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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교구 > 풍수원 성당

성인명, 축일, 성인구분, 신분, 활동지역, 활동연도, 같은이름 목록
간략설명 숨어 신앙을 유지한 산골에 세워진 강원도 첫 번째 성당
지번주소 강원도 횡성군 서원면 유현리 1097 
도로주소 강원도 횡성군 서원면 경강로유현1길 30
전화번호 (033)342-0035
팩스번호 (033)343-5694
홈페이지 http://www.pungsuwon.org
문화정보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69호(성당),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163호(구 사제관)
성지와 사적지 게시판
제목 풍수원 성당을 바라보는 일곱 개의 시선7: 풍수원 성당과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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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20-06-22 조회수176 추천수0

[풍수원 성당 재발견] 풍수원 성당을 바라보는 일곱 개의 시선 (7)

 

 

7. 풍수원 성당과 교육

 

박해가 끝나고, 신앙의 자유가 찾아왔을 때 선교사들과 방인 사제들에게는 교회의 새로운 출발 외에 또 다른 큰 과제가 눈앞에 닥쳐왔다. 그것은 우선 오랜 박해와 정치적 혼란을 겪으며 가난과 억압에 시달린 신자들을 포함한 민중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제시해야 했고, 특히 조선의 멸망과 일제 강점이라는 격동기를 겪는 사회에 신앙적 가르침에 따른 올바른 방향을 찾아 제시해 주어야 했다. 그 방향을 제시하고 희망을 건네주기 위한 교회의 역할은 특별히 교육 사업을 통해 이루어졌다. 당시 새로운 교육 활동은 주로 천주교와 개신교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는데, 개신교의 경우에는 주로 선교를 목적으로 대도시에서 지식인을 대상으로 한 교육 사업에 관심을 가졌고, 천주교의 경우 박해를 피해 깊은 산속에서 살던 신자들과 가난한 민중들을 대상으로 한 한글 교육 등의 문맹 퇴치 교육, 기초적인 교리교육 등이 시급한 과제였다 특히 개신교가 한두 개의 커다란 학교 운영에 치중하였다면 천주교의 경우 본당을 중심으로 학교 설립이 활발하여 1893년 통계에 의하면 천주교에서 운영하는 학교가 36개. 학생 수는 246명이나 되었으며, 1904년에 이르러서는 75개 학교에 693명의 학생으로 그 숫자가 큰 폭으로 증가하였다.

 

풍수원에서도 본당 설립 초기부터 어린아이들에 대한 교육은 큰 관심이었다. 풍수원 초대 신부인 르메르 신부는 1891년~1892년 사목 보고서에서 ‘학교(서당, sye tang)의 상황은 좋지 않으나 희망이 보이는 학생이 있다’며 풍수원 본당에서 관할하는 6곳의 학교와 27명의 학생, 그리고 교사의 이름을 보고하고 있다. 초기에는 학교라는 명칭보다는 서당이라는 명칭이 더 많이 사용되었는데, 그것은 운영 방식이 예전의 서당과 유사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 서당식 학교에서는 주로 한문과 한글 그리고 기도와 교리 등을 가르쳤으며 이 서당식 학교는 본당에 정식 학교가 세워진 이후에도 공소에서는 계속 유지되었다.

 

서당 형태의 학교에 대해 많은 아쉬움을 갖고 있던 정규하 신부는 풍수원에 정식 학교를 세우려고 많은 노력을 하였다. 1908년 12월 28일 뮈텔 주교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학교의 승인 신청서를 학부대신(學部大臣)에게 내보라고 격려해 주시니 깊이 감사 드린다”고 보고한 것을 보면 1908년 무렵에 아마도 풍수원에 학교를 세우고 정식인가를 받으려고 했던 것 같다.

 

그러나 정식 학교를 위한 설립은 뜻대로 된 것 같지는 않다. 1923년의 사목 활동 설문지에는 “서당이라고 불리는 천주교 학교” 항목에는 “신자 교사 2명, 비신자 교사 2명, 학생은 20명”으로 표기했지만 “초등학교라 불리는 천주교 학교”라는 항목에는 아무런 표기도 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정식 학교 설립이 쉽지 않자 정규하 신부는 우선 학생들을 모아 가르칠 <학당>의 설립을 계획하고 1910년 삼위학당(三位學堂)을 설립하고, 새 성당을 짓고 이사한 옛 성당의 건물을 교사로 이용하여 학생들을 모아 교육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교육은 일제 당국의 감시를 받았고, 1918년에는 총독부에서 금지한 책을 학생들에게 가르쳤다는 이유로 수색을 받기도 하였다(증언에 의하면 이 책은 「월남망국사」라고 한다). 이 삼위학당은 1931년에 4년제 성심학원으로 개칭하여 인가를 받아 운영을 이어나갔고 풍수원 3대 주임신부인 감학용(시몬) 신부 당시인 1946년에는 6년제 光東 국민학교로 개칭하여 운영되었다. 1952년에는 광동 중학교도 설립하여 학생들을 교육하고 1954년 1회 졸업생을 배출하기도 하였지만 인가를 받지 못하여 곧 문을 닫고 말았다.

 

이 광동 국민학교에서는 아동들에 대한 기초적인 교육과 교리 교육도 이루어졌으며, 특히 신학교로 진학하기 위한 기초교육을 실시하는 역할도 하였다. 당시 중등과정부터 시작되는 신학교(소신학교)에 진학하기 위한 초등교육이 필수적이었고 광동 국민학교는 어린 소년들에게 신학교 진학에 대한 꿈을 키워주고 준비시키는 구체적인 발판이 되기도 하였던 것이다. 풍수원 성당에서 사제가 많이 배출된 것은 이러한 준비과정을 두었기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후 광동 국민학교는 농촌인구의 감소 등으로 학생 수가 크게 줄어 운영에 어려움을 겪다가 1972년 국가로 이관되어 공립학교로 운영되다가 결국 1997년에 폐교되었다. 이 학교에서는 1971년 공립학교로 전환되기 전까지 모두 23회에 걸쳐 약 300여 명의 학생이 졸업하였다.

 

풍수원에서 운영된 공소의 서당과 삼위 학당과 광동 국민학교의 역사는 길지 않았지만 그 역할은 남달랐고 그 의미도 컸다. 모진 박해 속에 신앙을 지켜온 신자들의 자녀들이 더 깊은 신앙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기도와 교육을 가르쳤고, 나라를 빼앗긴 민중들에게 독립의 의지를 심어주기도 하였다. 또 사제 양성을 위한 준비 역할도 담당하였다. 원주교구에서는 그러한 교육의 정신을 이어나가기 위해 1967년 진광학원을 설립하여 지금껏 운영해오고 있다.

 

[2020년 6월 21일 연중 제12주일 원주주보 들빛 3면, 원주교구 문화영성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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