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녀 김유리대 율리에타(Julietta)는 시골 태생인데, 페레올 주교로부터 굵직한 신자라는 별명을 받은 부모로부터 태어났다. 그 후 가족은 서울로 이사해서 살았는데 율리에타가 17세 되던 해에 부모들이 딸을 출가시키려 하였으나 동정 지키기를 원하는 그녀는 혼인을 거절하고, 자신의 결심이 견고함을 증명하기 위해 머리카락을 전부 뽑아버려 머리 밑이 드러났다. 이리하여 양친은 하는 수 없이 혼인을 연기하고 머리털이 자라나면 그때 다시 의논하기로 하였다. 이러던 중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김씨 집안은 고향으로 피신하였으나 율리에타는 집을 몰래 빠져 나와 왕궁의 나인으로 뽑혀 들어갔다. 10년 동안 궁중생활을 하면서 율리에타는 천주교 계명을 잘 지킬 수가 없자, 마침내는 병을 핑계로 궁에서 나와 어떤 신자 집에 더부살이를 하며 부지런히 길쌈하여 약간의 돈을 모아 가지고 작은 집 한 채를 사서 혼자 살았다고 한다. 그녀는 성격이 강직하고 의지가 굳었으며, 그녀의 언행은 엄격하여 신자들로 하여금 존경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일으키게 하였다. 그리고 다른 신자들과의 접촉은 거의 없이 기도와 묵상에 전심하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율리에타는 차라리 죽을지언정 아무 죄도 짓지 않을 여인이다.”고 말하였다고 한다. 기해년 박해가 일어나자 율리에타는 집에서 체포되어 처음에는 포청에서 다음에는 형조에서 몹시 고문을 당했으나, 그녀의 용기는 조금도 꺾이지 않았다. 관헌들이 그녀에게 “배교하고 교인들이 숨어 있는 곳을 밝히고 네 책이 어디에 있는지 말하라. 그렇지 않으면 모진 형벌을 당하리라.”고 윽박지르자 그녀는 “매를 맞아 죽는 한이 있더라도 내 천주를 배반할 수는 없습니다. 만약에 어떤 사람을 고발하면 그 사람에게 사형을 내리실 것이요, 책을 갖다 바치면 태워버리실 것이니 입을 열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니 나는 죽는 길밖에는 없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근 2개월 동안 참고 인내하던 율리에타는 마침내 사형선고를 받으니 그 죄목은 사학 서적을 읽고 전파하였으며 사도에 빠졌다는 것이었다. 9월 26일에 56세의 나이로 서소문 밖에서 순교의 영광을 차지하였다. 그녀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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