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불프람은 7세기 중엽 프랑스 중북부 일드프랑스(Ile-de-France) 지역의 퐁텐블로(Fontainebleau) 근처 밀리라포레(Milly-la-Foret)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프랑크 왕국의 다고베르트 1세(Dagobert I) 왕 아래에서 근무하던 군 장교이자 궁정 관리의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좋은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일찍이 사제가 될 꿈을 안고 궁정을 떠나 사제품을 받은 그는 은수자의 삶을 살고 싶었으나 프랑크 왕국 서부인 네우스트리아(Neustria)를 다스리는 테우데리크 3세(Theuderic III, 675~691년 재위)의 눈에 들어 궁정으로 불려갔다. 그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 궁정을 떠나 자신의 소유한 모든 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고 물려받은 땅을 퐁트넬(Fontenelle) 수도원에 기증하였다. 성 불프람은 682년경 또는 690년경 상스의 대주교로 임명되었다고 한다. 자료에 따라 그의 주교 임명 연도와 재임 기간이 다르고 그의 전임자 또한 혼동하기도 했지만, 그는 여러 이유로 2~3년 만에 자신의 교구에서 물러나야 할 입장에 놓였다. 성 불프람은 직책에 연연하지 않고 노르망디(Normandie)의 퐁트넬 수도원으로 들어가 베네딕토회 수도승이 되었다. 그리고 그 기회에 프리슬란트(Friesland)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로 결심을 굳힌 그는 퐁트넬 수도원 출신 수도승 몇 명과 다른 선교사 일행과 함께 해로를 통해 프리슬란트에 상륙하였다. 그리고 이미 그 지역에서 활발한 선교활동을 펼치던 성 빌리브로르도(Willibrordus, 11월 7일)를 찾아 그의 도움을 받아 선교 사업을 수행했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그는 프리슬란트의 왕인 라드보드(Radbod)의 궁정이 있던 오늘날 네덜란드의 메뎀브리크(Medemblik) 근처에서 주로 활동하였다. 그는 국왕의 아들을 포함해 많은 프리슬란트인(Frisians)에게 세례를 베풀고 이교도의 신에게 아이들을 희생 제물로 바치는 관습에 맞서 성공적으로 싸웠다고 한다. 하지만 국왕을 개종시키는 데는 실패한 후 노년에 퐁트넬 수도원으로 돌아와 단순한 수도승으로 살다가 700년경 3월 20일 선종하여 수도원에 묻혔다. 그의 유해는 1058년에 퐁트넬 수도원의 생 방드리유(Saint-Wandrille) 성당으로 옮겨 모셨다. 어린아이들의 보호자로 공경받는 성 불프람은 성 불프람누스(Wulframnus, Vulframnus, 또는 불프람노), 성 불프란누스(Wulfrannus, Vulfrannus, 또는 불프란노), 성 불프란(Wulfran, Vulphran) 등으로도 불린다. 옛 “로마 순교록”은 3월 20일 목록에서 퐁트넬 수도원에 상스의 주교였던 성 불프란(Wulfran)이 있었는데, 그는 교구장 직책을 사임하고 기적을 행한 뒤 이 세상을 떠났다고 전해주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같은 날 목록에서 프랑스에 속한 네우스트리아의 퐁트넬 수도원에 처음에는 수도승이었다가 나중에 상스의 주교가 된 성 불프람노가 들어왔는데, 그는 프리슬란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는데 헌신하다가 퐁트넬 수도원으로 돌아와 평화롭게 선종했다고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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