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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고해성사] 하느님의 사랑의 성사 - 고해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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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주호식 [ jpatrick ] 작성일2010-10-06

[알기 쉬운 교리상식] 하느님의 사랑의 성사 - 고해성사

 

 

한때 정치가들이 앞 다투어 “국민들 앞에 고해성사하는 마음으로… 운운”하면서 가톨릭교회를 광고해(?) 준 적이 있었다. 처음에는 ‘저 사람들이 고해성사의 뜻이나 제대로 알까?’ 하면서 곱지 않은 시선으로 봤었지만, 이런 방법으로 가톨릭을 알리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든다. 고해성사는 ‘회개의 성사’, ‘참회의 성사’, ‘고백의 성사’, ‘용서의 성사’ 혹은 ‘화해의 성사’로 불리기도 한다. 강조하는 관점에 따라 다르게 불리겠지만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자비를 전제로 하는 ‘용서의 성사’가 앞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그래서 고해성사를 하느님의 ‘사랑의 성사’로 부르기도 한다.

 

가톨릭교회 교리서는 “고해성사를 보는 신자들은 하느님께 끼친 모욕에 대하여 그분의 자비로 용서를 받으며, 또한 동시에 범죄로 상처를 입혔던 교회, 사랑과 모범과 기도로써 죄인들이 회개를 위하여 노력하는 교회와 화해를 한다.”(1422항)고 하면서 화해의 두 차원, 즉 하느님과의 화해와 교회와의 화해를 강조한다. 이는 당연히 예수님께서 강조하셨던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사랑의 이중계명에 상응하는 것이다.

 

죄는 하느님의 계명을 거스르는 행위이다. 죄는 하느님과 등지는 행위이고 하느님에게서 멀어지는 행위이다. 죄를 나타내는 구약성경의 히브리말(hattah)도 ‘방향을 빗나가다’, ‘길에서 벗어나다’, ‘표적을 빗나가다’의 의미를 가진 말에서 유래한 용어이다. 하느님의 길에서 빗나갔던 사람이 다시 하느님의 길로 돌아오는 것, 이것을 우리는 ‘회개’라고 부른다.

 

또한 이러한 상태를 나타내기 위하여 구약성경에서는 shub(신약에서는 metanoia)이란 용어를 사용했는데, 이 말은 ‘길을 바꾸다’ 혹은 ‘되돌아오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하느님과 반대의 길을 가는 사람이 죄인이라면, 방향을 바꾸어 하느님께 되돌아오는 사람은 회개한 사람이다. 고해성사는 하느님께로부터 멀어졌던 사람이 다시 하느님께 돌아와 소원해졌던 관계를 회복하는 성사이다.

 

 

고해성사의 실천적인 요소들

 

가. 죄의 성찰시 유의할 점들

 

우리는 고해소에 들어가기 전에 죄의 성찰을 한다. 이때 십계명 혹은 예수님의 사랑의 이중계명이 성찰의 기준이 되는 것은 분명하다. 우리가 죄를 성찰할 때에 하나하나의 죄의 목록을 열거하는 것도 좋지만, 나의 삶의 성향에 대해서도 성찰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점집을 들락거리는 사람이나 신문에 실린 ‘오늘의 운세’ 등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왜 그랬냐고 물으면 대부분 전자는 “너무 답답해서” 후자는 “호기심에서” 그랬다고 대답한다.

 

이러한 행위들은 큰 죄처럼 보이지 않을 수도 있지만, 어쩌면 신앙의 기본을 흔들고 하느님을 배반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더 위험한 죄라고 할 수 있다. 성찰의 가장 기본은 지금 나의 삶의 방식이 하느님께로 향해 있느냐 하는 것이다.

 

나. 죄를 미화시키지 마라.

 

아무리 고해성사가 하느님의 용서의 성사 혹은 사랑의 성사라 하더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부담스러워 한다. 고해소 앞에 서기가 두렵고, 나의 치부를 드러내기가 두렵다. 고해 신부님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고민도 된다.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죄만 실컷 고백하거나, 자신의 잘못을 합리화시키기도 한다.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상황을 장황하게 설명하는 사람도 있다.

 

고해소에 들어와서는 죄를 미화시킬 필요가 없다. 어차피 고해성사 시간은 나의 죄를 인정하는 시간이다. 하느님 앞에 나를 고발하는 시간이다. 죄의 용서는 사제의 사죄경으로 이루어진다. 하지만 죄의 용서를 말씀하시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시다. 성체성사와 마찬가지로 고해성사 안에서 주례사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리자(in persona Christi)이다. 고해사제의 경험으로 볼 때 핑계를 대는 사람보다 간결하게 자신의 죄만 고백하는 사람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다. 용서의 확신을 가져라.

 

간혹 한번 고해성사를 봤던 내용을 다시 고백하는 신자들이 있다. 왜 그러냐고 물으면 “성사를 보긴 했지만 찝찝해서….”라고 한다. 하느님께서는 나를 용서해 주신다는데 내가 나를 용서 못하는 것이다. 이것은 나를 스스로 죄에 묶어 놓는 행위이다. 이런 경우, 용서하시는 하느님을 내가 믿지 못하는 죄가 더 크지 않을까? 하느님께서는 한번 용서해 주셨던 죄에 대해서는 다시 묻지 않으신다.

 

우리의 죄가 아무리 크다고 하더라도 그분께서는 용서해 주신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거스르는 죄 외에는 다 용서받을 수 있다고 하셨다. 성령께서 하시는 일은 끊임없이 우리를 하느님 아버지께 인도하시는 일이다. 성령을 거스른다는 것은 회개 자체를 거부한다는 것이니, 모든 죄는 용서를 받을 수 있다는 뜻이 된다.

 

고해성사는 해방과 성화의 성사이다. 고해성사를 통하여 예수님께서는 죄에 묶였던 인간을 해방시켜 주시고, 죄로 상실했던 하느님의 생명의 은총을 회복시켜 주신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내가 고백했던 죄에 대한 죄책감에 묶여 있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항상 나를 용서해 주시고 새롭게 출발할 수 있는 힘을 주시는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일이다.

 

[월간빛, 2010년 10월호, 하창호 가브리엘 신부(5대리구 사목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