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퀴리누스(또는 퀴리노)에 관해 여러 전설적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으나 역사적인 자료는 없다. 7세기에 기록된 “성 알렉산데르와 성녀 발비나 행전” 등을 통해 전해지는 전승에 따르면, 성 퀴리누스는 로마에 살던 호민관으로 트라야누스 황제의 명령에 따라 자기 집에 감금 중인 성 에벤시오(Eventius), 성 알렉산데르(Alexander), 성 테오둘로(Theodulus, 5월 3일)를 지키던 간수였다. 그는 이들의 영웅적인 순교 과정을 보면서 성 알렉산데르에 의해 그리스도교 신앙으로 인도되어 가족 모두 세례를 받고 개종하였다. 그의 딸인 성녀 발비나(Balbina, 3월 31일)는 성 알렉산데르에게 세례를 받고 나서 온갖 방법을 동원해도 고치지 못했던 부스럼 병이 기적적으로 치유되는 체험을 한 후 아버지의 모범을 따라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다. 세례를 받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성 퀴리노는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박해 때 체포되어 아우렐리아누스라는 재판관 앞으로 끌려갔다. 그는 인내를 갖고 온갖 고문 중에도 자신의 신앙을 용감하게 고백했다. 그는 혀가 뽑히는 고통과 고문대 위에서 사지를 잡아당기는 고문을 당한 후 두 팔과 다리가 잘린 뒤 결국은 아피아 가도(Via Appia)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해 인근에 있는 프레텍스타투스(Praetextatus) 카타콤바에 묻혔다. 옛 “로마 순교록”이 전해주는 성 퀴리노의 순교 과정은 “성 알렉산데르와 성녀 발비나 행전”에서 유래한 전설적 이야기를 기초로 하고 있다. 그러면서 성 알렉산데르의 신원을 교황으로, 성 에벤시오와 성 테오둘로를 사제로 기록하였다. 로마의 호민관으로 로마에서 순교한 성 퀴리노는 11세기부터 독일 서부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Nordrhein-West falen) 주(州)에 속한 노이스의 수호성인으로 큰 공경을 받고 있다. 이는 1050년에 교황 레오 9세(Leo IX)에 의해 성 퀴리노의 유해 일부가 노이스의 수녀원에 보내졌고, 이를 기념하고 보관하기 위해 13세기 초에 노이스에 성 퀴리노 대성당이 건립되었다. 그리고 그에 대한 공경이 유럽 여러 나라로 빠르게 퍼져나갔다. 그의 축일은 옛 “로마 순교록”은 3월 30일로 기록하고 있으나 노이스를 중심으로 한 독일과 여러 나라에서 그의 유해 이장일인 4월 30일에 유해 행렬과 함께 축제를 거행해 왔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도 4월 30일 목록에서 로마의 아피아 가도에 있는 프레텍스타투스 공동묘지에 있는 성 퀴리노 순교자이자 호민관이 자기 믿음을 증언하기 위해 순교의 월계관을 썼다고 기록하였다. 그래서 성 퀴리노는 ‘로마의 성 퀴리노’보다는 ‘노이스의 성 퀴리노’로 더 널리 알려졌다. 교회 미술에서 성 퀴리노는 갑옷을 갖춰 입은 로마 장교의 모습으로 종종 9개의 둥근 원이 그려진 깃발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표현된다. 이는 라틴어에서 ‘9, 아홉’을 뜻하는 ‘Novem’과 ‘Neuss’의 라틴어 이름인 ‘Novaesium’의 어원을 해석하는 과정에서 나온 전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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