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Roma)의 평범한 사제이던 성 코르넬리우스(또는 고르넬리오)는 성 파비아노(Fabianus, 1월 20일) 교황이 순교한 후 여러 사정으로 14개월 동안 지연되었던 로마의 주교로 251년 4월에 선출되었다. 이렇게 오랫동안 교황 선출이 지연된 것은 데키우스 황제의 극심한 그리스도교 박해 때문이었다. 그가 재임 기간 중 이룬 주요 업적은 박해 중에 배교를 선언했던 신자들을 용서하고 다시 교회로 받아들이는 화해 정책이었다. 왜냐하면 데키우스 황제의 박해 중에 배교를 선언하거나 돈을 주고 이교 신상 앞에 분향했다는 증서를 로마 관리에게 구한 이들도 있었는데, 박해가 끝나자 그들 중에 다시 교회로 돌아오기를 희망하는 이들이 많았다. 그런데 교황좌가 공석으로 있는 동안 로마 교회를 돌봤던 노바티아누스(Novatianus)는 새 교황 선출에 불만을 품고 스스로 로마 교회의 주교라 칭하며 자기를 지지하는 주교에게 주교품을 받고 교회의 분열을 심화시켰다. 게다가 그는 배교를 절대 용서받을 수 없는 죄로, 심지어는 죽을 때까지도 용서받을 수 없는 죄로 단죄하며 교회 또한 그러한 죄를 용서할 권한이 없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교황 성 고르넬리오는 교회가 회개하는 배교자를 용서하는 권한이 있고, 합당한 보속을 행한 후 교회에 다시 나올 수 있고 성사도 받을 수 있다고 선언하였다. 아프리카 교회의 핵심인 카르타고(Carthago)의 성 치프리아노(Cyprianus, 9월 16일) 주교도 교황의 이러한 뜻을 이해하고 지지하였고, 교황 또한 그를 적극적으로 옹호하였다. 노바티아누스는 소수의 지지자와 함께 새 교회를 세운 후 대립 교황이 되었다. 노바티아누스의 극단적 엄격주의를 옹호하던 무리는 재차 힘을 규합하여 동방에서 크게 영향을 미쳤다. 이에 성 고르넬리오 교황은 교회가 통회하는 배교자들을 용서할 권한이 있음을 재천명하고, 카르타고 교회 회의에서 천명한 사실을 재확인하는 회의를 열었다. 교황의 제의로 251년 10월 로마에서 개최된 회의에는 60명의 주교와 많은 사제와 부제들이 참석했다. 이 회의를 통해 성 고르넬리오 교황은 노바티아누스와 그의 추종자들의 가르침을 단죄하고 교회의 질서를 바로잡았다. 그런데 252년 6월에 갈루스 황제가 그리스도교 박해를 재개했을 때 성 고르넬리오 교황은 체포되어 첸툼첼레(Centumcellae, 현재 로마의 항구도시인 치비타베키아[Civitavecchia])로 유배되었다가 그곳에서 당한 모진 고문의 후유증으로 인해 이듬해 6월 순교자로서 삶을 마감하였다. 그의 시신은 후대 9월 14일에 로마의 아피아 가도(Via Appia)에 있는 칼리스투스 카타콤바의 루치나(Lucina) 묘역에 안장되었다. 그의 묘비명은 라틴어로 새겨진 최초의 교황 비문으로 그를 ‘순교자’로 표기하였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9월 14일 목록에서 성 고르넬리오 교황 순교자의 업적과 고난 그리고 묘지 이장에 대해 기록하면서 전례적으로는 카르타고의 성 치프리아노 주교와 함께 9월 16일에 기념한다고 언급하였다. 이는 교황 성 고르넬리오와 성 치프리아노 주교가 노바티아누스 이단과의 대립 중에 맺은 굳은 우정을 기억하기 위함이다. 교회 미술에서 교황 성 고르넬리오는 보통 뿔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되는데, 이는 그의 이름이 라틴어 코르누(Cornu : 소뿔, 뿔피리, 신호나팔)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곁에 소를 두고 있는 모습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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