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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 되재 성당

성인명, 축일, 성인구분, 신분, 활동지역, 활동연도, 같은이름 목록
간략설명 복원된 한수 이남 첫 성당이자 최초의 한옥성당
지번주소 전라북도 완주군 화산면 승치리 729-1 
도로주소 전라북도 완주군 화산면 승치로 477
전화번호 (063)263-5320
팩스번호 (063)261-5171
홈페이지
전자메일 gosan4520@hanmail.net
관련기관 고산 성당    (063)262-4171
관련주소 전라북도 완주군 고산면 읍내7길 20
문화정보 전라북도 기념물 제119호
성지와 사적지 게시판
제목 신앙의 땅: 전주교구 되재성당 - 박해 피난처 교우촌에 세워진 한옥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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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20-08-02 조회수563 추천수1

[신앙의 땅] 전주교구 되재성당


박해 피난처 교우촌에 세워진 한옥 성당

 

 

되재성당 전경.

 

 

전주교구 되재성당은 1895년 한국 천주교회에서 서울 약현성당에 이어 두 번째로 완공된 성당으로 한강 이남에서는 최초의 한옥 성당으로 문화재(전라북도의 기념물 제119호)로 지정된 후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1950년 한국전쟁 때 성당건물은 전소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 1954년 공소건물을 세웠는데 바실리카 형식의 종탑과 독특한 구조의 성당이다. 2009년 원형으로 다시 복원되었다.완주군 화산면 승치리에 위치한 되재성당은 경천저수지를 지나 꼬불꼬불 산속 깊은 마을에 있는 아름다운 한옥 성당이다. 종탑을 보니 지금은 울릴 수 없지만, 삼종기도 때마다 울릴 수 있던 종소리에 일손을 멈추고 기도하는 옛 신자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였다.

 

성당 안으로 들어가 보니 액자 속 흑백사진에서 기와 목조 건물로 처음 지어진 성당 사진과 역대 신부님들의 사진을 볼 수 있었다. 사제가 신자를 등지고 미사를 드리도록 벽에 붙은 제대에는 열쇠를 들고 있는 베드로 목상과 칼을 들고 있는 바오로 목상이 있다.

 

성당내부 왼쪽(좌),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목상이 있는 옛 제대(중), 종탑 내부(우).

 

 

내부 중앙은 칸막이가 있어 왼쪽은 남자, 오른쪽은 여자가 이용하며 앞쪽 문부터 노인, 장년, 어린이가 신을 벗고 출입할 수 있도록 마루로 되어 있다.

 

고산지역은 깊은 산과 골짜기가 많아 1866년 박해를 피해 신앙의 선조들이 피난처로 은둔하며 살던 교우촌이다. 1891년 프랑스 우도 신부가 담당 신부로 파견되면서 교회가 탄생한다. 우도 신부는 40여 개의 교우촌을 바탕으로 백석에 본당을 설립하였다. 그 후임인 비에모 신부는 되재로 본당을 이전하고 성전을 신축하게 된다. 되재 공동체는 1896년 ‘성령강림 대축일’에 새 성전에서 첫 미사를 봉헌했다.

 

성당터에서 발굴된 십자가.

 

 

프랑스 선교사 비에모 신부는 1894년 4월부터 완주를 중심으로 복음을 전하면서 성당을 설립했다. 프랑스 은행에서 대출을 받아 건축공사를 하여 1895년에 완공했다. 비에모 신부의 기록을 보면 주일 미사에 400명의 신자들이 모였다고 했다.

 

되재성당은 1896년 11월1일 뮈텔주교에 의해 축성되었다. 뮈텔주교의 전라도 교회 방문은 전라도 교회가 생긴 이래 주교의 공식방문으로는 처음이었다.

 

뮈텔 주교는(1854-1933)는 주교 임명의 소식을 접한 날(1890. 8. 4)부터 죽음을 앞둔 며칠 전(1932. 12. 31)까지 매일 일기를 써서 교구장으로 수행한 일들을 기록으로 남겼을 뿐만 아니라, 주고받은 편지와 각종 문서 등을 체계적으로 정리해 놓아 오늘날 ‘뮈텔문서’라는 자료가 탄생하였는데, 이 자료들은 각 지역 교회사는 물론이고 한국천주교회사를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자료가 된다. 뮈텔 주교는 되재성당 사목 방문 시 성당과 마을을 묘사한 글과 스케치를 남겨 사라진 옛 성당건축의 규모와 구조, 형태를 역사 보존하는데 도움이 되고 있다.

 

 

고산지역에서 사목하다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한 두 선교사의 묘소

 

성당 뒷산 중턱에는 고산지역에서 사목하다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한 파리 외방선교회 선교사 두 분의 묘소가 있다.

 

조스 신부(1851~1886)는 1851년 10월19일 프랑스의 브와소에서 신앙심 싶은 목수의 아들로 태어났고 1875년 사제 서품을 받았다. 1880년 파리외방전교회에서 교육을 받은 뒤 1983년 10월1일 서울에 왔다. 조스 신부는 부엉골과 여러 공소를 순회하며 사목하다가 1884년 9월에 쇠약한 몸에 장티푸스까지 겹쳐 안대동공소에서 판공성사를 주는 중에 선종했다. 그의 나이 만 35세였다. 그 후 비에모 신부가 1896년 10월 라루르카드 신부의 유해와 함께 이곳으로 이장해 모셨다.

 

- 스 신부 묘(좌), 라프르카드 신부 묘(우).

 

 

라푸르카드 신부(1860~1888) 1860년 11월4일 프랑스 우르퀴에서 출생하였다. 1883년 2월19일 파리외방전교회에 입회하여 1886년 9월26일 사제 서품을 받고 1887년 1월 서울에 도착해 그해 봄 고산 얼음골에 부임하였으며, 1988년 2월에 빼제(수티)에 부임하였다. 신부는 한 해 동안 34개의 공소를 방문하여 1770명에게 고해성사를 주고 성인 52명에게 세례성사를 주는 등 매우 적극적인 전교 활동을 했다. 그러나 공소 순방 중 과로와 힘든 생활로 차츰 건강이 나빠져 결국 병으로 눕게 되었다. 나중에는 장티푸스까지 겹쳐 많은 고생을 했다. 되재성당에서 홀로 임종을 준비하던 중 1888년 7월10일 이곳을 방문한 베르모렐 신부와 동료 신부로부터 병자성사를 받고 만 28세 나이로 선종했다.

 

지금은 아름다운 산과 파란 하늘을 볼 수 있지만 첩첩 산 중에 나무로 가려져 하늘도 보이지 않아 캄캄하고 거친 땅에서 얼마나 고생을 하셨을까? 두 분 신부님의 삶과 선교에 관련된 자료와 뮈텔 주교의 문서는 우리나라 신앙의 선조들의 자료로 한국 교회사의 큰 역사적 보물이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20년 8월호, 이진주 마리안나(전주 Re. 명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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