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고해성사] 죄의 용서: 용서하시는 하느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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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주호식 [ jpatrick ] | 작성일2004-10-30 | |||
죄의 용서 - 용서하시는 하느님
머리말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는 사실 안에서 명백하게 드러난다. 하느님의 크신 사랑 앞에서 우리는 다윗의 시편으로, 부족한 죄인임을 솔직히 고백한다. “하느님 자비하시니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애련함이 크오시니 저의 죄를 없이하소서. 제 잘못을 말끔히 씻어주시고 제 허물을 깨끗이 없애 주소서. 저는 저의 죄를 알고 있사오며 저의 죄 항상 제 앞에 있삽나이다”(시편 50,3-5).
하느님께서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신다는 확실한 믿음을 우리는 사도신경으로써 고백한다. 모든 성인의 통공에 대한 믿음 고백 다음에 “죄의 용서와 육신의 부활을 믿으며, 영원한 삶을 믿나이다. 아멘”으로 이어진다. 사도신경 안에서 죄의 용서는 육신의 부활과 영원한 삶과 똑같은 중요성을 지닌 신조(信條)로 명시되어 있다. 따라서 주님의 부활, 우리의 부활과 영원한 삶을 인정하여야만 구원에 이르듯이 죄의 용서를 믿어야만 구원을 얻는 길로 나아가는 것이다.
죄의 용서는 성서에 기록되어 있는 확실한 가르침이다.1) 신구약 성서에 모두 206회나 죄의 용서에 대한 구절이 나타나고, 그 가운데 신약에만도 86회나 된다. 낱말의 사용이 정확하지 않더라도 그 뜻이 죄를 용서하는 내용은 더 많이 발견된다.2)
[가톨릭 교회 교리서]의 가르침도 죄의 용서를 중요하게 다룬다. 제1편 2부 3장 10절에서 사도신경의 "죄의 용서를 믿나이다"를 다루고3) 제2편에서 세례성사와 고해성사, 그 밖에 다른 성사를 통한 죄의 용서를 자세히 다룬다.4) [가톨릭 교회 교리서]는 사도신경이 죄의 용서와 성령께 대한 믿음을 연결시킬 뿐 아니라 교회와 성인의 통공에 대한 믿음과도 연관시킨다고 믿고 그 연관성을 강조한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사도들에게 성령을 보내 주심으로써, 죄인들을 용서하시는 당신의 신적(神的) 권능을 주셨음을 가르친다.5) “성령을 받아라. 누구의 죄든지 너희가 용서해 주면 그들의 죄는 용서받을 것이고 용서해 주지 않으면 용서받지 못한 채 남아 있을 것이다”(요한 20,22-23).
세례성사는 죄의 용서를 위한 첫째가는 가장 중요한 성사이고, 그리스도의 뜻에 따라 교회는 세례 받은 사람들의 죄를 용서할 권한을 가지고 있으며, 이 권한을 주교와 사제들을 통하여 고해성사 안에서 통상적으로 행사한다. “죄의 사함에서, 사제들과 성사들은 우리 구원의 유일한 주인이요 분배자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없애시고 우리에게 의화의 은총을 주기 위해 사용하시는 단순한 도구들일 뿐이다.”6)
1. 하느님의 사랑
하느님의 특징은 무엇보다도 용서하시는 하느님이시라는 것이다. “하느님은 어떤 죄도 용서하시는 분, 애처롭고 불쌍한 꼴을 그냥 보아 넘기지 못하시고 좀처럼 화를 내지 않으시는 분, 그 사랑은 그지없으십니다”(느헤 9,17). 이 성경 말씀은 하느님의 사랑을 가장 잘 드러내 주는 구약성서 구절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귀양가서 종살이하던 중에 단식하며 죄를 뉘우치는 마음으로 고백하며 드렸던 느헤미야 9장은 감동적인 고해성사의 표본이라고 볼 수 있다. “이 모든 일을 겪었지만 우리는 하느님께 잘못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하신 일은 틀림이 없습니다. 죄는 저희에게 있습니다”(33절).
하느님은 무한한 사랑으로 인간과 만물을 창조하셨다. 특별히 인간은 하느님의 사랑을 안고 살았다. 하느님의 모상(模像)이던 인간은 마귀에게 마음을 내줌으로써 온갖 축복을 잃고 비참한 신세가 되고 말았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하느님이 주셨던 본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잃어 버렸습니다”(로마 3,23). 루가 복음 15장의 둘째 아들과 같은 처지가 되었다. 그러나 하느님은 성자 구세주를 보내시어 인간을 구원으로 인도하도록 안배하셨다. 인간의 마음은 변화 그 자체이지만, 하느님의 마음은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다. 하느님의 마음은 인간의 그것과는 전혀 다르다. “(내 백성이 끝내 나를 저버리고 바알을 불러 예배하지만 …) 에브라임아,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이스라엘아, 내가 어찌 너를 남에게 내어 주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처럼 만들며, 내가 어찌 너를 스보임처럼 만들겠느냐. 나는 마음을 고쳐 먹었다. 네가 너무 불쌍해서 간장이 녹는구나”(호세 11,7-8).
인간을 사랑하기로 한 번 정하신 마음은 결코 변하지 않으신다. 하느님의 사랑은 무조건적이고 무한하다. 죄인에게서 회개만 원하신다. “그가 못된 행실을 한 자라고 해서 사람이 죽는 것을 내가 기뻐하겠느냐?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이다. 그런 사람이라도 그 가던 길에서 발길을 돌려 살게 되는 것이 어찌 내 기쁨이 되지 않겠느냐?”(에제 18, 23) 인간은 자신의 죄를 가끔 기억하더라도 하느님께서 한번 용서해 주신 죄는 지워지고 더 이상 없다.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오라, 와서 나와 시비를 가리자. 너희 죄가 진홍같이 붉어도 눈과 같이 희어지며 너희 죄가 다홍같이 붉어도 양털같이 되리라’”이사 1,18). “이제 슬픔은 가시고 평화가 왔습니다. 당신께서는 나를 멸망의 구렁에서 건져 주셨습니다. 나의 죄악을 당신의 뒤로 던져 버리셨습니다”(이사 38,17).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와 같은 은혜를 베푸셨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죄를 묻지 않으시고 그리스도를 내세워 인간과 화해하셨습니다”(2고린 5,19).
2. 예수님의 은혜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 주셨다. 하느님이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단죄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시켜 구원하시려는 것이다”(요한 3,16-17).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사랑, 곧 죄인의 용서를 전하는 것으로 끝내지 않으시고, 당신의 지상 활동 동안 죄를 용서해 주셨다.7) 하느님은 그를 보내시어 죄를 속죄하게 하셨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보내시어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려고 제물로 삼으시기까지 하셨습니다”(1요한 4,10). 예수님께서는 당신 생명을 내놓으시고 피를 쏟으셨다. “이것은 나의 피다. 죄를 용서해 주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내가 흘리는 계약의 피다”(마태 26,28).8) “그분은 우리 죄를 당신 몸에 친히 지시고 십자가에 달리셔서 우리로 하여금 죄의 권세에서 벗어나 올바르게 살게 하셨습니다. 그분이 매맞고 상처를 입으신 덕택으로 여러분의 상처는 나았습니다”(1베드 2,24). 이렇게 하여 그리스도는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화해를 이룩하셨다. “우리를 하느님과 화해하게 해 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덕분으로 우리는 지금 하느님을 섬기는 기쁨을 누리게 되었습니다”(로마 5,11).9) 그리스도는 죄인을 부르러 오신 구세주이시다. 용서의 삶을 제자들에게도 가르치셨다. 죄인을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명하셨다(마태 18,21-22). 당신께서 항상 바치시던 ‘주님의 기도’를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시면서 죄인의 용서를 강조하셨다(마태 6,12; 18,35).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시기 직전에 죄인들을 위해 아버지께 기도하셨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루가 23,34).
부활하신 주님은 제자들에게 죄의 용서를 선포하도록 임무를 맡기셨고, 당신의 이름으로 죄를 용서해 줄 수 있는 권능을 부여하셨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회개하면 죄를 용서받는다는 기쁜 소식이 예루살렘에서 비롯하여 모든 민족에게 전파된다고 하였다.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다”(루가 24,47-48).10)
3. 성령님의 용서
예수님께서 성령을 통해 고해성사의 은혜를 교회 안에서 계속 이어가기를 바라신 사실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대표적인 기도문이 바로 고해성사의 집전자가 외우는 사죄경이다. “인자하신 천주 성부께서 당신 성자의 죽음과 부활로 세상을 당신과 화해시켜 주시고 죄를 사하시기 위하여 성령을 보내 주셨으니 교회의 직무 수행으로 몸소 이 교우에게 용서와 평화를 주소서. 나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이 교우의 죄를 사하나이다. 아멘.”
성령은 모든 생명과 은총의 원천이 되신다. 특히 회개와 개선의 은혜는 성령께서 내리시는 선물이다. 당신의 합당한 거처가 되도록 사람의 내부를 깨끗이 만드신다. 성령께서 오시면 새로 나게 하시고 모든 죄악의 그림자를 제거해 주신다. “오소서, 성령님, 당신의 빛, 그 빛살을 하늘에서 내리소서. 가난한 이 아버지, 은총의 주님, 오시어 마음에 빛을 주소서. 가장 좋은 위로자, 영혼의 기쁜 손님, 생기 돋워 주소서. … 허물은 씻어 주시고 마른 땅 물 주시고 병든 곳 고치소서”(성령강림 대축일의 부속가:성령 송가).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거스르는 죄 외에는 어떤 죄라도 용서받을 수 있음을 가르치셨다.11)
4. 교회의 성사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사도들에게 성령을 주실 때, 그들에게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맡기셨다.12) 그리고 사도들을 파견하시면서 모든 민족에게 당신 이름으로 회개하면 죄를 용서받는다는 것을 선포하라고 명하셨다(루가 24,47 참조). 사도들과 그 후계자들은 이러한 “화해의 봉사직”(2고린 5,18)을 수행한다. 곧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인간을 위해 얻어 주신 하느님의 용서를 사람들에게 전하며 그들을 회개와 신앙으로 부를 뿐만 아니라, 세례를 통한 죄의 용서를 베풀어 주기도 하고 그리스도께 받은 열쇠의 권한으로 죄를 용서해 줌으로써 그들을 하느님과, 그리고 교회와도 화해시킨다.13) 성 아우구스티노 교부는 교회의 역할에 대하여 “교회는 그리스도의 피와 성령의 작용을 통해서 교회 안에서 죄의 용서가 이루어지도록 하늘 나라의 열쇠를 받았습니다. 죄 때문에 죽었던 영혼이 이 교회 안에서 다시 살아나 은혜롭게도 우리를 구원하신 그리스도와 함께 살게 됩니다.”14)라고 강조하였다.
아무리 중대한 잘못이라고 해도 교회가 용서해 줄 수 없는 잘못은 없다. 모든 사람을 위해 돌아가신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교회 안에 죄를 뉘우치고 돌아오는 누구에게나 용서의 문이 늘 열려 있기를 바라신다.15) 밀라노의 주교, 성 암브로시오 교부는 “주님께서는 당신 제자들이 큰 권한을 가지기를 원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보잘것없는 봉사자들이 당신이 지상에 계실 때 수행하신 모든 일들을 당신의 이름으로 행하기를 원하십니다.”16)라고 말하였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는 사죄권의 특은에 대하여 “사제들은 하느님께서 천사들이나 대천사들에게 주지 않으신 권한을 받았습니다. … 하느님께서는 사제들이 이 세상에서 하는 모든 것을 승인하십니다.”17)라고 하였다. 만일 교회 안에 죄의 용서가 없었다면 어떠한 희망도 없을 것이고,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해방에 대한 아무런 기대도 없을 것이다. 이 선물을 교회에 맡겨 주신 하느님께 감사 드리자고 아우구스티노는 역설한다.18) 믿는 사람은 하느님의 용서를 체험하고 그를 닮아 포기하지 않고 용서함으로써 천상 아버지의 자녀임을 증명하는 것이다.19)
5. 교부들의 가르침
하느님께서는 정의로운 분이시나 더욱 자비로운 분이심을 교부들은 강조하였다. 암브로시오 교부는 하느님의 “자비와 정의의 비율”을 2:1로 설명하였다. “왜 당신은 선하신 하느님의 자비를 받으려 하지 않습니까? 하느님은 자비와 정의의 비율을 2대 1로 정해 놓으셨습니다. 가운데는 정의가 자리잡고 양쪽 옆에는 자비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죄가 많은 곳에 하느님의 자비도 더욱 커집니다. 하느님의 정의는 자비 없이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느님께는 정의가 자비이기 때문입니다.”20) 하느님은 자비 자체이시다.21)
그리스도께서는 죄인을 위하여 하늘에서 내려 오신 대사제이시다. 죄인들을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생명을 바치셨고 그들을 위한 중개자로서 언제나 하느님 아버지께 빌어 주신다.22) 그리스도의 자비는 죄의 용서에서 드러난다. 마태오 복음 21장 28-32절에서 세리와 창녀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바로 주님의 자비를 보여 주는 것이며, 주님께서 중죄라도 용서해 주신다는 사실을 증명해 준다.23) 하느님의 자비는 정의를 능가하기 때문에 죄인인 우리도 하느님의 선하심을 믿고 희망을 가질 수 있다. 죄인이 고집을 부려 죄 속에 머무르지 않고24), 회개하며 주님의 자비를 부르짖을 때, 죄를 끊어 버리고 하느님께 돌아올 때 주님은 자비를 풍성히 베푸신다.25)
암브로시오 교부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정의와 자비가 서로 결합되어 있음을 가르쳤다.26) 주님의 구원 사업은 죄인에 대하여 하느님께서 자비를 베푸신다는 진리를 보여 준다.27) 죄에 빠져 있는 사람도 하느님의 자비를 의심하거나 좌절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크신 자비로 죄인들을 불쌍히 여기시기 때문이다.28) 죄인인 우리가 할 일은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며 죄를 뉘우치는 일이다. 구약의 다윗 왕, 신약의 베드로 사도, 그 밖의 많은 사람들도 죄를 눈물로 뉘우침으로써 주님의 용서를 얻었다. 눈물은 용서를 강요하지 않으면서도 얻어내는 힘이 있다. 그와 같은 통회의 눈물에 대하여 암브로시오는 “유익하고 좋은 눈물”이라고 불렀다.29)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교회가 가지고 있는 사죄권에 대하여 “당신의 교회에 열쇠를 주셔서 교회가 땅에서 푼 것은 하늘에서도 풀려 있을 것이고, 땅에서 맨 것은 하늘에서도 매여 있게 하시었다. 다시 말해서 누구든 교회에서 죄가 사해짐을 믿지 않는다면 사함을 받지 못하며, 믿고 죄에서 회개하여 돌아서며 교회의 품에 의탁하는 사람은 그 믿음과 회개로 말미암아 나음을 받을 것이다. 누구든지 자기에게 죄가 사해질 수 있음을 믿지 않는 자는 절망하여 더 악화되며, 자기 회심의 결과를 의심스러워하는 한 자기에게는 악보다 더 나을 것이 없는 것처럼 한다.”30)라고 말한다. 그는 또 "회개하는 사람에게 무슨 죄가 용서받지 못할 것인가! 심지어 그리스도의 피를 흘린 죄까지도 용서받았지 않았는가!"라고 역설하였다.31)
오리게네스는 중죄인도 회개하고 주님께 돌아올 때 죄의 용서를 얻게 된다고 가르친다.32) 그리스도의 자비를 피해 갈 죄는 아무것도 없다고 요한 크리소스토모 교부는 말하였다.33) 노바시아노 이단의 주장에 대항하여 예로니모 교부도 모든 죄는 속죄를 통하여 용서받을 수 있다고 가르쳤다.34) 다만 성령께 거스르는 죄만은 용서를 받지 못함에 대하여 여러 교부들이 언급하였다.35) 죄의 용서를 얻는 방법에 대하여 애덕의 행위를 적합한 방법으로 설명한 교부들도 많다.36) 암브로시오 교부는 죄를 씻어 주는 자선의 효력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우리 죄를 용서받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자선을 통하여 용서받는 것입니다. … 당신은 죄로써 팔린 몸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이제는 선행으로써 당신의 몸을 다시 사야 합니다.”37) 유스토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 위하여 베푸는 자선 행위가 영혼을 죄로부터 다시 속량할 수 있다고 설명하였다.38)
6. 고해성사의 주보 성인
아르스의 성인 요한 마리아 비안네 신부는 고해성사의 주보 성인이다. 본래 성적이 좋지 않아서 신학교 시절에 사정 회의에서 쫓겨날 뻔했던 그는 서품을 받은 후, 아주 피폐된 본당으로 발령을 받았다. 그 곳은 세 가지 병폐로 형편이 없는 시골이었다. 그곳의 신자들은 날마다 만나 맨 먼저 하는 인사말이 저주의 말이었고, 술로 농사 소득은 바닥이 났고, 그나마 남은 재산은 도박으로 날려 버리는 처지였다. 온통 냉담자들로 가득한 본당에 부임한 요한 신부는 예수 성심과 성모 성심께 자신과 본당의 신자 공동체를 봉헌하고, 예수님께 본당 신부가 되어 주시고 자신은 보좌로 힘껏 도와 드리겠다고 하면서 지혜와 용기의 은혜를 청하였다. 하느님은 요한 신부를 통하여 많은 신자들이 회개하게 하시고 그들에게 고해성사의 은혜를 내리셨다. 요한 신부는 죄인들의 괴로운 마음을 읽으면서 그들과 함께 내적 고통을 나누었다. 죄인이 고해 중에 울면서 통회할 때 요한 신부도 함께 울었다. 죽을 때까지 하루의 대부분을 고해소에서 지냈고, 고해성사를 주다가 세상을 떠났다.
밀라노의 주교 성 암브로시오 교부도 고해성사의 주보 성인이다. 그의 별세 후 바울리노가 쓴 [암브로시오의 생애]에는 암브로시오 주교가 성서에서 가르치는 대로 기뻐하는 사람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사람과는 함께 우는 사람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죄인들에게 늘 동정심을 가지고 대하였던 그는 교회의 사목자들에게 좋은 모범이 되었다. “매번 죄를 고백하러 사람들이 그에게 올 때마다 그는 항상 같이 울곤 하였습니다. 그는 죄에 떨어진 사람과 함께 자신이 죄를 지었다고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죄의 고백을 들은 그는 늘 주님만을 신뢰하며 기도해 주곤 하였습니다. 그분은 이와 같이 후대 사제들에게 좋은 표양을 보여 주었습니다. 사제들은 사람들을 책망하고 고발하는 자세보다는 하느님께 그들을 위해서 전구해 주는 자세로 일해야 합니다.”39)
암브로시오 주교는 교회가 자녀인 신자들의 죄를 대신 하여 울어 주는 어머니임을 강조하였다.40) 그는 바리사이파 사람의 집에서 이루어진 예수님과 한 죄녀의 만남(루가 7,36 이하)을 풀이하면서, 바리사이파 사람은 주님의 발 씻을 물을 제공해 드리지 않았지만, 죄녀로 상징되는 교회는 죄를 씻어 주는 물을 가지고 있다고 강조하였다. 바리사이파 사람은 불신앙의 더러움 때문에 물을 가지지 못했다. “교회의 물을 받지 못했던 그가 어떻게 자기 양심을 씻을 수 있었겠습니까? 교회는 물도 눈물도 다 가지고 있습니다. 곧 성세의 물과 통회의 물입니다.”41)
암브로시오는 주님께 죄인들을 가련히 여길 수 있는 마음을 주시기를 청하였다. 다음의 기도는 그의 심정을 잘 묘사해 주고 있다. “주님, 제가 (주교품을 받지 않으려고) 피했음에도 주님은 저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주님, 이 은혜를 지켜 주시옵소서. 저는 제가 주교로 부름을 받는 데 부족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제가 세속에 굴복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은혜로 오늘의 제가 되었습니다. 저는 주교들 중에 가장 미약하고 비천한 사람입니다. 이런 저에게 당신의 거룩한 교회를 위하여 일하라고 하시니, 저를 두려움에서 언제나 보호하여 주소서. 주님은 고아와 같은 저를 사제직에 부르셨습니다. 이제는 제가 사제로서 멸망하는 자가 되지 않도록 지켜 주소서. 무엇보다도 저에게 깊은 마음에서부터 죄인을 측은히 여기도록 깨우침의 은혜를 내려 주소서. 이것이 가장 큰 덕행이옵니다. 죄에 떨어진 사람을 만날 때마다 동정심을 가지도록 도와 주시고, 절대로 교만해져서 야단치지 않게 하시고, 오히려 그와 함께 울며 슬퍼할 줄 알게 하소서. 제가 이웃의 잘못에 대해 울 때, 제 자신의 잘못에 대해 울게 하시고, ‘다말이 나보다 더 의롭구나.’(창세 38,26) 하신 성서 말씀이 제게 적용될 수 있는 마음가짐을 갖고 살도록 도와 주소서.”42)
그러나 암브로시오 주교는 사목 경험으로써 이와 정반대의 자세를 가지고 사는, 이른바 ‘의인 행세’를 하는 사람들도 교회 안에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사람들은 이웃에게 구원의 은혜가 내리는 것을 못마땅히 여긴다. 특히 노바시아노파 사람들이 그러하였다. “그들은 어떤 사람이 지은 죄를 고백하고 오랫동안 눈물을 흘리며 죄 사함을 청해 올 때, 교회에서 그 사람의 죄를 용서해 주는 것을 참지 못하고 아주 못마땅하게 여깁니다.”43) 그는 이런 사람들을 신랄하게 질책하였다. “(죽은 라자로를 주님께서 다시 살리셨을 때) 모든 사람들이 이 큰 은혜에 대하여 또 엄청난 기적을 보고 하느님의 자비를 기리며 기뻐하는 마당에, 화를 내며 그리스도를 잡아 죽이려고 모여 음모를 꾸몄던 이들도 있었으니, 이들은 바로 하느님을 두려워하지 않던 악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더 나아가 라자로까지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당신들 노바시아노파 무리들은 자신들이 바로 그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후계자들이라는 것을 모릅니까? 당신들은 그들의 이단을 물려받은 상속자들입니다. 당신들도 분노하여 교회를 거슬러 모여서는 음모를 꾸미고, 죽었던 사람들이 교회에서 다시 소생하는 것을 보고 또 죄의 용서를 받아 부활하는 것을 보고는 화를 내고 있습니다. 당신들의 악한 마음 같아서는 소생한 사람들을 다시 죽이고 싶을 것입니다.”44)
암브로시오 주교는 신자들에게 죄인들이 용서받는 것을 절대로 질투하지 말라고 진지하게 당부하였다. 그는 또한 노바시아노파 무리를 대항하는 논쟁에서 어떠한 죄도 하느님의 용서를 받을 수 있음을 강조하였다. 이미 나흘 동안이나 무덤 속에서 썩는 냄새까지 풍기던 라자로가 주님의 말씀 한마디로 다시 부활하여 무덤 밖으로 나왔듯이, 죄 속에 묻혀 죽어 있던 사람도 죄를 용서받을 때 다시 살아서 일어난다고 강조하였다.45) 루가복음 15장의 ‘잃었던 아들의 비유’는 주님께서 뉘우치는 죄인에게 죄를 용서해 주시고 내적 평화를 선사하신다는 가르침의 좋은 예이다.46) “주님의 말씀을 들어 볼 때 분명한 것은, 중한 죄인일지라도 죄를 진심으로 뉘우치며 솔직히 고백할 때 하느님의 은혜를 신비롭게 받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당신들 노바시아노파 사람들은 변명할 여지가 없는 것이 확실합니다.”47)
7. 기도서와 성가의 가르침
교회의 오랜 전통에 따라 죄의 용서에 대한 가르침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기도서와 성가 안에 자리를 잡았다. 성무일도 안에는 고해성사와 죄의 용서에 관한 독서 내용들이 풍부하게 들어 있다. 몇 가지 예를 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성무일도 1권> 12월 17일의 독서, 성 대 레오 교황의 편지 가운데 ‘우리 화해의 성사’에 대해 언급한다.
<성무일도 2권> 재의 수요일 독서, 성 클레멘스 1세 교황의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회개하십시오’라는 제목의 가르침을 접한다. 사순 제4주간 수요일의 독서, 성 막시무스 아바스의 편지 가운데 ‘회개하는 이들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이라는 글을 읽을 수 있다. 사순 제5주간 월요일 독서, 성 요한 피셔 주교의 [시편 주해]에서 “누가 죄를 짓더라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를 변호해 주시는 분이 계십니다.”를 보게 된다. 성주간 목요일 독서, 사르데스의 멜리톤 주교의 파스카 강론에서 “희생되신 어린양은 우리를 죽음에서 생명으로 인도하셨습니다.”라는 가르침의 내용을 읽는다.
부활 팔일 축제 주일(부활 제2주일)의 독서, 성 아우구스티노 주교의 강론에서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창조”에 관한 가르침을 만나게 된다(1,4). 부활 제3주간 토요일 독서, 알렉산드리아의 성 치릴로 주교의 [요한 복음 주해]에서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이가 생명을 얻을 수 있도록 당신 몸을 바치셨습니다.”라는 내용을 발견한다. 부활 제4주간 토요일 독서, 성 치릴로 주교의 [로마서 주해]에서 “하느님의 자비가 모든 사람들에게 내려 온 세상은 구원되었습니다.”라는 가르침도 만나게 된다. 부활 제6주간 주일 독서, 성 치릴로 주교의 [고린토 후서 주해]에서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과 화해시키셨고, 또 화해의 직분을 주셨습니다.”라는 진리의 말씀을 듣게 된다.
<성무일도 3권> 연중 제3주간 수요일 독서, 성 베르나르도 아바스의 아가에 대한 강론에서 “죄가 많은 곳에는 은총도 풍성하게 내렸습니다.”라는 강론을 듣는다. 연중 제8주간 화요일 독서, 성 아우구스티노 주교의 [고백록]에서 “주여, 나는 있는 그대로 당신 앞에 드러나 있나이다.”라는 내용의 말씀을 듣고, 연중 8주간 수요일 독서, 성 아우구스티노 주교의 [고백록]에서 “내 바라는 것 당신의 크신 자비뿐이오이다.”라는 가르침을 보게 된다. 연중 제13주간 토요일 독서, 예루살렘의 성 치릴로 주교의 [예비신자 교리]에서 “구원의 때에 회개하십시오.”라는 권고를 듣게 되고, 연중 제13주간 주일의 독서, 성 아우구스티노 주교의 강론에서 “하느님이 받아들이시는 제물은 뉘우치는 마음입니다.”라는 강론을 듣게 된다. 연중 제17주간 월요일의 독서, 아를르의 성 체사리우스 주교의 강론에서 “하느님의 자비와 인간의 자비”에 대한 말씀을 듣는다.
<성무일도 4권> 연중 제19주간 월요일 독서, 키레네의 테오도레투스 주교의 [주님의 육화]에서 “나는 그들의 상처를 고쳐 주겠다.”라는 말씀의 가르침을 읽고, 연중 제19주간 화요일 독서에서 역시 테오도레투스 주교의 “그분은 상처를 입으심으로 우리의 병을 고쳐 주셨습니다.”라는 말씀을 듣게 된다. 연중 제19주간 금요일 독서, 성 파치아누스 주교의 세례에 대한 강론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새 생활을 해 나갑니다.”라는 말씀을, 그리고 같은 주간 토요일 독서에서는 같은 주교의 “주여, 누가 당신 같으리이까? 당신은 죄를 용서해 주시나이다.”라는 말씀을 듣는다.
연중 제20주간 금요일 독서, 성 암브로시오 주교의 [시편 주해]에서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중재자는 한 분뿐인데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라는 가르침을 만나게 되고, 같은 주간 토요일 독서에서 같은 주교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피로써 세상을 하느님과 화해시키셨습니다.”라는 가르침을 듣게 된다. 연중 제21주간 화요일 독서,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의 강론에서 “회개의 다섯 가지 길”에 대한 가르침을 만나게 된다. 연중 제22주간 주일 독서, 성 아우구스티노 주교의 강론에서 “주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라는 말씀을 듣는다(23A,1-4).
연중 제23주간 금요일 독서, 스텔라 수도원의 복자 이사악 아바스의 강론에서 “그리스도께서는 교회 없이 용서해 주시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라는 말씀을 만난다. 연중 제26주간 주일의 독서, 성 폴리카르포 주교 순교자의 필립비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여러분은 은총으로 구원되었습니다.”라는 가르침을 보게 된다. 연중 제27주간 수요일 독서,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 주교 순교자의 트랄리아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주님의 살인 믿음과 그분의 피인 사랑 안에서 새로워지십시오.”라는 권고를 듣는다.
끝으로 연중 제32주간 주일 독서, 2세기 어느 저술가의 강론에서 “그리스도께서는 멸망에 떨어지려 하는 이들을 구원하시기를 원하셨습니다.”라는 글과, 같은 주간 화요일 같은 저자의 “진실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회개”라는 가르침을 만난다. 이처럼 풍부한 용서에 대한 가르침이 기도서 안에 들어 있음은 죄의 용서가 우리 삶에서 얼마나 중요한 요소인지 잘 드러내어 보여 준다.
또한 우리가 사용하는 성가 중에 죄의 용서에 대한 내용을 다루는 은혜로운 곡들이 많이 있다.48) [가톨릭 성가] 479장의 ‘기쁜 날’의 가사는 죄의 용서를 받은 영혼의 기쁨을 노래한다. “주의 말씀 받은 그날 기쁘고도 복되어라. 기쁜 이맘 못 이겨서 온 세계에 전하노라. 이 좋은 날 천한 내 몸 새사람이 되었으니 이 몸과 맘 다 바쳐서 영광의 주 섬기리라. 새사람 된 그날부터 주 나의 것, 나 주의 것. 주만 따라 살아가며 복된 말씀 전하리라. 기쁜 날, 기쁜 날, 주 나의 죄 다 씻은 날!”
8. 대희년의 정신
2000년을 대희년으로 선포하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몸소 용서의 생활을 모범으로 보여 주었다. 자신을 저격한 알리 악사를 감옥으로 찾아가서 용서해 주고 사랑의 승리를 이룩하였다. 이와 같은 모범은 우리 신자들에게 주님의 자비를 체험한 후에 가져야 할 자세를 깨우쳐 준다. 이것이 바로 대희년의 정신이다.
회칙 [자비로우신 하느님]을 통하여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한없이 자비로우신 하느님”(에페 2,4)을 우리에게 계시해 주신 분이 그리스도이시며(1,1), 그리스도께서 알려 주심으로써 우리가 알게 된 하느님은 인간을 위하시는 사랑의 관계 안에 계시는 하느님이시라고 강조하였다(1,2). 예수님께서는 특히 당신의 생활 양식과 행적을 통해서 사랑이 세상에 와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 보여 주셨다. 이 사랑이 자체를 드러내는 모습 또는 영역을 가리켜 성서상의 용어로 “자비”라고 부른다(1,3). 그리스도께서 계시하시는 하느님은 아버지이신 하느님, 사랑이신 하느님(1요한 4,16), 한없이 자비로우신 하느님이시다. “나는 한결같은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여 너에게 변함없는 자비를 베풀었다”(예레 31,3). 하느님의 자비로우신 사랑이 나타나는 계시가 절정을 이룬 곳은 십자가에서이다(5,8).
또한 교황은 1999년 제14차 청소년 주일(5월 30일)을 맞아 발표한 담화문에서 “청소년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평화를 되찾으려면 먼저 하느님과 화해해야 한다.”라고 말씀하시고 청소년들에게 고해성사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교황은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요한 16,27)라는 주제의 이 담화문에서 “우리 시대의 많은 문제점은 사람들이 죄 의식에 무디어지고, 하느님의 용서에 의지하지 않으려고 하는 데 원인이 있다.”라고 규정짓고 고해성사를 통해 아름답고 풍요한 하느님의 은총을 다시 찾으라고 권고했다. 또한 새 천년기의 주역인 청소년들에게 예수님의 학교에서 배우고 익힌 아버지의 사랑을 세상에 증언하는 믿음직한 증거자가 되어 달라고 당부했다.
맺는 말
용서는 세상에 죄보다 더 강한 사랑이 현존한다는 증명이다.49) 복음의 본질이다. 용서는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에서만 아니라 인간들의 관계에서도 화해의 기본 요건이기도 하다. 용서가 배제된 세계는 냉혹한 정의의 세계일 것이며, 거기에서는 인간 개개인이 정의의 이름으로 타인들에 대해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것이다. 갖가지 이기심이 한 집단과 다른 집단 사이에 영구적인 투쟁을 벌이는 격투장으로 변질시킬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이 하느님의 자비를 입고 체험한다고 가르치셨을 뿐만 아니라, 사람은 남에게 '자비를 행하라'는 부름을 받고 있다고도 가르치셨다.50) 교회는 하느님의 자비에 대하여 어떻게 고백하고 대하여야 할까? 우선 하느님의 자비가 구원을 주는 신앙의 진리임을, 신앙과 조화된 삶을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것임을 고백하여야 하고, 선의의 모든 인간 생활에 하느님의 자비를 이끌어 들이고 구체화하고자 노력해야 한다.51) 교회는 왜 하느님의 자비를 고백하고 선포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 교회는 자비를 고백하고 선포할 때 본연의 삶을 사는 것이다. 자비가 창조주와 구세주의 가장 놀라운 속성이기 때문이다.52)
“여인이 자기의 젖먹이를 어찌 잊으랴! 자기가 낳은 아이를 어찌 가엾게 여기지 않으랴! 어미는 혹시 잊을지 몰라도 나는 결코 잊지 아니하리라!”(이사 49,15)
1) Karl Kertelge, “죄의 용서에 관한 신약성서 신학적 고찰”, [신학 전망] 89(1990.6.), 이영헌 옮김, 2-22면 참조. 2) 예를 들면 루가 15장의 잃어 버린 아들의 비유 등. 3)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1편,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976-987항 참조. 4) 위의 책(제2편), 1213항 이하: 특히 고해성사 부분은 1422-1498항 참조. 5)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1편, 976항 참조. 6) 위의 책(제1편), 987항. 7) 마태 9,1-8; 마르 2,1-12; 루가 5,17-26; 7,36-50 참조. 8) 마르 10,45; 루가 22,20; 1요한 1,7 참조. 9) 2고린 5,18-20; 에페 2,16 참조. 10) 사도 5,31; 10,43; 13,38 이하. 11) 마태 12,31-32; 마르 3,28-29; 루가 12,10. 12)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1편, 984항. 13)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1편, 981항. 14) 아우구스티노, [설교집], 214,11. 15)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1편, 982항(372). 16) 암브로시오, [참회론], 1,34. 17) 요한 크리소스토모, [사제직론], 3,5. 18) 아우구스티노, [설교집], 213,8. 19) 마태 5,43-48; 6,12-15; 마르 11,25; 루가 11,4; 18,21-35 참조. 20) 암브로시오,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장례 때 한 설교], 25-26. 21) 위의 저자, [낙원에 대한 강론], 8,41 참조. 22) 위의 저자, [시편 118편 주해서], 21,14 참조. 23) 위의 저자, [엘리야와 단식], 20,75 참조. 24) 위의 저자, [노아의 방주], 3,69; [아브라함], 1, 4, 22 참조. 25) 위의 저자, [아브라함], 2, 9, 65; [요셉], 5, 20 참조. 26) 위의 저자, [시편 118편 주해서], 20,40 참조. 27) 위의 저자, [시편 주해서], 47,17 참조. 28) 위의 저자, [시편 118편 주해서], 20,29 참조. 29) 위의 저자, [루가복음 주해서], 10,89 참조. 30) 아우구스티노, [그리스도교 교양], 제1권 18,17: 교부 문헌 총서 2,79-80. 31) 위의 저자, [요한복음 주해서], 38,7. 32) 오리게네스, [첼수스 논박], 3,71. 33) 요한 크리소스토모, [마태복음 주해서], 22,5. 34) 예로니모, [시편 95편 주해 강론] 참조. 35) 오리게네스, [기도론], 2,15; 아타나시오, [세라피온에게 보낸 편지], 4,8-23; 요한 크리소스토모, [마태복음 주해서] 41,3; 아우구스티노, Enchiridion, 22. 36) 요한 크리소스토모, [마태복음 주해서], 41,4; 치프리아노, [선행과 자선], 1; 아우구스티노, [요한복음 주해서], 124,5; [마체도니우스에게 보낸 편지], 1,15; [레오 강론], 11,6. 37) 암브로시오, [엘리야와 단신] 20,76. 38) 위의 저자, [서간] 1,3. 39) 바울리노, [암브로시오의 생애], 39. 40) 장인산, [복된 사람들:성 암브로시오 교부의 진복팔단 풀이], 성서와 함께, 1992년, 90면 참조. 41) 암브로시오, [기타 서간], 1,12. 42) 위의 저자, [통회], 2, 8, 73. 43) 위의 저자, [루가복음 주해서], 7, 238. 44) 위의 저자, [통회], 2,7, 59. 45) 위의 책, 2, 7, 58. 46) 위의 책, 2, 4, 17. 47) 위의 책, 2, 4, 19. 48) 이기명, [성가 찾아보기] 354,(용서) 참조. 49) 요한 바오로 2세, 회칙 [자비로우신 하느님],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82년, 14항 참조. 50) 위와 같음. 51) 위의 책, 12항 참조. 52) 위의 책, 13항 참조.
[사목, 1999년 7월호, 장인산(대전 가톨릭 대학교 교수 / 신부 / 교부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