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베르나르디누스(Bernardinus, 또는 베르나르디노)는 1380년 9월 8일 이탈리아 시에나 근방 마사 마리티마(Massa Marittima)에서 정치가였던 아버지 톨로 델리 알비체스키(Tollo degli Albizzeschi)와 어머니 네라 델리 아베두티(Nera degli Avveduti)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3세 때 어머니를 여의고 다시 3년 뒤 아버지마저 여의고 고아가 되어 친척에게 맡겨져 양육되었다. 1391부터 1397년까지 시에나에서 인문학과 철학을 공부한 후 그곳 대학에서 3년간 교회법을 배운 그는 라틴어 고전뿐만 아니라 성경과 신학에도 심취하였고 신심의 실천에도 열의를 보였다. 1400년 흑사병으로 온 나라가 공포의 도가니에 빠졌을 때, 그는 약 4개월 동안 시에나의 산타 마리아 델라 스칼라(Santa Maria della Scala) 병원에서 흑사병 환자들을 돌보다가 병에 걸리기도 하였다. 1402년 작은 형제회에 입회한 그는 이듬해 9월 8일 시에나 외곽 콜룸바이오(Columbaio)에 있는 수도원에서 서원을 하고, 1404년 사제품을 받았다. 그리고 이듬해 처음으로 세지아노(Seggiano)에서 설교를 시작한 이래 죽기까지 설교 활동을 계속하였다. 성 베르나르디노는 1408년부터 다음 해까지 페라라(Ferrara)에서, 1410년에는 시에나와 파비아(Pavia)에서 설교했는데, 이 시기에 그는 예수 성명(聖名)에 대한 설교를 시작함으로써 롬바르디아(Lombardia) 지역의 복음화에 이바지하였다. 1417년부터 그는 밀라노(Milano)에서 대중 설교가로서 활동하면서 뛰어난 웅변술과 정열적인 설교로 청중들을 사로잡았다. 그는 걸어서 이탈리아 중부와 북부 지방을 순회하며 정열적으로 설교하였는데, 그의 주된 설교 주제는 예수 성명에 대한 공경과 참회와 사랑의 실천에 관한 것이었다. 그는 특별히 도박, 고리대금업, 마술, 미신 등을 공개적으로 비난하는 한편 이탈리아 도시 국가들의 정치적 권력 투쟁을 그 시대의 근본적인 악이라고 강하게 비판하였다. 대중에 대한 그의 설교가 성공적이었던 것은 그의 거룩한 생활 때문이었다. 그는 아시시(Assisi)의 성 프란치스코(Franciscus, 10월 4일)의 모범을 본받고자 노력했고, 수도회의 회칙을 충실히 준수하며 도덕적 회개와 삶의 개선을 촉구했다. 그럼으로써 이탈리아 전역에서 많은 개종자와 냉담자들을 교회로 인도하였다. 그는 특별히 예수 성명(Jesu Nomen Sanctum)의 신심을 전파했는데, 이 신심은 교회에서 새로운 것은 아니었으나 사람들이 그 신심의 깊은 신학적 기초를 깨닫도록 그리스어 예수(ΙΗΣΟΥΣ)의 첫 세 글자를 로마자로 표시한 ‘IHS’를 고안하였다. 그가 만들어 낸 이 모노그람마(Monogramma)는 ‘이 표징 안에서’(in hoc signo), 즉 ‘그리스도의 십자가 표징으로’ 혹은 ‘인간의 구원자 예수’(Iesus Hominum Salvator)라는 뜻을 지닌다. 그는 빛나는 태양의 중앙에 이 글자를 새긴 문장(紋章)을 사용하여 설교를 마무리할 때마다 공경 예절을 거행했다. 그는 이 문장으로 어떤 미신적인 상징이나 특정 파벌의 훈장 등을 대체할 수 있기를 희망했다. 그는 예수의 성명을 성경의 요약이요 일치의 상징으로 생각하였다. 그 후 성 베르나르디노와 그의 제자들의 사도직을 통해서 예수 성명에 대한 공경은 널리 확산하였고, 이 문장은 교회와 가정, 공적인 건물 등에서도 사용되게 되었다. 반면에 당시 일부 인문주의자들과 신학자들은 이러한 그의 활동을 불신하고, 그러한 신심과 기도를 위험한 혁신으로 간주하였다. 그래서 1424년 볼로냐(Bologna) 대학에서 예수 성명 신심에 대한 공식적인 반박이 시작되었다. 무려 8년 동안 그는 교도권과 신학계로부터 숱한 고발과 논쟁의 대상이 되었지만 1432년 1월 7일 교황 에우제니오 4세(Eugenius IV)의 칙서 “아포스톨리캐 세디스”(Apostolicae Sedis)를 통해 논쟁의 종지부를 찍고 그의 활동이 정식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그는 마르티노 5세(Martinus V) 교황으로부터 시에나의 주교로 임명받았지만 이를 거절하고 설교 활동에 전념하였다. 또한 1430년부터 12년 동안 프란치스코회 엄률회의 총대리로 활동하면서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더 엄격한 규칙을 회복하자는 수도회 내부의 개혁 운동에서 지도자로 활약하였다. 그리고 1439년에는 피렌체(Firenze) 공의회에 참석하여 그리스 정교회와의 일치를 위해서도 노력하였다. 1444년 고향에서 설교를 마친 성 베르나르디노는 고령으로 쇠약한 몸에도 불구하고 나폴리(Napoli) 왕국을 복음화하기 위해 출발했다. 그러나 아브르초(Abruzzo)의 라퀼라(L’Aquila) 부근에서 열병에 걸려 라퀼라의 작은 형제회 수도원에 머무르다가 5월 20일 선종하여 그곳 성당에 묻혔다. 그 뒤 그의 무덤에서 많은 기적이 일어나자 교황 에우제니오 4세는 시성을 위한 조사를 시작했고, 1450년 5월 24일 교황 니콜라오 5세(Nicolaus V)에 의해 사후 6년 만에 성인품에 올랐다. 그리고 그의 유해를 모시기 위해 1454~1472년 사이에 라퀼라에 성 베르나르디노 대성당이 건립되었다. 성 베르나르디노는 예수 성명 신심을 확산시킨 것 외에도 높은 성덕으로 프란치스코 수도회를 개혁하고 그리스도교의 설교 형식과 내용을 쇄신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교회 미술에서 성 베르나르디노는 주로 사방으로 빛이 퍼져나가는 태양 한가운데 ‘I.H.S’가 새겨진 명판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그 외에도 그의 발밑에 세 개의 주교관(主敎冠)을 그려 넣기도 하는데, 이는 그가 거부했던 세 곳(시에나, 페라라, 우르비노)의 주교직을 의미한다. 그는 설교가, 광고업자, 홍보 담당자의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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