죄의 용서는 사제를 통해서 이루어지지만, 죄를 용서해 주시는 분은 물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오늘날도 예수께서는 고해성사 중에 사제를 통해서 용서의 은혜를 우리에게 전해주신다.

 

용서와 자비를 베푸시는 그리스도를 만나려면 먼저 우리가 범한 죄와 잘못을 인정하고 뉘우쳐야 한다. ‘다른 사람들도 다 그런데 뭘.’ 하면서 자신의 죄를 부인하거나, ‘난 안 그러려고 했는데 저 사람 때문에.’라고 원인을 남에게 돌린다면 곤란하다. 자신이 병에 걸렸다는 것을 부정하는 환자가 병원에 가려고 하지 않듯이, 죄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고해성사를 받으려 하지 않을 것이고. 따라서 용서하시는 그리스도를 만날 수도 없다. 용서와 자비를 베푸시는 그리스도를 만나려면 자신의 죄와 허물을 숨김없이 인정해야 한다. 잃었던 아들이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루가 15,18)라고 잘못을 솔직히 인정한 뒤 집으로 돌아와서 자비로운 아버지를 만나듯이 말이다.

 

죄를 인정하고 통회하는 과정은 자기 비하와 자기 단죄로 끝나서는 안된다. 오히려 이 과정은 무엇인가를 깨닫고 배우는 기회가 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사람은 다른 사람이 범한 잘못을 보고서 속으로 흉을 보거나 겉으로 비난하기 쉽다. 그러나 살다보면 자신도 그와 똑같은 잘못을 저지르게 되어 자기가 남보다 그렇게 잘나지 않았음을 깨닫게 된다. 이런 깨달음을 통해서 진정한 겸손에 이를 수 있다. 그리고 남의 잘못을 보고 손가락질하고 비난하기보다 먼저 그 사람이 내심 겪게 되는 아픔을 헤아리면 좀더 관대한 마음을 지닐 수 있지 않을까. 이렇게 사람은 자신의 잘못을 살펴보면서 좀더 겸손해질 수 있고, 관대해질 수 있는 것이다.

 

죄와 잘못을 통회하면서 중요한 것을 배울 수 있다고 해서 계속해서 거기에 머무르라는 말은 아니다. 고해성사를 통해서 잘못을 용서받았으면, 거기에 마음을 두어서는 안된다. 과거의 자신의 잘못과 죄에 대해서 되새기고 그에 대한 통회와 보속이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는 자신의 집착이고 아집인 경우가 많다. 용서는 우리가 죄스러운 과거에서 돌아서서 더는 거기에 마음을 쓰지 말고 선을 행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런 점은 예수께서 세 번이나 당신을 배반한 베드로를 어떻게 대하셨는지를 살펴보면 분명하게 드러난다.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고기잡이하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그들과 함께 아침식사를 하신 뒤 베드로에게 “네가 이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요한 20,15)고 물으신다. 세 번이나 같은 질문이 반복되고 베드로는 계속해서 그렇다고 대답하는데, 대답이 끝나면 그때마다 예수께서는 “내 어린 양들을 잘 돌보아라.” 하고 당부하신다. 초대교부들은 이 구절을 두고 예수께서 베드로가 세 번 당신을 배반한 것을 기워 갚도록 배려하신 것이라고 해석한다.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네가 큰소리를 치더니 결국 나를 배반하지 않았느냐.’ 하고 몰아세우시지 않는다. 그 대신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시고는 “내 어린 양들을 잘 돌보아라.” 하고 당부하신다. 이 물음과 당부에는 다음과 같은 의미가 담겨있지 않을까? ‘베드로야. 네가 배반한 것을 새삼 얘기해 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네가 진정 가슴 아팠다는 것을 내가 다 알고 있다. 이제부터는 사랑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나를 사랑하는 그 마음으로 내가 목숨을 바쳐가면서 사랑하였던 양들을 잘 돌보아라.’

 

예수께서는 베드로가 과거의 잘못에 매여서 살기를 원치 않으셨다. 그래서 베드로에게 너그러운 용서를 베푸셔서 그가 과거의 잘못이라는 족쇄에서 벗어나 새출발을 할 수 있게 하셨다. 오늘도 예수께서는 고해성사를 통해서 바로 이것을 이루시려고 한다. 우리가 범한 죄와 잘못에서 해방되어 다시 출발하는 것, 우리를 속박에서 부자유스럽게 하는 과거의 허물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진 몸과 마음으로 앞을 바라보면서 그분이 가르쳐주신 대로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며 사는 것, 바로 이것이 예수께서 원하시는 바이다.

 

고해성사는 자비로우신 그리스도를 만나서 죄를 용서받고 새 출발을 할 수 있는 기회라고 하지만, 여전히 많은 신자들이 고해성사 받는 것을 부담스럽고 두렵게 여긴다. 어쩌면 이 부담감과 두려움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계속해서 남아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의 죄의 잘못을 살피고 인정하며 고백한다는 자체가 필연적으로 부담과 두려움을 수반하기 때문이다. 죄를 인정하고 고백하는 데에 따르는 부담감과 두려움을 넘어서야만 그리스도와 만나서 용서와 평화라는 소중한 선물을 얻게 된다.

 

물론 고해성사의 중요성과 의미는 말로만 끝나서는 안되고 실천으로 증거해야 한다. 진정으로 용서의 기쁨을 체험하고서 홀가분한 모습과 밝은 얼굴을 보이는 이들이 많아질 때 고해성사를 통해 그리스도를 만나는 이들이 늘어날 것이다. 그리고 고해사제는 이해심과 친절, 그리고 무엇보다도 크나큰 인내심을 지니고 고해자들을 대함으로써 그들이 자신을 통해서 자비로운 그리스도를 체험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하는 착한 목자(루가 15,4)와 같은 사제들이 많아질 때, 고해성사는 말 그대로 용서하시는 그리스도와 하느님을 만나는 장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경향잡지, 1999년 1월호, 손희송 베네딕토 신부(가톨릭 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