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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토(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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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명 알베르토 (Albert)
축일 11월 24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주교, 추기경, 순교자
활동지역 루뱅(Louvain)
활동연도 +1192년
같은이름 알버트, 알베르, 알베르또, 알베르뚜스, 알베르투스, 앨버트
성인 기본정보

   성 알베르투스(Albertus, 또는 알베르토)는 1166년경 오늘날 벨기에 중부 브라반트(Brabant) 지방의 루뱅에서 고드프리 3세(Godfrey III) 백작과 그의 첫 번째 아내인 림뷔르흐(Limburg)의 마르가리타(Margareta)의 두 아들 중 둘째로 태어났다. 그의 형은 브라반트의 앙리 1세(Henry I) 공작이다. 그는 루뱅 북쪽의 몽 세자르(Mont-Cesar) 언덕에 있는 부친의 성(城)에서 자랐는데, 이곳에는 오늘날 유명한 베네딕토회 수도원이 자리하고 있다. 좋은 집안 덕분에 최고의 교육을 받고 성장한 그는 어려서부터 성직자가 될 운명이었다. 12살이란 어린 나이에 리에주 대성당(Liege Cathedral)의 참사 위원으로 임명되었다. 21살이 되던 1187년 예루살렘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자신이 누리던 모든 혜택과 지위를 물리치고 기사 작위를 받아 십자군 전쟁에 참여하려고 했다. 하지만 여러 사정으로 성지까지 가지는 못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1191년 리에주의 주교가 십자군 전쟁 중에 사망하자 부제였던 성 알베르토가 교회법적으로 주교가 될 수 있는 연령(30세)에 도달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후임 주교로 선출되었다.

   성 알베르토의 주교 선출에 대해 대부분은 인정하고 반겼으나 일부 세력은 다른 후보를 지지하며 강력히 저항하였다. 그는 다른 후보를 지지하며 그를 반대한 하인리히 6세 황제(1190~1197년 재위)에게 자신의 선출이 교회법적으로 유효하다는 것을 주장하며 교회의 권한을 침해한 것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였다. 그는 리에주의 주교직을 사임한 후 이 문제를 들고 로마의 첼레스티노 3세(Coelestinus III) 교황에게 갔다. 1192년 교황은 그의 선출이 유효하다고 판단하고 그를 추기경으로 임명했다. 그는 그해 9월 랭스(Reims) 대성당에서 사제품과 주교품을 연이어 받았다. 하지만 황제의 암살 위협으로 이미 반대파가 장악하고 있는 리에주 주교좌로 쉽게 돌아갈 수는 없었다. 그를 지지하던 이들이 살해당하거나 집이 파괴되는 불행한 사태가 이어졌기 때문이다. 그는 일단 랭스에 머물며 그곳에서 주교직을 수행하고자 했다. 그는 10주 정도 랭스에 머물다가 1192년 11월 24일 성벽 밖에 있는 생 레미(Saint-Remi) 수도원을 방문하러 나섰다. 그때 황제의 지원을 받은 것으로 추정되는 세 명의 독일 기사들이 나타나 칼로 그의 머리를 내리쳐 무참히 살해하고는 도망쳤다. 랭스의 시민들은 충격에 빠졌고, 그의 시신은 랭스 대성당에 엄숙히 안장되었다.

   성 알베르토의 죽음은 곧바로 정치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켰다. 그의 명성은 더욱 널리 퍼져나갔고, 황제 앞에서 교회의 자유를 위해 순교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동시대 사람들은 이 살인 사건을 1170년에 있었던 캔터베리(Canterbury)의 성 토마스 베케트(Thomas Becket) 주교의 살인 사건과 비교하였다. 결국 하인리히 6세 황제는 공개적인 속죄를 강요당했고, 황제에 의해 불법으로 주교좌에 올랐던 로타리우스(Lotharius)는 파문당한 후 리에주를 떠났다. 1613년 교황 바오로 5세(Paulus V)는 그를 성인품에 올리며 그가 살해된 날을 축일로 지정했다. 그런데 자료에 따라 그의 사망일이 11월 24일 또는 11월 21일 등으로 기록되어 있어서 보통 벨기에에서는 11월 24일에 그리고 다른 지역에서는 11월 21일에 기념하였다. 1612년에 오스트리아의 알베르트 대공은 성 알베르토의 유해로 추정되는 유물을 랭스에서 자신이 설립한 브뤼셀(Brussels)의 카르멜회 수도원 성당으로 옮겨 모셨다.

   그런데 1919년 독일군의 포격 이후 랭스 대성당에 대한 발굴 조사 과정에서 10세기의 대주교인 오달리크(Odalrik)의 무덤이 발견되었는데, 전문가 위원회의 조사 결과 그 안에 성 알베르토의 유해가 온전히 안치되어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결국 1612년에 오달리크의 유해를 성 알베르토의 유해로 잘못 알고 이장했다고 판단했다. 그 후 1921년에 그의 유해를 엄숙히 벨기에로 이장하였다. 성 알베르토는 벨기에 국왕들의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고 있다. 옛 “로마 순교록”은 11월 21일 목록에서 랭스에서 리에주의 주교이자 순교자인 성 알베르토가 교회의 자유를 수호했다는 이유로 처형당했다고 전해주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11월 24일로 그의 축일을 옮겨 프랑스의 랭스에서 벨기에 리에주의 주교이자 순교자인 루뱅의 성 알베르토의 수난이 있었다고 기록하였다. 그리고 그가 교회의 자유를 수호했다는 이유로 추방당했고, 성직을 받은 해에 순교했다고 덧붙였다.♣

사진/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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