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5년 또는 995년에 이탈리아 피렌체(Firenze) 근처의 비시도미니(Visidomini)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성 요한 괄베르투스(Joannes Gualbertus, 또는 요한 괄베르토)는 어려서부터 가톨릭 신앙이 깊은 집안에서 훌륭한 교육을 받고 자라 기사가 되었다. 방탕한 생활을 하던 형이 파스카 금요일에 살해당하자, 그는 기사로서 형의 죽음에 복수하는 것이 자신의 의무라 여겼다. 그러나 정작 살인자와 마주쳤을 때 그가 땅바닥에 십자가 모양으로 팔을 벌리고 엎드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용서해 달라고 간절히 청하자,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 장면을 떠올린 그는 살인자를 용서해 주었다. 이때부터 그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성 요한은 부모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1013년경 산트 미니아토(Sant' Miniato)의 클뤼니(Cluny) 수도원에 입회하여 수도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는 수도원 원장이 성직 매매로 피렌체 주교가 된 사실을 알고 그 수도원을 떠나 교회를 개혁할 수 있는 금욕적인 수도생활을 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성 베네딕투스(Benedictus)의 수도 규칙을 실천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철저히 따르는 삶을 살 수 있는 곳을 찾던 중, 성 로무알두스(Romualdus, 6월 19일)가 창립한 카말돌리 연합회에 잠시 머물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 수도회처럼 은수생활에 치우치지 않고 공주생활과 절충된 수도생활을 하기 위해 새로운 수도원을 설립하고자 결심하였다. 성 요한은 발롬브로사(Vallombrosa)에서 베네딕토 수녀원으로부터 기증받은 부지에 수도 공동체를 설립하였다. 3명의 회원들로 시작된 이 공동체는 후에 산트 미니아토 수도원에서 온 몇 명의 수도자들과 피렌체 지방에서 온 평신도들로 증원되었고, 1056년에 교황 빅토르 2세(Victor II)에 의해 정식 인가를 받았다. 요한은 발롬브로사 연합회를 성 베네딕투스(Benedictus)의 수도 규칙을 따르면서도 몇 가지 독특한 방법으로 이끌었다. 즉 그의 이상적인 수도생활은 은수생활의 고행과 금욕 그리고 참회의 생활에 공동체 생활을 일치시키는 것이었다. 그래서 발롬브로사 연합회의 체제는 철저히 은둔 생활을 하는 수도승과 행정 전반을 관리하는 평수사로 형성되었다. 그는 가난한 이들에게 베푼 애덕을 비롯하여, 성직 매매자들에 대한 강경한 태도, 기적, 예언 및 영적 지혜 등이 뛰어나 그의 지도를 받으려는 사람들이 늘 많았다. 이 수도회는 주로 이탈리아의 토스카나(Toscana)와 롬바르디아(Lombardia) 지방에 산재해 있다. 그는 1073년 7월 12일 피렌체 교외 발 디 페사(Val di Pesa)에 있는 파시냐노(Passignano)에서 선종하였고, 1193년 교황 코일레스티누스 3세(Coelestinus III)에 의해 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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