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항상 건강하게 사는 것이 아니고 병에 걸려서 고통 당할 때도 있습니다. 몸이 아프면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서 약을 먹거나 병원에서 치료를 받습니다. 신앙생활도 이와 비슷한 형태로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세례성사로써 모든 죄를 용서받고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세례를 받은 이후에도 악으로 이끌리는 경향은 그대로 계속 남아서 또다시 죄를 짓게 되어 영혼의 건강을 해치게 됩니다. 영혼의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지은 죄를 용서받아야 하는데 바로 이를 위해서 고해성사가 있 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잃어버린 아들의 비유''(루가 15,11-32)가 감동적으로 표현해 주듯이 하느님은 인간의 죄를 너그럽게 용서해주시는 분입니다. 예수께서는 이 비유를 통해서 하느님은 집을 떠나서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잘못을 뉘우치고 돌아오는 아들을 너그럽게 받아들이시는 자비로운 아버지와 같은 분이라고 선포하십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는 당신에게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있다"(마르 2,10)고 말씀하셨고 실제로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마르 2,5: 루가 7,48 )고 선언하시면서 사람들의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오늘날 예수께서는 이와 똑같은 용서의 선언을 고해성사 중에 사제를 통해서 우리 각자에게 전해주십니다. 자신을 정직하게 살피는 사람이라면 자신이 참으로 허물이 많고 자주 잘못을 범하며 산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만일 용서가 없다면 누적된 허물과 잘못의 짐을 지고 허덕이면서 힘겹게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용서는 이런 무거운 짐을 벗겨주어 가벼운 마음으로 새 출발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줍니다. 마치 예수께서 간음한 여인에게 죄를 묻지 않겠다고 하시면서 새 출발의 기회를 주셨듯이 말입니다(요한 8,11 참조)
개신교 신자들은 물론 가톨릭 신자들 중에서도 사제에게 죄를 고백하는 것에 거부감을 갖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느님께 죄를 직접 고백하고 용서를 받으면 됐지 왜 인간인 사제에게 죄를 고백해야 하는가?'' 물론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잘못을 고백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제에게 죄를 고백해야 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성령을 받아라. 누구의 죄든지 너희가 용서해주면 그들의 죄는 용서받을 것이고 용서해주지 않으면 용서받지 못한 채 남아 있을 것이다"(요한 20,22-23). 즉 예수께서 당신의 사죄권을 당신 제자들에게 위임해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사도들에게 위임해주신 사죄권은 다시 사도들의 후계자인 주교들과 그의 협력자인 사제들에게 계승됩니다. 물론 예수께서는 ''주님의 기도''에 들어 있는 "저희가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오니"(마태 6,12)라는 표현을 통해서 드러나듯 신자들 서로가 죄를 용서해 주기를 원하십니다. 또한 바오로 사도도 "누가 누구를 탓할 것이 있다해도 서로 참고 서로 은혜로이 용서하시오"(골로 3,13)라고 권고하십니다. 그러나 하느님과 교회의 이름으로 공적으로 죄를 사하는 권한은 교회를 이끌고 대표하는 사도들과 그의 후계자들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톨릭 신자들은 죄를 짓게 되면 사제에게 죄를 고백하고 하느님의 이름으로 용서를 받습니다. 죄의 용서는 사제를 통해서 이루어지지만, 죄를 용서해주시는 분은 물론 하느님이십니다. 사제에게 죄를 고백하는 또 다른 이유는 죄의 특성에 있습니다. 세례를 받음으로써 우리는 하느님의 아들딸로 새롭게 태어나는 동시에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일원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행동은 우리 자신에게서 끝나지 않고 하느님과 교회에 영향을 미칩니다. 우리가 죄를 짓게 되면 하느님의 자녀로서 하느님을 욕되게 하는 것이고, 교회의 일원으로서 교회에 누를 끼치게 됩니다. 그래서 죄를 지은 사람에게는 하느님과의 화해뿐만 아니라 교회와의 화해도 필요한 것입니다. 이런 이중의 화해를 이루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공적으로 대리하는 동시에 교회를 공적으로 대표하는 사제에게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신학적인 이유에서만이 아니라 심리적인 이유에서도 고해성사는 인간에게 진정 도움이 되는 제도입니다. 죄를 짓고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으면 누구에겐가 얘기함으로써 후련함을 느끼게 됩니다. 경찰을 피해서 도망 다니던 살인범이 자수를 해서 모든 것을 다 실토하고 나니까 그제서야 불안에서 해방되어 잠을 제대로 잘 수 있었다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혼자서 가슴속에 묻어두고 괴로워하던 죄를 사제에게 고백하면 내적인 해방감을 얻게 되고 사제의 사죄경을 통해서 자신의 죄가 정말로 용서받았다는 확신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심리학자들 중에는 가톨릭의 고해성사 제도가 심리적으로 아주 훌륭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사제에게 죄를 고백하는 것은 어느 정도 죄를 예방하는 효과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사제에게 죄를 고백함으로써 재차 같은 죄를 짓지 않겠다는 결심을 더욱 굳건히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제는 고해성사를 통해서 알게 된 모든 내용에 대해 절대 비밀을 지킬 의무가 있습니다(교회법 983, 984조 참조). 이것을 고해의 비밀이라고 하는데, 교회 역사를 보면 이를 지키기 위해 사제가 목숨을 바친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신부님이 혹시 나의 죄를 기억하고 나를 꺼려하면 어떻게 하나'' 하는 걱정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첫 째, 자기 죄를 알아내야 합니다. 조용히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갖고 지난번 고해성사를 받은 후에 무슨 죄를 지었는가 찬찬히 알아내야 하는데, 이를 교회용어로 ''성찰''(省察)이라고 합니다. 많은 경우에 십계명에 따라서 자신의 죄를 성찰하기도 합니다 .
둘 째, 자신이 범한 죄에 대해서 진정으로 뉘우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즉 내가 지은 잘못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참된 내가 되는 데에 얼마나 해가 되었는지, 또 다른 사람에게 영신적, 물적으로 어떤 피해를 입혔는지, 그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마음을 얼마나 많이 상해드렸는지 등등을 곰곰히 헤아려 보면서 죄를 아파하는 과정입니다. 이것을 ''통회''(痛悔)라고 하는데, 고해성사에서 가장 본질적인 요소입니다. 왜냐하면 비록 사제에게 죄를 고백하더라도 죄에 대해서 통회하는 마음이 전혀 없다면 그 죄는 용서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통회가 부족하지 않은가 하며 너무 염려할 필요는 없습니다. 최선을 다한 후 나머지는 하느님의 자비하심에 맡기도록 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자신이 지은 죄를 진심으로 뉘우치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다시 죄를 범하지 않겠다고 결심할 것입니다. 이것을 ''정개''(定改)라고 합니다. 요약하면 고해실에 들어가기 전에 준비해야 할 것은 죄를 알아내는 성찰, 뉘우치는 통회, 죄를 범하지 않겠다는 정개입니다.
죄의 성찰과 통회는 어둡고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새사람이 되기 위한 노력입니다. 바꾸어 말해서 자신의 죄와 잘못을 성찰, 통회하면서 자신을 쥐어뜯거나 자학할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배우고 깨달을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은 잘못하고 죄짓는 사람을 너무 쉽게 비난하고 손가락질하지만 살다 보면 자신도 똑같은 잘못과 죄를 범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럴 때 자신이 결코 남보다 잘나지 않았음을 깨닫고 좀 더 겸손해질 수 있을 것입니다. 또 내 자신이 잘못을 범해서 마음이 아팠다면 다른 사람도 자신의 잘못 때문에 괴로워했을 것입니다. 이것을 깨닫게 되면 잘못하는 사람에 대해서 비난을 앞세우기보다는 가능한 한 관대하게 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의 잘못과 죄를 성찰, 통회, 정개하면서 스스로 좀더 겸손해지고 이웃에 대해서 관대해질 수 있다면, 이것이 바로 새사람이 되는 길 아니겠습니까?
우선 자신의 죄를 고백해야 합니다. 어떤 이들은 고해실에서 주로 남의 잘못만을 이야기합니다. ''나는 잘하려고 했는데 다른 이들이 잘못했기에 어쩔 수 없이 죄를 지었다''는 식의 고백은 옳지 않습니다. 또 죄를 짓게 된 상황을 설명하는 것은 좋지만 죄를 극구 변명하려는 것도 옳지 않습니다. 두 경우 다 성찰과 통회가 부족하다고 하겠습니다.
고해실에서는 성찰을 통해서 알아낸 자신의 죄를 모두 고백하면 됩니다. 중대한 죄, 즉 대죄는 반드시 고백해야 하고 가능한 한 그 죄의 종류와 횟수까지 고백하는 것이 좋습니다. 만일 자신의 중대한 죄를 알아내고서도 일부러 숨긴다면 자신이 범한 죄의 중대성을 올바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고 하느님께 불성실한 태도를 취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느님을 거스르는 큰 잘못으로서 모고해(冒告解)라고 합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죄를 다 알고 계시지만 우리 자신이 내적으로 제대로 치유될 수 있도록 죄의 고백을 원하십니다. 환자가 자신의 병을 인정하지 않고 숨긴다면 아무리 훌륭한 의사라도 그를 도울 수 없는 것과 비슷한 이치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미처 알아내지 못한 대죄를 고백하지 못했다고 해서 잘못이 되지는 않습니다. 그런 죄는 다음 고해성사 때에 고백하면 됩니다. 일상적인 잘못, 즉 소죄는 꼭 고백하지 않아도 됩니다. 소죄는 고해성사를 통하지 않고도 사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미사를 시작하면서 하느님께 자비를 구하는 기도를 바치는데, 이때 진심으로 뉘우치고 용서를 빌면 죄의 사함을 받습니다. 또 독서와 복음 말씀을 귀담아 들으면서도 소죄의 사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소죄도 고백하기를 권합니다. 왜냐하면 비록 의무는 아니라고 해도 소죄를 고백함으로써 악으로 흐르는 나쁜 경향과 싸우며 양심을 더 건강하게 닦을 수 있기 때문입 니다. "바늘도둑이 소도둑 된다"는 속담이 말해주듯이 작은 잘못이라고 성찰을 소홀히 하고 경계하지 않으면 나중에 아주 큰 잘못을 범하기 쉽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일상에서 쉽게 범하는 소죄라도 고백하는 것이 좋다는 교회의 권고를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세례 받기 이전에 범한 죄나 한 번 용서받은 죄에 대해서는 다시 고백할 필요가 없습니다. 세례나 고해성사를 통해서 용서받은 과거의 죄를 재차 고백하는 것이 무조건 경건과 열심의 표시는 아닙니다. 하느님은 범한 죄에 대한 통회를 촉구하시지만 그렇다고 죄스러운 과거에 발이 묶이는 것을 원하시지는 않습니다. 이미 용서받은 죄에 마음을 두는 것보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현재를 살고 착한 행실로 미래를 여는 것이 하느님의 뜻에 더 부합하는 것입니다.
죄는 어떤 방식으로든 흔적을 남깁니다. 즉 죄는 죄를 범하는 사람 자신에게 내적으로 상처를 입히고 나약해지게 하며 하느님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에 해를 끼칩니다. 그런데 죄는 용서를 받더라도 이런 죄의 흔적은 사라지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습니 다. 벽에 잘못 박은 못을 빼더라도 못이 박혔던 자국은 남아 있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죄의 결과를 적절한 방법으로 보상하거나 대가를 치러야 하는데. 이 갚음을 ''보속''(補贖)이라고 합니다. 고해사제는 고백자의 개인적인 상황을 참작하고 가능한 한 지은 죄의 경중과 특성을 고려해서 그의 영신적인 이익을 도모하는 방향으로 보속을 줍니다. 보속의 종류는 기도, 자선행위, 이웃을 위한 봉사, 절제, 희생 등입니다. 또한 고백자 자신이 누구보다도 자신의 처지를 잘 알기에 자신에게 바람직한 보속을 자발적으로 정해서 고해사제에게 제안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보속을 하지 않는다고 고해성사가 무효가 된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참회자의 통회와 사제의 사죄경으로 죄의 사함이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죄를 진정 통회한 사람이라면 자신의 죄가 끼친 악영향에 대해서도 충분히 생각해보았을 것이고, 그렇다면 죄의 결과를 보상하기 위해서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하느님께 받은 용서의 은총에 진정 감사하는 사람이라면 보속을 기꺼이 하지 않을까요? 혹시 보속을 실천하기가 너무 어렵다고 한다면 예를 들어서 평일 미사에 참여하기가 거의 불가능한 사람이 평일 미사 참례를 보속으로 받았다면 다음 고해성사에서 사정을 말씀드리고 다른 보속으로 바꿀 수는 있습니다. 이 경우 꼭 먼저번의 고해사제가 아닌 다른 사제라도 무관합니다.
죄는 이웃과의 관계 그리고 하느님과의 관계에 해를 끼칩니다. 예를 들어서 이기심, 무관심, 악의, 비겁함 등의 죄가 이웃사람에게 어떤 나쁜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서는 긴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이렇게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것은 하느님을 거역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인간을 지극히 사랑하시는 분이기에 인간에게 피해를 주는 것은 결국 하느님을 모독하는 죄입니다. 이렇게 죄는 이웃과의 관계, 하느님과의 관계를 파괴하지만 반대로 죄의 용서는 파괴된 관계를 회복시켜줍니다. 죄를 진심으로 뉘우치고 용서를 청하는 사람이라면 바로 자신의 이기심과 욕심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합당하게 살겠다고 결심할 것이고, 그 뜻에 따라 이웃을 사랑하고자 노력할 것입니다. 이렇게 고해성사는 하느님과의 화해, 이웃과의 화해를 이루게 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그래서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문헌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고해성사를 받는 신자들은 하느님께 끼친 모욕에 대한 용서를 자비로우신 하느님께로부터 받으며, 동시에 범죄로 상처를 입혔던 교회, 사랑과 모범과 기도로써 죄인들의 회개를 위해 노력하는 교회와 다시 화해하는 것이다"(교회헌장 11항)
모든 신자는 적어도 일년에 한 번 고해성사를 받고 영성체를 해야 하는데(교회법 989조 참조) 통상적으로 부활시기에 이행하면 됩니다. 그런데 우리 나라에서는 이 시기를 재의 수요일부터 삼위일체 대축일까지로 연장하고 있습니다. 부득이한 사정으로 이 시기에 성사를 받지 못한 신자는 성탄시기나 다른 때에 받으면 됩니다. 그래서 한국 교회에서는 부활시기와 성탄시기에 판공성사를 마련하는 것이 관습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고해성사의 횟수가 ''적어도 일년에 한 번''이라는 의무 조항에 국한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큰 잘못이 있으면 빠른 시일 내에 고해성사를 받는 것이 옳은 일입니다. 또 큰 잘못이 없다고 해도 중요한 시기에, 예를 들어 자신의 생일이나 영명축일을 맞이해서, 혹은 결혼이나 중대한 결정을 앞두고 고해성사로 마음의 준비를 하면서 하느님의 은총을 구한다면 좋지 않을까요?
개별적으로 사제에게 죄를 고백하고 사죄를 받는 것이 중죄의 사함을 받기 위한 정상적인 방식입니다. 그러나 중대한 사유가 있을 경우에는 개별 고해 없이 한꺼번에 여러 참회자들에게 일괄적으로 사죄가 베풀어질 수 있습니다. 교회법에서는 일괄 사죄가 가능한 두 가지의 경우를 제시합니다(교회법 961조 1항).
첫째로 죽을 위험이 임박했는데 한 사제나 여러 사제들이 참회자들의 개별적인 고해를 들을 시간적 여유가 없을 때입니다. 둘째로 침회자들의 수가 너무 많아서 적절한 시간 안에 각자의 개별 고해를 올바로 듣기에는 고해사제의 수가 부족하기 때문에 참회자들이 자기들의 탓 없이 오랫동안 고해성사의 은총을 받을 수 없게 되거나 영성체를 못 하게 될 때도 가능합니다. 그러나 큰 축제나 순례 때 단지 신자들이 많이 모였다는 이유만으로 일괄 사죄를 베풀 수 없습니다. 현재 한국 교회에서는 부활, 성탄 판공이 이에 해당되는 상황이라고 보기 때문에 일괄 사죄가 허락되지 않고 있습니다. 일괄적인 사죄가 베풀어질 수 있기 위해 요구되는 조건에 해당하는 상황인지의 여부는 교구장이 판단합니다. 그리고 일괄 사죄를 유효하게 받기 위해서는 참회자가 합당한 참회를 해야함은 물론이고 당장에 개별적으로 고해할 수 없는 중죄를 적절한 때에 개별적으로 고해하겠다는 결심을 해야만 합니다(교회법 92조 1항)
컴퓨터 통신이나 인터넷, 전화를 이용해서는 고해성사를 받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죄 사함을 받는 것은 아주 중대한 일이고 중대한 일은 본인이 직접 나서는 것이 원칙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서 사랑하는 사람 사이에 사랑을 고백하는 데에 컴퓨터나 전화를 이용한다면 성의가 없다고 하지 않을까요? 직접 만나서 얼굴을 마주하고서 비록 떨리고 더듬거리는 말로라도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는 것이 사랑을 고백 하는 데에 가장 성실한 방법일 것입니다. 그리스도께 죄를 고백하고 그분에게서 용서를 받는 고해성사의 경우도 이와 비슷합니다 .
고해성사는 그리스도와의 참된 인격적인 만남입니다. 그러나 본당에서 판공 때나 주일에 많은 신자들이 제한된 시간 내에 고해 성사를 받아야 하기에 성사가 너무 형식적, 기계적으로 이루어져서 인격적인 만남을 제대로 체험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위험을 피하기 위해서 신부님과 개별적으로 시간 약속을 해서 좀더 여유를 갖고 상담식으로 고해성사를 받는 것도 권장할만 합니다. 자신의 죄를 진심으로 뉘우치고 성실하게 고백하는 신자들은 고해 사제에게 자기 반성의 기회를 주기도 합니다. ''신자들이 저렇게 진지하게 살려고 노력하는데 사제인 나는 과연 얼마나 열심히 살고자 했는가?'' 하고 말입니다. 또한 고해성사를 보기 전에는 자신의 죄의 무게에 눌려 침울한 얼굴을 하고 축 처진 모습이었던 신자들이 죄의 용서를 받고는 날아갈 듯 기쁜 얼굴로 돌아갈 때 사제는 하느님이 주시는 용서의 은총을 생생하게 체험합니다. 사제에게 고해소는 그야말로 은총을 피부로 느끼게 하는 장소입니다. 사제에게 죄를 고백하는 것이 부담스럽게 여겨지는 신자들은 고해성사를 통해서 사제 자신이 배우고 체험하는 바가 적지 않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그 부담이 덜해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