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카롤루스 보로메오(Carolus Borromeo, 또는 가롤로 보로메오)는 1538년 10월 2일 이탈리아 북부 마조레(Maggiore) 호수 근처의 아로나(Arona) 성(城)에서 지베르토(Giberto Borromeo) 백작과 교황 비오 4세(Pius IV)의 여동생인 마르게리타(Margherita de Medici)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교회에 봉사하고자 하는 열망이 커서 12살 때 산 그라티니아노(San Gratiniano) 수도원에서 삭발례를 받았다. 그 후 밀라노로 가서 프란체스코 알치아티(Francesco Alciati)에게서 교육을 받았으며, 1552년 파비아(Pavia) 대학교에 진학하여 1559년에 민법과 교회법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1559년 12월 25일, 그의 외삼촌인 지안 안젤로(Gian Angelo de Medici) 추기경이 비오 4세라는 이름으로 교황직을 계승하게 되었는데, 새 교황은 평소 눈여겨본 조카인 성 가롤로 보로메오를 로마로 불러들였다. 1560년 22살의 젊은 나이에 파격적으로 추기경으로 임명된 그가 가장 투철한 사명감으로 일했던 분야는 교황청 국무성 장관으로서의 직무였다. 특히 그는 트리엔트(Trient) 공의회 제3회기(1562~1563년) 동안 그의 외삼촌인 교황에게 가장 열성적이고 믿음직한 협력자이자 지원자였다. 성 가롤로 보로메오는 공의회 운영의 훌륭한 지도자로서 임무를 수행했고, 마지막 회기에서 공의회가 결정한 칙서들을 성문화하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1562년 11월 19일 그의 형 페데리고(Federigo)가 세상을 떠나는 슬픔을 겪은 그는 막대한 재산을 물려받는 보로메오 가문(家門)의 수장 직책을 거절하고 1563년 7월 17일 사제품을 받고 성직자로서의 신분에 맞는 생활을 하려고 더욱 분발하였다. 그는 ‘로마 교리서’로 알려진 “본당 신부들을 위한 로마 교리서”(Catechismus romanus ad parochos)의 편찬에 깊이 관여하는 한편, 로마 신학교의 혁신, 미사 경본과 성무일도 및 교회 음악의 개정과 개혁, 교부들의 저서 출판 등에 헌신하였다. 특히 그는 가톨릭교회의 공식 교리서가 출판되어야 한다는 트리엔트 공의회의 결정에 따라 1564년 1월 교리서 편찬을 위한 위원회의 위원장으로 임명되어 막중한 소임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이듬해 4월 교황에게 결과를 보고하였다. 1566년 비오 4세를 계승하여 교황으로 선출된 성 비오 5세(4월 30일) 교황은 이 교리서의 출간을 명해 “로마 교리서”를 발행하면서 특별히 성 가롤로 보로메오 추기경의 열정과 노력에 대해 치하하였다. 1565년 10월 밀라노 교구장으로 부임한 그는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강도 높은 개혁을 단행하여 밀라노 교구를 모범적인 주교좌로 만드는 놀라운 성과를 얻었다. 그는 또한 개혁과 쇄신 운동의 하나로 성직자와 평신도의 윤리와 생활 태도 개선을 위해 유익한 기준을 마련했으며, 성직자 교육을 위한 신학교를 설립하고, 어린이들과 어른들의 종교 교육을 위한 ‘그리스도인 교리 신심회’를 조직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교구 내에서 활동하는 예수회와 카푸친 수도회 등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그는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위한 지원을 제도적으로 보완했고, 프랑스 북부 두에(Douai)에 설립된 영국 대학을 지원하는 데도 호의적이었으며, 자신의 재임 기간에 11차례의 교구 시노드(Synod)와 6번의 관구 공의회를 개최하였다. 그는 사제직을 지망하는 후보자들을 위한 단체의 성격을 지닌 ‘성 암브로시오의 헌신회’(지금은 성 가롤로의 헌신회)를 설립했는데, 그들은 주로 설교 활동에 종사하면서 프로테스탄트의 침입을 저지하는데 힘을 기울이고, 타락한 신자들을 다시 교회로 불러들이는 데 큰 노력을 쏟아부었다. 1567년 그는 주교의 관할권에 대한 밀라노 의회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혔다. 사건의 발단은 그가 나쁜 생활에 물든 평신도 여러 명을 투옥한 것으로, 주교좌가 시 당국에 의해 심한 공격을 받게 되자 그는 그들을 모두 단죄하였다. 재차 그의 주교직이 시의원들로부터 도전을 받았을 때 교황은 그를 후원하고 시의회는 그들의 뜻을 고수함으로써 큰 파문을 일으킨 일이 있었다. 결국 그는 반대자들이 보낸 자객의 총에 맞기도 했는데, 다행히 총알이 몸을 스치고 가서 약간의 상처만 입기도 했다. 1576년 페스트와 기근으로 밀라노 인근의 주민들이 큰 곤경에 빠졌을 때, 그는 한 달 동안 매일 3천여 명의 주민들에게 음식을 제공하여 어려운 난국을 극복하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시의회와 교회 사이의 관할권 분쟁은 이후에도 계속되었으나 성 가롤로 보로메오는 그때마다 현명하게 대처하였다. 그는 영국 선교 길에 오르는 수많은 젊은 사제들을 접견하고 지원했으며, 밀라노 외에도 여러 교구를 방문해 개혁을 촉구하였다. 1583년에는 교황사절로서 스위스의 독일어권 지역을 방문해 그 지역의 프로테스탄트를 상대로 설교하여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다. 그는 1584년 10월 그가 즐겨 찾던 바랄로(Varallo)에서 피정과 휴식을 마치고 심한 고열을 앓아 밀라노로 돌아와 11월 3일 밤에 “주님, 제가 여기 대령했나이다”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선종하여 주교좌성당 중앙 제대 아래 묻혔다. 그는 가톨릭 개혁 운동의 기수들 가운데 한 사람이자 학문과 예술의 수호자였다. 비록 그는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위치에 있었지만, 항상 겸손하게 처신하고 성덕을 높임으로써 개혁의 반대자들로부터도 칭송을 받을 정도였다. 그는 자신의 성직자나 수도자 그리고 평신도들에게 권력을 남용한 적이 없다는 평을 들었다. 성 가롤로 보로메오는 1602년 5월 12일 교황 클레멘스 8세(Clemens VIII)에 의해 시복되었고, 1610년 11월 1일 교황 바오로 5세(Paulus V)에 의하여 성인품에 올랐다. 교회 미술에서 그는 추기경 복장을 하고 종종 회개의 상징인 밧줄을 목에 두른 모습으로 표현된다. 이는 그가 행렬 중에 회개의 의미로 밧줄을 목에 두른 일에서 기인하였다. 그는 성직자, 교리교사의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고 있다. 옛 “로마 순교록”과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 모두 11월 4일 목록에서 밀라노의 주교이자 추기경으로 교회의 필요에 귀를 기울이고 그리스도인들의 영혼 구원을 위해 애쓴 참된 목자였던 그에 대해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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