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장성집 요셉(Josephus)은 서울에서 때어났다. 그는 한때 호조에 속하는 광흥창(廣興倉)의 일을 본 적도 있으며, 두 번이나 결혼하였으나 두 번 다 상처한 뒤로는 어느 약국에서 일을 보며 지냈다. 원래 그의 성품은 온화하였지만 어려운 처지 때문에 속세생활에서 향락만 추구하던 중, 나이 서른에 천주교를 알기 시작하여 한때 열렬한 예비신자로 교리를 배웠다. 그러나 그는 천주강생에 대하여 의심을 갖고 차츰 냉담해지더니 마침내 천주교 연구를 내던지고 돈벌이에 급급하였고, 이전의 생활로 되돌아 가버렸다. 그러다가 어느 친구가 그 의혹을 밝혀주자 그는 자기의 과거 허물을 통회하고, 그전보다 더욱 열심히 기도하고 성서를 읽었으며, 세속의 유혹을 더 잘 피하기 위하여 외교인과의 관계를 완전히 끊어버리고 집에 들어 앉아 문을 닫아걸고 굶주림과 추위에도 상관하지 않고 기도와 공부에만 전심하였다. 이때 주위 사람들이 이전처럼 출입도 하고 몸을 돌본다고 해서 나쁠 것이 뭐냐고 하자 그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제가 전에 지은 죄는 모두 넉넉한 살림을 해 보겠다는 욕망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저는 다시 같은 모양으로 죄를 짓기보다는 추위로 얼고 굶주림으로 고생하는 것이 더 낫습니다. 잠시 지나가는 이 세상의 괴로움을 잘 참아 받음으로써 저는 죽은 뒤에 하늘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윽고 그는 1838년 4월에 성세와 견진성사를 받았다. 그리고 그 이듬해에 박해가 시작되어 많은 신자들이 고문과 죽음을 당하면서도 끝까지 신앙을 지켰다는 말을 듣고, 그는 매우 감탄하며 자기도 순교할 거룩한 원의가 불타올라 자수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러나 그는 5월 18일에 밀고를 당해 체포되었다. 이때 그는 열병을 앓고 일어난 다음이라 포졸들이 가마에 태워가려 하였으나, 그는 이를 거절하고 걸어서 포졸들을 따라 포청으로 갔다. 그런데 하루가 지나고 해가 돋을 무렵인데도 요셉은 자기를 부르지 않는 것을 보고 놀라서, “죽어야 마땅한 사람을 잡아다 놓고는 아무 형벌도 주지 않고 버려둔단 말이요” 하고 여러 번 항의까지 하였다. 그 후 형리들이 아무리 꾀를 쓰고 포악하게 다루어도 소용이 없었고, 5월 26일에는 치도곤 25대를 맞은 후 옥에서 숨을 거두었다. 때는 1839년 5월 26일이요, 그의 나이는 54세였다. 그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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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 성인명 | 제목 | 작성자 | 작성일 | 조회수 | 추천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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