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녀 이영희 막달레나(Magdalena)는 시흥군 봉천리에 살던 가난한 양반 집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어머니 허 막달레나와 언니 이 바르바라(Barbara)와 고모 이 테레사(Teresia)는 모두 열심한 신자였다. 그러나 아버지는 완고한 외교인이라 부친 몰래 신앙을 지킬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장성하자 아버지는 딸을 출가시키려고 하였고, 막달레나는 동정을 지킬 결심을 하였기 때문에 집을 떠나기로 작정하였다. 집에는 여신자 한 사람이 하인으로 있었는데, 어느 날 저녁 막달레나는 자신의 결심을 알린 후 “여기서 서울까지는 30리 길이고, 나는 길을 모르지만 아버지가 내일 서울로 가시니 네가 그 뒤를 잘 따라가 자취를 잃어버리지 않도록 해라, 그러면 나는 또 네 뒤를 따라가겠다.”고 말하였다. 집은 숲이 우거진 산 가운데에 있었으므로 막달레나는 숲 가운데로 뚫고 들어가 고의적으로 몸에 몇 군데 상처를 내어 옷에 피를 묻힌 다음, 옷을 찢어서 여기 저기 흩어 놓고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 이리하여 하녀와 막달레나는 계획대로 부친의 뒤를 따라 고모인 이 테레사의 집으로 갔다. 딸이 범에게 잡아먹힌 줄 알고 실의에 빠진 아버지는 눈물로 세월을 보내다가 아내로부터 막달레나가 살아있다는 말을 듣고 서울로 달려가 딸이 무사한 것을 보고는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이제는 너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말하면서 그녀가 서울에 머무르며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하게 하였다고 한다. 막달레나는 고모인 이 테레사와 다른 여교우들과 함께 살면서 성교의 교리를 지키고, 박해를 만나면 끝까지 항구하자고 서로 위로 격려하며 지내던 중, 그들도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목숨을 바칠 원의가 간절하여 마침내 1839년 4월 11일에 포졸들에게 가서 자수하였다. 닷새 후에 포장이 “이제는 옥의 괴로움을 맛보았으니 생각을 바로 돌렸느냐?”고 물으며 배교하기를 독촉하자, 막달레나는 “만일 천주님을 배반하고 우리 교를 버릴 생각이었다면 스스로 자수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포장님 앞에서 제가 어떻게 오늘은 이렇게 말하고 내일은 저렇게 말하겠습니까? 저의 결심은 변함이 없으니 나라 법대로 죽여주십시오.”라고 대답하였다. 막달레나는 주리를 틀리고 곤장을 맞고 여러 번 문초를 당하였으나 조금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용감히 참아 받았다. 이리하여 막달레나는 형조로 이송되어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녀는 1839년 7월 20일에 서소문 밖에서 참수당하여 순교하니 이때 그녀의 나이는 31세였다. 그녀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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