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쿠트베르투스(Cuthbertus, 또는 쿠트베르토)의 출신에 대해 어떤 사람들은 아일랜드계라고 하고 또 다른 이들은 스코틀랜드계라고 하지만, 저명한 역사가인 성 베다(Beda, 5월 25일)는 잉글랜드(England) 출신이라고 증언하였다. 그는 634년경 영국 잉글랜드 북부 노섬브리아(Northumbria)에서 아마도 부유한 앵글로색슨족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듯하다. 그는 어린 나이에 고아가 되어 양모인 한 미망인의 돌봄을 받으며 성장했다. 그는 소년 시절 양치기 일을 했는데, 성 베다에 따르면 17살 무렵 천사들이 영혼을 천국으로 인도하는 환시를 보았다고 한다. 그는 나중에 그날 밤 린디스판의 성 아이다노(Aidanus, 8월 31일) 주교가 뱀버러(Bamburgh)에서 선종했음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 후에 그는 얼마간 군대에 복무한 듯한데, 그가 영국 스코틀랜드의 멜로즈(Melrose) 수도원에 들어가기 위해 왔을 때 말을 타고 창을 든 모습이었다고 한다. 성 쿠트베르토는 멜로즈 수도원에서 성 보스웰(Boswell, 7월 7일) 수도원장의 지도로 수도자가 되었다. 그가 멜로즈 수도원을 선택한 것은 아마도 성 보스웰을 이미 알고 있었고 평소 존경했던 것 같다. 660년 멜로즈 수도원은 왕으로부터 하사받은 땅에 새로운 리펀(Ripon) 수도원을 설립하기 위해 성 에아타(Eata, 10월 26일)를 수도원장으로 파견했는데, 이때 성 쿠트베르토도 초기 설립 회원의 한 명으로 수도원장을 수행하여 갔다. 그런데 알크프리드(Alcfrid) 국왕이 리펀 수도원의 책임을 부활절 날짜 계산 방법 등에서 로마 전례를 지지하고 따르는 요크의 성 빌프리도(Wilfridus, 4월 24일)에게 넘겨주자 이듬해에 성 에아타와 함께 다시 멜로즈 수도원으로 돌아왔다. 661년에 멜로즈에 흑사병이 발생했을 때 성 쿠트베르토도 병에 걸려 죽을 위험을 넘겼다. 성 보스웰 수도원장이 전염병으로 선종한 후 성 쿠트베르토가 멜로즈 수도원의 원장이 되었다. 그는 뛰어난 성덕으로 수도원을 운영하며 놀라운 치유 능력을 보였고, 수많은 기적을 일으켰다고 한다. 그는 몇 년 동안 수도원 생활과 함께 말을 타거나 걸어서 외딴 지역까지 선교 여행을 다녔다. 그 후 그는 고독한 생활에 대한 동경을 느껴 멜로즈에서 은수자로 살고자 했는데, 664년에 성 에아타의 권고로 함께 린디스판 수도원으로 갔다. 663년 또는 664년에 휘트비(Whitby) 시노드가 열리고 그곳에서 로마 전례를 따르자고 결정했을 때 켈트(Celtic) 전례를 옹호하던 성 콜만노(Colmannus, 2월 18일) 주교는 린디스판섬의 수도자 대부분을 이끌고 아일랜드로 돌아갔다. 그리고 성 콜만노의 요청에 따라 그의 후임으로 성 에아타가 린디스판 수도원의 원장이 되었고, 나중에 린디스판의 주교로 임명되었다. 성 에아타에 이어 린디스판 수도원의 원장이 된 성 쿠트베르토는 멜로즈에서처럼 선교 활동을 재개했는데, 수많은 군중이 몰려들어 성황을 이루었다. 이러한 선교 활동은 그가 은수자로 생활하는 것을 허가받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676년에 성 쿠트베르토는 수도원장직에서 물러나 근처에 사람이 살지 않는 작은 판 섬(Farne Is.)으로 들어가 은수 생활을 시작했다. 그의 거룩함에 대한 명성이 높아지면서 그에게 조언을 구하기 위해 찾는 방문자들도 점점 많아졌다. 은수자로 생활하던 성 쿠트베르토는 684년 본인의 뜻과는 상관없이 트와이포드(Twyford) 시노드에서 만장일치로 새로 분할된 헥삼(Hexham) 교구의 주교로 선출되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주교직을 받아들이고 이듬해 요크(York)에서 주교로 축성되었다. 그리고 린디스판의 주교인 성 에아타와 상의하여 주교좌를 서로 바꾸어 헥삼 교구 대신 자신과 인연이 깊은 린디스판의 주교로 착좌하였다. 성 쿠트베르토는 2년 동안 자기 교구를 위해 헌신하다가 마지막 날이 임박한 것을 깨닫고, 성탄절을 지낸 후 판 섬에 있는 자신의 은둔소 방으로 돌아가서 지내다가 687년 3월 20일 평화롭게 선종하였다. 그날로 그의 유해는 린디스판섬의 수도원으로 옮겨져 안장되었다. 그러나 875년 바이킹의 공격으로 수도원을 포기해야 했을 때 수도승들은 그의 유해를 모시고 워킹턴(Workington), 휘턴(Whithorn), 체스털리스트리트(Chester-le-Street), 리펀 등으로 옮겨 다녔다. 최종적으로는 더럼(Durham)의 한 성당으로 이장했는데, 이 성당이 나중에 더럼 대성당으로 발전하였다. 교회 미술에서 성 쿠트베르토는 종종 노섬브리아의 왕인 성 오스왈도(Oswaldus, 8월 5일)의 머리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표현된다. 이는 메이서필드(Maserfield) 전투에서 이교도의 왕인 펜다에게 패한 후 642년경 잔인하게 살해당한 후 린디스판에 묻힌 왕의 머리를 나중에 성 쿠트베르토가 다시 매장했다는 이야기에서 유래한 표현이라고 한다. 또는 12세기 초 더럼 대성당에 성 쿠트베르토의 유물을 안치하기 위해 유물함을 열었을 때, 관 안에 성 쿠트베르토의 유해 옆에 성 오스왈도의 머리가 함께 놓여 있었다고 한다. 그 외에 다른 유물들을 정리한 후 두 성인의 유해는 그대로 관에 넣어 함께 모셨기 때문에 성 쿠트베르토가 성 오스왈도 왕의 머리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표현되었다고도 설명한다. 그 후 그의 무덤에서 기적이 많이 일어나면서 성 쿠트베르토는 영국 북부에서 가장 인기 있는 성인이 되었고, 더럼 대성당에 있는 그의 무덤은 중세 시대에 가장 유명한 순례지 중 하나가 되었다. 옛 “로마 순교록”은 3월 20일 목록에서 영국 린디스판의 주교인 성 쿠트베르토가 어린 시절부터 죽을 때까지 선행과 기적으로 유명했다고 전해주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같은 날 목록에서 영국 노섬브리아의 판 섬에 린디스판의 주교인 성 쿠트베르토가 은둔하다가 선종했는데, 그는 은둔처에서도 과거 수도원과 주교직에서 보여준 성실함으로 빛났으며 켈트족의 엄격함과 생활 방식을 로마 관습과 평화롭게 조화시켰다고 기록하였다. 그의 축일은 3월 20일에 기념하나 더럼으로 그의 유해를 이장한 것을 기념해 9월 4일에 이장 축제를 지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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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 성인명 | 제목 | 작성자 | 작성일 | 조회수 | 추천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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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쿠트베르토(3. ...] | 성인 이름에 담긴 뜻: 쿠트베르토(Cuthbert) | 주호식 | 2017/03/09 | 333 | 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