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호르미스다는 이탈리아 중부 프로시노네(Frosinone)의 부유한 귀족이었던 유스투스(Justus)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부제품을 받기 전에 이미 결혼해서 아들 하나를 두었고, 얼마 후 아내를 잃고 홀로 되었는데 그 아들이 나중에 교황이 된 성 실베리오(Silverius, 6월 20일)이다. 그는 514년 7월 20일 성 심마코(Symmachus, 7월 19일)를 계승하여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그 당시 그는 로마에서 교황 성 심마코의 부제로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기에 교황의 후계자로 지명된 듯하다. 교황이 된 성 호르미스다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성 심마코의 즉위와 함께 대립교황으로 선출된 라우렌시오(Laurentius)와 그 추종자들이 전임 교황 임기 내내 일으킨 혼란을 수습하고, 그들의 세력을 약화한 후 교회 공동체로 다시 받아들여 평화를 가져온 것이었다. 그런데 그의 재임 기간에 가장 돋보이는 일은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로서 그리스도 단성설(Monophysitismus)을 주장한 아카키우스(Acacius) 이단을 종식한 것이었다. 당시 콘스탄티노플 교회가 로마 교회와 재결합한 것은 아카키우스를 공식적으로 단죄하고 로마 주교좌의 수위권과 무류성을 선언한 ‘호르미스다의 신앙 고백문’의 결과였다. 519년 3월 28일 유스티누스 1세 황제의 궁전에서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인 요한 2세(Joannes II)를 비롯하여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주교와 수도원장들이 황제의 요청으로 교황이 직접 작성한 신앙 고백문에 서명하였다. 이 신앙 고백문은 그리스도의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의 위격적 일치를 분명히 한 칼체돈 공의회(451년)의 그리스도론을 수용하고 그 정신에서 벗어나는 것을 단죄할 뿐 아니라, 로마 교회가 가톨릭 신앙의 순수함을 보존해 온 사도좌임을 분명히 인정하는 선언이었다. 그래서 이 문서는 교황의 권위와 수위권에 대한 획기적인 선언임과 동시에 세기를 통해 이 요구를 구체화할 때마다 인용되곤 하였다. 교황 성 호르미스다는 아카키우스 이단으로 인한 교회의 분열을 끝내고, 그리스도론에 관한 칼체돈 공의회의 결정이 동방과 서방 교회 모두에게 받아들여지는데 큰 공로를 세웠다. 그는 세상을 떠나기 몇 달 전에 아프리카에서 반달족 왕이 사망하여 교회에 대한 박해가 끝나고 교계 제도가 부활했다는 기쁜 소식을 접했다. 그는 523년 8월 6일 선종하여 성 베드로 대성전에 안장되었고, 추모 비문은 그의 아들인 성 실베리오가 작성했다. 옛 “로마 순교록”은 8월 6일 목록에서 교황 성 호르미스다의 이름만 간단히 전해주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같은 날 목록에서, 교황 성 호르미스다가 평화의 기수로서 동방에서 아카키우스 이단 문제를 해소하는 데 성공하고, 서방에서 사람들이 교회의 권리를 존중하도록 만들었다고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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