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정국보 프로타시우스(Protasius, 또는 프로타시오)는 황해도 개성의 어느 양반 집에서 태어났다. 그의 조부가 직무상 괴실로 몰락하자 부친은 가문과 신분을 숨긴 채 서울로 올라와서 노동을 하며 생계를 이어갔다. 정국보는 천성이 착하고 어질었는데, 나이 서른 살 때 입교하여 충실히 계명을 지키며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를 지켜본 유방제(劉方濟, 파치피코) 신부는 홍살문 거리에 집을 마련하여 성사를 보기 위하여 서울로 모여드는 신자들의 숙박소를 관리하도록 하였다. 그는 모든 교우들에게 한결같이 대하였고, 교우들의 일이라면 위험을 불사하고 헌신적으로 봉사하였다. 또한 그는 지극히 가난하고 병이 잦았지만 어려운 빛을 보인 적이 없었다. 그는 열네 명의 자녀를 두었다가 어릴 때에 모두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온전히 주님의 뜻에 복종하는 뜻으로 한 마디 원망의 소리조차 입 밖에 내지 않고 달게 참아 받았다. 또한 성서 읽기를 즐겨하고 강론 듣기를 좋아하였다. 1839년 3월 기해박해의 선풍이 일어났다. 조선에 외국인 신부들이 있다는 소식이 조정에 알려져 신자들을 잡아 가두기 시작하였다. 그는 박해가 시작되자마자 아내와 같이 잡혀 포도청에서 배교를 강박하는 혹독한 고문을 받았지만 조금도 굴하지 않았다. 그러나 형조로 이송되어 관리들의 감언이설과 유혹에 빠져 배교를 선언하고 석방되었지만, 집에 돌아오자마자 자기 죄에 대하여 심한 가책을 느껴 침식을 잊은 채 울며 지내다가 이웃에 사는 열심한 신자의 격려와 권고에 용기를 얻어 자수할 결심을 하였다. 그러나 형조의 문지기는 그가 찾아와 자기가 배교한 사실과 배교한 것을 취소하고 죽기를 원한다는 말을 듣고, “이 못난 놈아, 한번 말했으면 그만이지 못 들어간다.”라고 호령하며 그를 미친 사람으로 취급하고 들어가지 못하게 하였다. 이튿날 찾아가 다시 졸랐으나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사흘째인 5월 12일에는 자신의 신병과 고문의 후유증으로 들것에 실려 형조판서가 지나갈 길목에 지키고 앉아 기다렸다. 판서가 나오자 그는 길 한 가운데 엎드려 이렇게 말했다. “저는 죄를 지었습니다. 마음에 없는 말을 입으로 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뉘우칩니다. 저는 천주교인입니다. 언제까지든지 그러하고자 합니다.” 하고 애원하였다. 그래도 판서가 그냥 지나치려 하자, 그가 하도 큰소리로 부르짖고 애원함으로 판서는 귀찮게 여기고 그를 잡아 옥으로 끌고 가도록 명했다. 이리하여 그는 기쁘고도 즐거운 마음으로 형리들에게 끌려 옥으로 들어갔다. 갇혀 있던 다른 신자들이 그를 반가이 맞으며 “잘 했다”는 축하의 말을 하자 그의 기쁨은 한층 더 하였다. 그는 다시 불려 나가 치도곤 스물다섯 대를 맞았다. 이때 그는 장티푸스로 기력이 떨어진데다가 가혹한 형벌을 받았으므로 옥에 들어올 때에는 이미 다 죽어 있었다. 그는 바로 그날 밤, 1839년 5월 20일에 41세의 나이로 옥사하였다. 어쨌든 그는 기해박해의 첫 번째 순교자이다. 그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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