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녀 파비올라는 4세기에 로마의 유명한 귀족 가문인 파비아가(Fabia家)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어린 나이에 한 남자와 결혼했는데, 남편의 방탕한 생활과 사악한 성격 때문에 오래지 않아 로마법에 따라 이혼하였다. 그렇게 사회생활에서 멀어지면서 외로움을 겪다가 다른 사람에게서 위로를 찾고자 재혼하였다. 하지만 이혼한 상태에서 교회의 허락 없이 재혼함으로써 교회법을 어겨 동료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큰 스캔들이 되었다. 그런데 오래지 않아 두 번째 남편이 사망하자 성녀 파비올라는 이를 하느님의 개입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파스카 성야에 라테라노 대성전 앞에서 주교와 성직자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참회하고 교회로 돌아왔고, 교황 성 시리치오(Siricius, 11월 26일)에게 성사 생활을 할 수 있다는 허락을 받았다. 이때부터 그녀는 이전의 화려한 생활을 완전히 청산하고, 교회를 돕는 일과 자선활동에 헌신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이탈리아에 있는 수도원들을 지원하였다. 395년에는 친척과 함께 예루살렘 성지를 순례하며 베들레헴에서 성 예로니모를 도우며 수도 생활을 하던 성녀 바울라(Paula, 1월 26일)와 그녀의 둘째 딸인 성녀 에우스토키움(Eustochium, 9월 28일)을 만나 함께 머물며 성 예로니모를 만나 친분을 쌓았다. 성녀 파비올라는 베들레헴에 머물며 성 예로니모의 성경 번역 사업을 후원하고자 했다. 그러나 자신이 원하던 생활을 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는데, 이는 그녀의 성격이 엄격한 수도 생활과 맞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오리게네스주의에 대한 논쟁이 일어나면서 성녀 파비올라는 성 예로니모의 주장에 반대하는 루피누스(Rufinus)를 지지하는 예루살렘의 주교 요한(Joannes)의 주장을 옹호하면서 성녀 바울라와 잠시 어색한 사이가 되기도 했다. 그리고 훈족이 예루살렘을 점령하겠다고 위협하자 그녀는 성 예로니모와 그의 후원자들과 함께 야파(Jaffa) 항구로 피신했다가 로마로 돌아왔다. 396년 성 예로니모의 뜻에 따라 로마로 돌아온 성녀 파비올라는 자선사업에 헌신했는데, 특히 성녀 바울라의 사위이자 원로원 의원인 성 팜마치오(Pammachius, 8월 30일)와 함께 병자와 순례자를 위한 자선병원을 오스티아(Ostia) 맞은편 테베레강(Tevere R.) 어귀의 인공 항구인 포르토(Porto)에 세웠다. 이 병원은 서양 최초의 가톨릭 병원으로 여겨지며 그 이름이 오늘날의 영국에도 알려질 정도로 유명해졌다. 성녀 파비올라는 병원에서 직접 가난한 이들과 병자들을 돌보았다. 하지만 그러한 활동조차도 그녀의 모든 열정을 만족시켜 주지는 못했다. 그녀는 죽음을 맞이한 순간에도 새로운 사업을 계획할 정도로 헌신적이고 정열적이었다. 399년 또는 400년 12월 27일 성녀 파비올라가 로마에서 선종했을 때, 그녀의 장례식에는 로마의 모든 사람이 참석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로마인들에게 그녀는 가장 큰 은인이었기 때문이다. 성 예로니모는 친구이자 후원자였던 성녀 파비올라를 위해 397년에 영적인 내용이 담긴 두 통의 편지를 썼고, 선종 후에는 그녀에 대한 유명한 추도사를 썼다. 이 기록들이 우리가 성녀 파비올라에 대해 알게 된 주요 자료가 되었다. 교회 미술에서 성녀 파비올라는 종종 참회복을 입고 기도하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16세기에 교회사학자로 유명한 카이사르 바로니우스(Caesar Baronius, 1538~1607년) 추기경이 개정한 옛 “로마 순교록”에 그녀의 이름이 포함되지는 않았지만,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12월 27일 목록에 그녀의 이름을 추가했고, 성 예로니모의 증언에 따라 가난한 이들의 유익을 위해 회개의 삶을 산 로마의 과부 성녀 파비올라를 기념한다고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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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파비올라(12. ...] | [신간] 파비올라: 초대교회 배경 4대 순교 명작|1| | 주호식 | 2012/02/14 | 1164 | 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