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의 성 요한네스(Joannes de Deo, 또는 천주의 성 요한)은 1495년 3월 8일 포르투갈 왕국의 몬테모르오노보(Montemor-o-Novo)에서 안드레 시다데(Andre Cidade)와 테레사 두아르테(Teresa Duarte)의 아들로 태어나 후안 시다데(Juan Cidade)라는 이름을 얻었다. 부유하지는 않아도 신심 깊은 가정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그는 8살 때에 한 순례자를 따라 가출하였다. 그의 전기에 따르면 이때의 충격으로 어머니는 일찍 세상을 떠났고, 아버지는 프란치스코 수도회에 들어갔다고 한다. 순례자를 따라 에스파냐까지 간 그는 톨레도(Toledo) 근처 오로페사(Oropesa)라는 곳에서 갈 곳도 머물 곳도 없는 신세로 방황하다가 마요랄(Mayoral)이라는 농부의 집에 받아들여져 그곳에서 일하며 생활하게 되었다. 그는 마요랄의 집에서 글공부와 허드렛일을 익혀 가며 세례를 받았고, 학교 공부가 끝나면 집으로 돌아와 가축을 돌보는 일을 하며 양치기 목동으로 살았다. 마요랄은 성실하고 부지런한 성 요한이 자기 딸과 결혼해 상속자가 되기를 원했다. 하지만 결혼을 원치 않았던 그는 22살 무렵 프랑스와 에스파냐 사이에 국경 분쟁이 발생하자 오로페사 백작의 군대에 들어가 에스파냐를 방어하는 전투에 참여하였다. 이 시기에 성 요한은 다른 군인들과 마찬가지로 방종한 생활을 하며 적은 급료 때문에 가끔 도둑질하기도 했다. 그는 전투에서 노획한 전리품을 지키는 일을 맡았는데, 어느 날 전리품이 도난당하는 일이 발생해 사형선고를 받고 죽음 직전까지 갔다. 다행히 관대한 장교의 도움으로 죽음을 면하고 군대에서 추방당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그 후 그는 다시 오로페사의 농장으로 돌아가 예전처럼 양치기 목동으로 생활했다. 그러다가 다시 군대에 지원했는데, 그가 지원한 군대는 튀르키예 제국의 침공으로부터 비엔(Vienne)을 방어하고 있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카를 5세의 군대와 합세하기 위한 부대였다. 1523년 9월 25일 비엔 근교에서 격전이 벌어졌는데, 하루 만에 튀르키예 군대가 패배해 유럽에서 퇴각하고 말았다. 전쟁이 승리로 끝나고 군대가 해체되자 성 요한의 군대 생활도 끝났다. 그 후 그는 감사기도를 드리기 위해 에스파냐 북서부에 있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로 성지순례를 떠났다. 그런데 이 순례가 그의 인생에 새로운 장을 여는 출발점이 되었다. 그는 많은 시간을 묵상과 기도로 보냈고, 일자리를 얻기 위해 포르투갈의 영토이며 전략적 요새였던 북아프리카의 수타 지역으로 가서 그곳에서 얼마간 생활했다. 수타에서 돌아온 성 요한은 그라나다(Granada)의 엘비라(Elvira) 성문 옆에 조그마한 가게를 얻어 책과 십자가, 성물 등을 파는 일을 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1539년 1월 20일, 성 세바스티아노(Sebastianus) 축일에 성당을 찾은 성 요한은 아빌라의 성 요한(5월 10일) 신부의 강론을 듣고 큰 감명을 받아 회심의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는 성 세바스티아노의 용기와 그리스도에 대한 충성심에 감동해 자기의 모든 죄를 고백하고 참회하며 고행을 실천했다. 그런데 그의 이런 변화를 지켜본 주변 사람들은 그가 정신병에 걸렸다고 생각해 왕립 병원으로 데려갔고, 열악한 시설의 병원에서 그는 모진 시련을 겪어야 했다. 그는 작은 방에 갇혀 벌거벗긴 채 매를 맞는 등 모진 고통을 당했다. 성 요한은 퇴원하자마자 아빌라의 성 요한 신부를 찾아가 그에게 영적 지도를 받으며 기도와 묵상에 전념했다. 그리고 과달루페의 성모 마리아 성지를 순례했는데, 그곳에서 예로니모회 수도자들이 운영하는 병원과 의학 학교에서 병자 간호와 병원 운영에 필요한 기본적인 것들을 배웠다. 3개월 뒤 그라나다로 돌아온 성 요한은 그라나다의 주교와 베네가스(Venegas)라는 은인의 도움으로 1539년 12월 말에 루체나(Lucena) 가도에 처음으로 ‘자선의 집’을 개원했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이 몰려오면 예수님께서 사랑과 봉사의 의미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었던 것처럼 그들의 발을 씻어주고 환대의 정신으로 맞이하였다. 그는 환자들이 따뜻하고 깨끗한 환경에서 생활하며 충분히 먹고 치료받으며 인격적인 대우를 받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다. 그의 활동이 가끔 비판의 대상이 된 이유는 길거리의 창녀와 부랑자들까지도 정성을 다해 보호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1540년에 에스파냐 국왕의 고문이며 그라나다를 관할하고 있던 투이(Tuy)의 주교 라미레스(S. Ramirez)가 성 요한을 만찬에 초대해서, 그에게 경의를 표하는 뜻으로 ‘천주의 요한’이라는 이름을 정식으로 하사하였다. 주교의 인정과 그의 높은 성덕과 헌신 덕분에 그라나다를 비롯해 여러 지역의 재산가와 귀족과 왕족들도 그의 자선사업을 위해 많은 지원과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특히 천주의 성 요한의 가장 든든한 후원자이자 은인이 된 세사 공작부인은 막대한 후원금뿐만 아니라 많은 귀족을 그에게 소개해주었다. 천주의 성 요한은 심장 울혈증과 관절염, 안구 이상 등으로 고통을 받고 있었으나 쉬지 않고 일하였다. 게다가 겨울에 어린아이를 구하기 위해 강물에 뛰어들었다가 병을 얻어 결국 1550년 3월 8일, 자신이 태어난 날에 십자가를 가슴에 안고 무릎을 꿇은 자세로 선종하였다. 그의 장례식에는 많은 성직자와 공직자뿐만 아니라 그가 돌보던 가난한 사람들이 촛불을 들고 긴 행렬을 지으며 몰려왔다고 한다. 천주의 성 요한은 1630년 9월 21일 교황 우르바노 8세(Urbanus VIII)에 의해 시복되었고, 1690년 10월 16일 교황 알렉산데르 8세(Alexander VIII)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1886년 5월 27일 교황 레오 13세(Leo XIII)는 그를 병자와 병원을 위한 수호성인으로 선포했고, 1930년 8월 28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병자를 돌보는 모든 간호사와 협회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되었다. 서적 판매원과 심장병 환자 그리고 소방대원의 수호성인이자 현대 병원의 창시자로도 불리는 그의 유해는 1737년에서 1759년 사이에 그의 이름으로 봉헌된 그라나다의 천주의 성 요한 대성당에 안치되어 공경을 받고 있다. 천주의 성 요한은 살아 있을 때 직접 수도회를 설립하지는 않았지만 그를 따르던 제자들에 의해 사후에 수도회가 설립되었다. 교황 성 비오 5세는 그를 일컬어 “교회의 뜨락을 온전히 꾸미는 데 없어서는 안 될 한 송이 꽃”이라고 하였다. 그의 정신을 이어받아 설립된 천주의 성 요한 의료봉사 수도회는 1572년 1월 1일 교황 성 비오 5세에 의해 공동체로 인정되었고, 1586년 교황 식스토 5세(Sixtus V)에 의해 정식 수도회로 승격되었다. 그 후 그의 정신을 따르는 천주의 성 요한 의료봉사 수도회는 전 세계, 특히 개발도상국 등에 많은 병원을 열고 병들고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을 위해 헌신하고 있다. 옛 “로마 순교록”과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 모두 3월 8일 목록에서 지칠 줄 모르는 사랑으로 그라나다에서 병자와 가난한 이들을 위해 봉사하다가 세상을 떠난 천주의 성 요한에 대해 언급하며, 그의 제자들에 의해 나중에 천주의 성 요한 의료봉사 수도회가 설립되었고 그 또한 환자와 병원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되었다고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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