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손자선 토마스는 충청도 덕산군 홍주면 신리 마을 거더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3대째 천주교를 믿는 열심한 신앙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형과 아버지는 1868년에 순교하였고, 그의 당숙 손 니콜라우스(Nicolaus)도 순교하였다. 본래 부지런하면서도 성품이 침착한 그는 나무랄 데 없이 신심이 두텁고 명성이 높았으며, 자기 부인과 함께 아침기도와 저녁기도를 한 번도 거르는 일이 없을 만큼 열심한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는 오랫동안 내포 지방을 중심으로 전교했고, 순교 자료를 모아 성직자들에게 전하였으며, 그의 집에서 모든 공소 예절을 하였다. 1866년 드디어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포졸들이 손 토마스가 살고 있는 거더리 마을에 들어와 신자 집을 샅샅이 뒤져 많은 물건을 빼앗아 가면서, “손씨 집안에서 누구든 사람을 보내 몰수된 물건을 찾아가라”는 편지를 보냈다. 이 편지를 받고 용감한 손 토마스가 자진하여 덕산 관가에 나가서 찾아온 사유를 밝혔다. 이 때 원님이 그에게 천주교인인지 묻자, 그는 자기가 천주교 신자임을 밝혀 그 자리에서 체포되었다. 관가에서 갖은 고문으로 그의 의지를 꺾으려고 애썼으나 모두 허사였고, 곤장을 치다 못해 다리를 묶어 거꾸로 매달았다. 그리고는 토마스의 입에 여러 가지 쓰레기를 쏟아 부으면서 그때마다 “야, 좋지” 하고 놀려댔다. 손 토마스가 “좋습니다.”라고 응수하자 “그래 무엇이 좋단 말이냐?” 하고 되물었다. 이때 손 토마스는 “나는 오늘까지 며칠을 두고 세수를 못했었는데 여러분들이 내 얼굴을 씻어 주고 있으니 어찌 좋은 일이 아니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피를 흘리게 한 죄인에게는 이같이 좋은 일이 없으며, 또한 목이 몹시 탔었는데 쓸개와 식초 대신 이런 것들을 내 입에 넣어주니 나는 마치 내가 범한 죄들을 마셔버리는 듯해서 무척 즐겁소.” 하고 대답하였다. 그 후 덕산 원님은 손 토마스를 해미로 압송하였고 해미에서는 더 심한 형벌이 가해졌다. 두 무릎 사이에 몽둥이를 끼워 양쪽에서 틀자 살이 터지고 뼈가 부러졌다. 이 참혹한 형벌에도 태연히 버티는 그의 모습이 더욱 가증스러워 더 고생을 시키기 위해서 공주로 압송하였다. 공주에서 원님은 특수한 수단을 생각하여 “네가 배교하지 않는다는 증표로써 이빨로 너의 손 살점을 물어뜯어 보아라.”고 하자,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자기 이빨로 손등을 물어뜯어 피가 흐르게 하였다. 관헌은 배교한다는 고백을 받기 위해 세 번씩이나 곤장을 쳤으나 그는 변함이 없었다. 결국 성 손자선은 1866년 부활 전날인 3월 31일 공주 감영에서 교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그는 1968년 10월 6일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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