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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경환 프란치스코(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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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명 최경환 프란치스코 (崔京煥 Francis)
축일 9월 20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회장, 순교자
활동지역 한국(Korea)
활동연도 1805-1839년
같은이름 방지거, 최 프란치스코, 최프란치스코, 프란체스꼬, 프란체스꾸스, 프란체스코, 프란체스쿠스, 프란치스꼬, 프란치스꾸스, 프란치스쿠스, 프랜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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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최양업 신부님 탄생 200주년 기념: 최양업 신부의 부친 성 최경환 프란치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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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21-06-12 조회수158 추천수0

[최양업 신부님 탄생 200주년 기념] 1. 최양업 신부의 부친 성 최경환(프란치스코)

 

 

최양업 신부님은 스승 르그레즈와 신부님에게 보낸 1851년 10월 15일자 서한에서 부모님의 순교 행적을 보고하였고, 박해 후 『기해병오박해순교자증언록』에 나타난 신자들의 증언을 통해서 성인의 삶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성인은 천성적으로 진정한 신앙의 실천자이며 정직과 순박을 애호하면서도 강력한 성품을 타고났습니다. 1801년 박해 후 가산의 부유함과 친척들의 번성으로 가족들이 냉담하게 되자, 1827년경 고향과 친척과 재산 등을 떠나 서울 낙동(駱洞, 현 회현동 2가 일대)에 거처하다가 다시 이곳을 떠나 여러 산골로 이사를 다녔습니다. 과거에는 부자였으나 그리스도를 위하여 자진하여 가시덤불과 돌 자갈밭을 개간하는 등 극도의 궁핍과 재난을 기쁘게 받아들였고, 자주 깊이 묵상하고 신심 독서를 함으로써 열렬한 애덕과 하느님 신비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얻었습니다.

 

성인은 세상 이야기는 도무지 듣기를 싫어하여 고개를 숙이고, 교리 이야기를 하면 즐거운 마음과 기쁜 빛이 드러났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성인들의 모범을 더욱 철저하게 따르는 것을 유일한 희망으로 삼고 만족해 하며 살았습니다. 얼마나 꾸밈없이 순박하게 그리고 몸짓을 해 가면서 말하는지, 듣는 사람은 누구나 탄복했고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그의 열정은 이웃에 대한 애틋한 동정심과 결합되어 있었습니다. 즉 과일을 추수할 때면 가장 좋은 것을 골라 가난한 이웃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물건을 살 때면 항상 제일 나쁜 것이나 흠 있는 것을 골랐습니다. “왜 그러냐?”라고 나무라자, “제일 나쁜 물건을 사는 사람이 반드시 있어야 하지 않겠소? 그런 사람이 없으면 이 불쌍한 장사꾼들은 어떻게 살아갈 수 있단 말이오”라고 하였습니다.

 

홍주에 있던 땅을 팔아 돈을 마련해 돌아오는 길에 빚을 갚지 못한 이웃 사람이 돈을 꿔 준 사람에게 봉변을 당하는 것을 보자, 기꺼이 돈을 내주어 그의 빚을 갚아주었습니다. 체포하러 온 포졸에게 아침밥을 지어 대접하고 남루한 차림의 포졸에게 옷을 내어 주자, 그들은 “이 사람과 이 가족이야말로 진짜 천주학쟁이”라고 하였습니다. 수리산 교우촌 40여 명이 포도청으로 끌려갈 때, “형제들이여, 힘을 냅시다. 이 정도의 여행을 힘겨운 고난으로 여기지 맙시다. 주님의 천사가 황금으로 만든 자를 갖고 우리의 발걸음을 재고 계십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앞장서서 십자가를 지고 갈바리아 산으로 올라가시는 것을 생각합시다.”라고 격려하였습니다.

 

포도청 감옥에 갇혔을 때, 옥살이하던 도둑이 형벌로 상한 데를 발로 찼으나, 성인은 아프다는 말 한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신자들에게 “최경환 프란치스코는 참으로 성교(聖敎)하는 사람이라, 너희도 성교를 하려거든 프란치스코 같이 하라.”고 하였습니다. 포도대장이 예수님을 배반하라고 하자, “밥을 먹지 말라 하면 극히 어려운 일이라 하나, 혹 가히 좇으려니와 배주(背主)는 만만코 못하겠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포졸도 “최경환은 신통하다. 형벌 받을 때는 죽은 사람 같다가도 책을 보거나 교리를 말할 때에는 상처 아픈 생각도 없고, 죽기 무서운 마음도 없이 즐거운 빛만 드러난다.”라고 하였습니다. 안타깝게도 함께 갇혔던 교우들이 치도곤 10대를 맞고 배교하였습니다. 성인은 “수리산 모든 교우가 이렇게 다 배주하니 참혹하지 아니하냐?”라고 하면서, 아무말 없이 머리를 숙이고 묵묵히 앉아 오래도록 슬퍼하였습니다.

 

성인은 치도곤을 맞고 그 후유증으로 옥사하게 되었는데, “내가 예수님의 표양을 따라 사형장으로 나가 칼 아래 죽자 하였더니, 옥에서 죽게 되니 막비주명(莫非主命, 주님의 명령이 아님이 없음)이라.”고 하시면서 1839년 9월 12일 순교하였습니다.

 

[2021년 6월 13일 연중 제11주일 원주주보 들빛 3면, 여진천 폰시아노 신부(수원가톨릭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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