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피에르 오매트르(Pierre Aumaitre, 오 베드로 또는 오매트르 베드로) 신부의 세례명은 베드로(Petrus)이고 한국 성은 오(吳)이다. 그는 1837년 4월 8일 프랑스 서부 앙굴렘(Angouleme) 교구의 뤼페크(Ruffec) 본당에 속한 에제크(Aizecq)라는 작은 시골 마을에서 5남매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조그만 농지를 경작하며 신을 만들어 팔아 생계를 꾸려갔다. 성 오매트르 베드로는 어려서부터 성실하고 부지런했지만 학업 성적이 뛰어나지는 않았다. 그래서 첫영성체 교육을 받으면서 사제가 되겠다는 결심을 했지만, 리슈몽(Richemont)의 소신학교에 입학하려 했을 때 큰 어려움을 겪었다. 성적 때문에 소신학교 추천을 꺼리던 본당신부도 감탄할 만큼 매일같이 본당신부와 평신도에게 라틴어를 배우러 다녔고, 결국 입학할 수 있었다. 입학한 뒤에는 특유의 성실함으로 자신의 부족함을 극복했을 뿐만 아니라 우등생이 되기까지 하였다. 5년의 소신학교 과정을 마친 그는 1857년 10월에 앙굴렘 대신학교에 진학했고, 1859년 8월 18일에 소품자(小品者)로 파리 외방 전교회의 신학교에 입학했다. 그리고 1862년 6월 14일에 사제품을 받았다. 수품 후 성 오매트르 베드로 신부는 자신의 선교지가 조선임을 알게 되었다. 가난한 가정에서 사제가 되기까지 많은 은인의 도움을 받았던 그는 선교 사제가 되기까지도 부모의 강한 반대를 극복해야 했다. 게다가 순교를 각오해야 하는 조선으로의 파견은 쉬운 결정은 아니었지만, 하느님의 뜻을 따르겠다는 각오를 담아 부모에게 편지를 써 보냈다. 그리고 1862년 8월 18일 프랑스를 떠났으나 박해로 인해 조선으로의 입국이 쉽지는 않았다. 거의 1년 가까운 노력 끝에 1863년 6월 말 중국 어선을 타고 연평도 바다를 지나 무사히 조선 땅을 밟게 되었다. 입국 후 서울에서 성 베르뇌 시메온(Berneux Simeon) 주교와 함께 지낸 그는 얼마 뒤에 조선말을 익히기 위해 용인의 손골(현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동천동)로 내려갔다. 그런 다음 성 다블뤼 안토니오(Daveluy Antonius) 주교가 전교하던 내포(內浦) 지방에서 활동하다가 1864년 9월부터 경기도의 한 지역을 맡아 사목하였다. 당시 성 오매트르 베드로 신부는 신자들에게 성모 신심을 키워주기 위해 특별한 일을 했는데, 같은 시기에 조선에서 활동했던 칼레(Calais) 신부는 이렇게 증언하였다. “오매트르 신부는 매년 최대한 장엄하게 성모성월 행사를 거행했으며, 교우들에게 이 아름다운 신심을 적극적으로 권장했다.” 2년 남짓 본격적인 전교 활동을 펼치던 그는 1866년 병인박해(丙寅迫害)의 소문이 나돌고 성 베르뇌 시메온 주교마저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수원의 샘골[泉谷里]에서 성사를 주고 있었다. 박해에 대한 소문으로 신자들이 동요하자 성 오매트르 베드로 신부는 성사를 중단하고 신자들을 진정시킨 후 미사와 전례 용구를 모두 감추고 3월 9일 거더리(현 충청남도 예산군 고덕면 상궁리)에 있는 성 다블뤼 안토니오 주교를 찾아갔다. 여기서 그는 주교와 성 위앵 루카(Huin Lucas) 신부 등과 함께 하루를 보낸 다음 거더리에서 15리(里) 떨어진 ‘소덜’로 피신하였다. 그는 성 다블뤼 안토니오 주교와 함께 배를 타고 바다로 피신할 계획을 세웠으나 역풍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마을로 돌아왔다. 3월 11일 성 다블뤼 안토니오 주교가 거더리에서 체포되자 성 오매트르 베드로 신부는 신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다음날 거더리로 와서 자수하였다. 성 위앵 루카 신부도 주교의 편지를 받고 자수하여 거더리로 끌려왔다. 성 오매트르 베드로 신부는 함께 체포된 주교와 동료 신부와 함께 홍주 관아를 거쳐 서울로 압송되었다. 그는 3월 19일 포도청에서 두 차례의 신문과 고문을 받으면서도 “이 세상의 형벌은 후세의 상”이라며 당당히 신앙을 증거하였다. 결국 3월 23일 군문효수(軍門梟首)의 사형선고를 받고 동료들과 함께 처형지인 충청남도 보령 수영(保寧水營)으로 이송되었다. 당시 국혼(國婚)이 가까운 시기라 조정에서는 서울에서 피를 흘리는 것이 나쁜 징조라 하여 멀리 떨어진 보령 수영으로 처형지를 정했다. 그래서 성 오매트르 베드로 신부는 성 다블뤼 안토니오 주교 · 성 위앵 루카 신부 · 성 황석두 루카(黃錫斗, Lucas) · 성 장주기 요셉(張周基, Josephus)과 함께 죽음의 행진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1866년 3월 30일 주님 수난 성금요일에 처형장인 갈매못(현 충청남도 보령시 오천면 영보리)에서 참수형을 받아 순교의 월계관을 썼다. 이때 그의 나이는 29세였다. 성 오매트르 베드로 신부를 포함해 갈매못에서 순교한 5위의 순교자 중에서 성 황석두 루카의 시신은 가족들이 거두어 홍산 삽티(현 충청남도 부여군 홍산면 상천리)를 거쳐 고향인 연풍 병방골(충청북도 괴산군 장연면 방곡리)에 이장했고, 1982년 연풍 순교성지로 천묘(遷墓)하였다. 나머지 4위 순교자들의 시신은 사흘 뒤에 신자들에 의해 거두어져 형장 부근에 묻혔다가 6월 초 몇몇 신자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모셔와 서짓골(충남 보령시 미산면 평라리)에 매장하였다. 그 후 1882년 3월 제7대 조선 교구장인 블랑(Blanc, 白) 주교의 지시로 발굴되어 일본 나가사키(長崎) 대교구의 오우라 성당으로 옮겨졌다가 12년 만인 1894년 5월 다시 조선으로 돌아와 1900년부터 명동 성당에 안치되었다. 그리고 시복식을 앞둔 1967년 절두산 순교성지 내의 병인박해 100주년 기념성당 지하에 마련된 성인 유해실에 안치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성 오매트르 베드로 신부는 1968년 10월 6일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병인박해 순교자 24위’의 한 명으로 시복되었다. 그리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을 기념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103위 한국 순교성인’ 중 한 명으로 성인품에 올랐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3월 30일 목록에서 한국의 갈매못에서 성 오매트르 베드로 신부와 동료들이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때문에 참수형을 당해 순교했다고 기록하였다. 그의 축일은 9월 20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에 함께 경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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