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무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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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9월 17일 월요일

연중 제24주간 월요일    † 성 로베르토 벨라르미노 주교 학자   

[(녹) 연중 제24주간 월요일]

독서기도

하느님, 날 구하소서.
주님, 어서 오사 나를 도우소서.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알렐루야.
찬미가
I. 독서기도를 밤이나 새벽에 드리는 경우 :

지금은 희망하고 기다리는때
복음이 우리에게 알려준대로
천국을 마련하신 우리주님이
우리의 신랑되어 오시리이다

슬기론 동녀들은 등불밝히고
저마다 덕행으로 차비차리어
더없이 기쁜마음 한아름안고
오시는 신랑맞아 마중나가리

미련한 동녀들은 늑장부리니
등불은 기름없어 꺼져버리고
하늘의 궁궐문은 그새잠겨져
애타게 두드려도 열리지않네

우리는 마음의등 밝혀지니고
언제나 준비하고 깨어있다가
마침내 때가되어 오시는주님
앞장서 달려나가 맞아들이세

지극히 인자하신 하늘임금님
영광의 하늘나라 허락하시면
영원한 찬미노래 불러드리며
주님을 무궁토록 기리오리다. 아멘.

II. 독서기도를 낮에 드리는 경우 :

주님은 성인들의 생명이시고
길이요 희망이요 구원이시며
정의와 참된평화 베푸시오니
기쁨의 찬미가를 부르나이다

의인이 하는일과 가진모든것
말이며 소원이며 온갖행위들
뜨거운 사랑으로 불타오르니
주님의 크신능력 드러내시네

비오니 이시대에 평화주시고
신앙을 온전하게 지켜주시며
병자에 빠른회복 죄인엔용서
모두의 복된생명 내려주소서

높으신 아버지와 구세주왕께
영원히 같은찬미 드리나이다
위로자 성령께도 온세상함께
영광과 찬미찬송 읊어드리세. 아멘.
시편기도
후렴1이스라엘의 하느님은 마음이 깨끗한 이를 어여삐 여기시도다.
시편 72(73)
왜 의인이 박해를 받아야만 하는가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사람은 행복하다(마태 11,6).

I

1 하느님은 정녕 바른 이를 어여삐 여기시고 *
마음 깨끗한 이를 어여삐 여기시거늘.

2 내 발은 아슬아슬 헛디뎌지고 *
걸음은 비슬비슬 넘어질 뻔하였으니,

3 어리석은 자들을 시새운 탓이로라 *
악한 자의 잘되는 꼴을 바라보면서.

4 미상불 그들은 아무 고생도 없이 *
몸뚱이는 피둥피둥 살쪄 있도다.

5 인생의 고초를 겪지도 않고 +
남들처럼 고생도 하지 않기에 *
6 교만은 그들의 목걸이요 폭력은 그 입는 옷이로다.

7 그들의 악은 비계에서 스며나고 *
그들의 간계는 마음에서 우러나나니,

8 그들은 코웃음 치며 짓궂게 말하며 *
거만되이 을러대며 억누르려 하도다.

9 하늘을 거슬러 입을 마구 놀리고 *
혀로는 땅을 휩쓸고 있으니,

10 백성들은 그들을 따라가 그 물에 흠뻑 젖어 들어 *
11 “하느님이 아실소냐 지존이 살필소냐” 하도다.

12 보라 그들은 악인이어도 *
몸은 항상 편한 채 재산만 늘어나니.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후렴1이스라엘의 하느님은 마음이 깨끗한 이를 어여삐 여기시도다.
후렴2그들의 웃음이 슬픔으로 바뀌고, 그들의 기쁨이 비탄으로 변하리라.
시편 72(73)
왜 의인이 박해를 받아야만 하는가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사람은 행복하다(마태 11,6).

II

13 그렇다면 내 마음을 깨끗이 지닌 것이 *
죄 없게 손을 씻은 것이 허사였던가.

14 쉴 새 없이 나는 얻어만 맞고 *
날이 새면 받는 것이 책벌일 바에야.

15 내 만일 “그들처럼 말해 볼까” 하였던들 *
당신 자손의 대를 배신할 뻔했나이다.

16 나는 깊이 생각하며 깨치려 해도 *
나에게는 몹시도 힘들어 보였나이다.

17 하느님의 신비 속에 파고 들어가 *
그들의 끝장을 보기까지는,

18 결국 당신은 매끄러운 길로 이끄시어 *
그들이 멸망에 빠져 들게 하시나이다.

19 삽시간에 그들이 거꾸러졌음이여 *
공포에 휘말리어 없어지고 말았나니.

20 주여 잠을 깬 사람이 꿈을 업신여기듯 *
당신은 일어나사 그들의 꼴 모습을 내려다 보시리이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후렴2그들의 웃음이 슬픔으로 바뀌고, 그들의 기쁨이 비탄으로 변하리라.
후렴3당신을 떠나는 자는 망하오리니, 하느님 곁에 있는 것이 내게는 행복이외다.
시편 72(73)
왜 의인이 박해를 받아야만 하는가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사람은 행복하다(마태 11,6).

III

21 내 마음이 쓰라렸을 때 속이 터져 나갔을 때 +
22 나는 아둔하여 못 알아들었나이다 *
짐승처럼 당신 앞에 있었나이다.

23 그러나 나는 항상 당신 곁에 있사오리니 *
당신은 내 손을 붙들어 주시고,

24 나를 이끌어 타이르시고 *
마침내 당신 영광에로 받아들이시리이다.

25 당신 아닌 누구가 하늘에서 날 위해 주오리까 *
당신과 함께 있노라면 즐거울 것 땅에는 없삽나이다.

26 이 몸과 이 마음 다한다 하여도 *
내 마음의 바위 나의 몫은 항상 하느님.

27 보소서 당신을 떠나는 자는 망하오리니 *
당신께 훼절하는 자를 다 멸하시나이다.

28 하느님 곁에 있는 것이 내게는 행복 +
이 몸 둘 곳 주 하느님 *
나는 좋으니 하신 일들 낱낱이 이야기하오리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후렴3당신을 떠나는 자는 망하오리니, 하느님 곁에 있는 것이 내게는 행복이외다.
주여, 당신의 말씀은 내 입에 달고,
꿀보다도 더하게 입맛이 도나이다.
제1독서
예언자 에제키엘서에 의한 독서 2,8-3,11. 16-21
예언자 에제키엘의 소명
그 무렵 주께서 나에게 이런 말씀을 내리셨다. 2,8 “너 사람아, 내가 하는 말을 들어라. 너만은 저 반항하는 일밖에 모르는 족속처럼 나에게 반항하는 자가 되지 말고 입을 벌려 내가 주는 것을 받아먹어라.”

9 내가 바라보니, 한 손이 나에게 뻗쳐 있는데 그 손에는 두루마리 책이 들려 있었다. 10 그분이 그 두루마리를 펴보이시는데 앞뒤에 글이 적혀 있었다. 거기에는 구슬프게 울부짖으며 엮어대는 상여 소리가 기록되어 있었다.

3,1 그것을 보이시고 그분은 “받아먹어라. 너 사람아, 이 두루마리를 먹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가서 이것을 이스라엘 족속에게 일러주어라.” 2 내가 입을 벌리자 그 두루마리를 입에 넣어 주시면서 그분은 3 말씀하셨다. “너 사람아, 내가 주는 이 두루마리를 배부르게 먹어라.” 그리하여 그것을 받아먹으니 마치 꿀처럼 입에 달았다. 4 그분이 말씀하셨다.

“너 사람아, 어서 가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내 말을 전하여라. 5 나는 귀에 익지 않은 말로 떠듬거리는 백성들에게 너를 보내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스라엘 족속에게 너를 보낸다. 6 들어보지 못한 귀에 익지 않은 말로 떠듬거리는 강대국들에게 너를 보내는 것이 아니다. 내가 너를 그들에게 보냈더면, 그들은 네 말을 들었을 것이다. 7 그러나 이스라엘 족속은 아예 내 말을 들을 마음이 없다. 이스라엘 족속은 모두 얼굴에 쇠가죽을 쓴 고집이 센 것들이라, 네 말을 들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8 보아라, 내가 네 얼굴도 그들의 얼굴처럼 두껍게 만들어 주리라. 그리하면 네 얼굴도 쇠가죽을 쓴 그들의 얼굴처럼 낯빛 하나 변하지 않아도 되리라. 9 네 이마를 바윗돌보다 단단한 부싯돌처럼 만들어 주리라. 그것들은 본래 반항하는 일밖에 모르는 족속이다. 그런 자들을 무서워하지 마라.”

10 계속하여 그분은 나에게 말씀하셨다. “너 사람아, 내가 너에게 하는 말을 모두 귀담아듣고 마음에 새겨 두어라. 11 사로잡혀 온 네 동포에게 가서 일러라. 그들이 듣든 말든 너는 ‘주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하며 내 말을 전하여라.”

16 칠 일이 지난 다음에 주께서 나에게 말씀을 내리셨다. 17 “너 사람아,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세운다. 너는 나의 입에서 떨어지는 말을 듣고 나 대신 그들을 깨우쳐주어야 한다. 18 너는 못되게 구는 자들은 죽는다는 나의 선언을 그대로 전하여 깨우쳐 주기만 하면 된다. 못되게 구는 자에게 그 그릇된 길을 떠나 살 길을 찾으라고 일러 주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그는 제 죄로 죽겠지만, 너도 내 앞에서 그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19 그러나 네가 못되게 구는 자를 일깨워 주었는데도 그가 못된 생각과 그릇된 길을 버리고 돌아서지 않는다면, 그는 제 죄로 죽겠고 너는 죽음을 면할 것이다. 20 바로 살던 사람도 그 바른 길을 버리고 그릇된 길에 들어서면, 나는 그 앞에 올무를 놓아 잡으리라. 네가 깨우쳐 주지 않아서 그 때문에 바로 산 보람도 없이 그가 제 죄로 죽게 된다면, 너는 내 앞에서 그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21 그러나 네가 올바로 사는 사람에게 잘못에 빠지지 않도록 일깨워 주어서 그 때문에 그가 잘못에 빠지지 않게 된다면, 그도 깨우침을 받아 살게 되고 너도 죽음을 면하게 될 것이다.”
응송에제 3,17; 2,6a. 8a.; 3,8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세우노라. 너는 나의 입에서 떨어지는 말을 듣고, 나 대신 그들을 깨우쳐 주어야 하는도다. * 그들이 모슨 말을 하더라도 떨지 말고 나에게 반항하는 자가 되지 말라.
보아라, 내가 네 얼굴도 그들의 얼굴처럼 두껍게 만들어 주리니, 네 얼굴도 그들의 얼굴처럼 낯빛 하나 변하지 않아도 되리라.
그들이.
제2독서
성 아우구스티노 주교의 ‘목자들에 대한 강론’에서 (Sermo 46,3-4: CCL 41,530-531)
자기 자신만을 돌보는 목자들
누구에게도 아첨하지 않는 하느님의 말씀이 양 떼를 돌보지 않고 자기 자신만을 돌보는 목자들에게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 보기로 합시다. “너희가 젖이나 짜 먹고 양털을 깎아 옷을 해 입으며 살진 놈을 잡아먹으면서 양을 돌볼 생각은 않는구나. 약한 것은 잘 먹여 힘을 돋구어 주어야 하고 아픈 것은 고쳐 주어야 하며 상처 입은 것은 싸매 주어야 하고 길 잃고 헤매는 것은 찾아 데려와야 할 터인데, 그러지 아니하고 다만 못살게 굴었을 뿐이다. 양들은 목자가 없어서 뿔뿔이 흩어졌다.”

이 말씀에서 양을 돌보지 않고 자기 자신만을 돌보는 목자들이 욕심내는 것이 무엇이고 또 소홀히 하는 것이 무엇인지 기술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욕심내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들은 “젖이나 짜먹고 양털을 깎아 옷을 해 입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는 다음과 같이 질문합니다. “누가 포도밭을 만들어 놓고 그 포도밭에서 열매를 따먹지 않겠습니까? 또 도대체 누가 양을 친다면서 그 젖을 짜 먹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양의 젖이란 하느님의 백성이 자기 지도자들에게 생계를 위해 바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위에 언급한 말씀에서 사도가 이에 대해 말하는 것입니다.

사실 사도는 자기 손으로 벌어 생계를 유지하는 길을 택하고 양의 젖을 짜 먹는 길을 찾지 않았지만, 그래도 주님은 “복음을 전파하는 사람이 그 일로 먹고 살 수 있도록” 제정해 주셨기 때문에 자기가 양의 젖을 짜 먹을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는 자신의 동반자들인 다른 사도들이 수탈해 버린 권리가 아닌 이 정당한 권리를 사용했다고 말합니다. 바오로는 더 나아가 응당히 자기 몫으로 받아야 할 것을 포기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받아야 할 것을 포기했다고 해서 다른 사도들이 받지 말 것을 요구했다는 말은 아닙니다. 바오로는 그 이상을 한 것뿐입니다. 바오로는 상처 입은 사람을 여관으로 데리고 간 그 사마리아인이 한 말을 반영해 주는지도 모릅니다. “비용이 더 들면 돌아오는 길에 갚아 드리겠습니다.”

양들의 젖을 요구하지 않는 목자들에 대해 내가 더 이상 무엇을 말하겠습니까? 그들은 자비의 직분을 수행함에 있어서 더욱 더 너그럽고 환대합니다. 이들 목자들은 그렇게 할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들을 칭송합니다. 그렇다고 다른 목자들을 나무라는 것도 아닙니다. 다른 이들에게서 혜택을 구하지 않았던 사도 자신도자기 양 떼가 메마르고 결실을 맺지 못하는 양 떼가 되지 않고 열매를 맺는 양 떼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응송에제 34,15-16
주 하느님께서 말씀하신다. 내가 몸소 내 양 떼를 기를 것이요 내가 몸소 내 양 떼를 쉬게 하리라. * 헤매는 것은 찾아내고 길 잃은 것은 도로 데려오리라.
아픈 것은 힘나도록 잘 먹여 주고, 기름지고 튼튼한 것은 지켜 주리라.
헤매는.
마침기도
기도합시다
만물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천주여, 우리를 굽어보시어, 우리로 하여금 당신의 자비를 깨닫고 마음을 다하여 당신을 섬기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천주로서 영원히 살아계시며 다스리시는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그 뒤에 특히 공동으로 바칠 때에는 다음의 환호를 덧붙인다.

주님을 찬미합시다.
하느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