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아가토 교황은 시칠리아(Sicilia) 출신으로 그리스계 부모에게서 태어나 수도승이 된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라틴어뿐만 아니라 그리스어에도 능통했고, 수도원장으로 봉사하다가 로마 교회의 재정 담당자로도 일했다고 한다. 그는 678년 6월 27일 교황 도노(Donus)를 계승하는 새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전승에 따르면 그가 교황이 되었을 때 이미 100세가 넘었었다고 한다. 3년이 채 안 되는 짧은 재임 중에 그는 그리스도 단의론(單意論) 이단을 단죄하고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 사이에 화합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이는 그의 재임 중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680년 11월 7일부터 681년 9월 16일까지 열린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 공의회에서 이루어진 일이다. 콘스탄티누스 4세 황제(668~685년 재위)는 그리스도 단의설에 대해 논의하고 교회 일치를 복원하기 위한 회의를 제안하는 서한을 교황 도노에게 보냈는데, 그 서한이 도착하기도 전에 교황이 선종해 새 교황이 된 성 아가토가 서한을 받아보았다. 성 아가토 교황은 먼저 로마에서 그리스도 단의론(單意論)에 대한 서방 교회의 통일된 입장을 공식화하기 위한 회의를 개최했고, 680년 9월 10일 그가 파견한 사절단이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했다. 로마에서 온 사절단은 서방 교회 주교들이 교회 회의를 통해 결정하고 서명한 교령과 교황의 서한을 들고 와서 가톨릭교회의 정통 신앙을 확고히 전했다. 즉 그리스도에게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의 두 가지 본성이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그리스도에게는 하나의 의지(意志)만이 있어서 그 움직임도 하나라는, 그래서 그리스도의 순수한 인간적 의지가 신적인 의지 속에 흡수된다고 주장하는 단의론을 분명히 단죄하였다. 성 아가토 교황은 서한을 통해 그리스도 안에 신성과 인성 두 개의 의지와 행동이 존재하는 것이 정통 교리임을 분명히 했고, 콘스탄티노플의 그레고리오 1세(Gregorius I) 총대주교와 그곳에 모인 주교들은 ‘사도 베드로(Petrus)가 아가토를 통해 말씀하신 것’으로 인정하였다. 그리스도 단의설 이단을 단죄함으로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는 교회를 올바른 길로 이끈 제6차 보편 공의회로 자리매김했다. 그는 680년 3월 27일 공의회 준비를 위해 로마에서 개최한 교회 회의에 자치권을 지니고 있던 라벤나(Ravenna)의 대주교를 초대하는 데 성공하였다. 로마로부터 자치권을 유지하고 있던 라벤나는 로마의 지지와 우호적 관계 속에서 향후 라벤나의 대주교는 교황에 의해 축성되고 팔리움을 수여 받는 것에 동의하였다. 경험이 풍부한 행정가였던 성 아가토 교황은 로마 교회의 재정적 어려움을 고려해 병으로 그만두기까지 직접 성좌의 재정을 관리하였다. 그는 또한 잉글랜드 교회에 대해서도 큰 관심을 두어 679년 라테라노 교회 회의에서 면직당한 요크(York)의 성 빌프리도(Wilfridus, 4월 24일) 주교와 캔터베리(Canterbury)의 성 테오도로(Theodorus, 9월 19일) 대주교 사이의 논쟁을 화해시켰고, 성 베드로 대성당의 성가 단장을 잉글랜드로 보내 전례 음악을 가르치도록 했다. 교황 성 아가토는 미처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의 폐막을 보지 못하고 681년 1월 10일 선종하여 성 베드로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그는 서방 교회뿐 아니라 동방 교회에서도 공경을 받고 있다. 옛 “로마 순교록”은 1월 10일 목록에서 성덕과 학문으로 유명하며 거룩한 죽음으로 삶을 마감한 교황 성 아가토에 대해 전해주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같은 날 목록에서 단성론자들의 오류에 맞서 온전한 신앙을 보호하고 교회 회의를 통해 교회 일치를 촉진한 성 아가토 교황이 성 베드로 대성당에 잠들어있다고 기록하였다. 그런데 교황 성 아가토의 나이에 대한 전승에는 여전히 불확실성이 존재한다. 교황 성 대 그레고리오 1세(Gregorius I, 9월 3일)가 팔레르모의 성 베네딕토회 수도원에 보낸 편지에서 언급한 수도승 아가토는 574년에 태어났기에 681년에 선종한 교황 성 아가토와 같은 사람이라면 교황은 107세의 나이로 선종한 셈이다. 교황 성 아가토의 기원에 대해서는 그가 고대 그리스의 식민지 출신이라는 것밖에는 알려진 바가 없기에, 오늘날 많은 역사가는 교황 성 아가토와 수도승 아가토를 같은 이름을 지닌 다른 두 사람으로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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