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라우렌시오 루이스(Laurentius Ruiz)와 성 도미니쿠스 이바네스 데 에르키시아(Dominicus Ibanez de Erquicia, 또는 도미니코 이바녜스 데 에르키시아)와 성모 마리아의 성 야고보 큐세이 토모나가(Jacobus Kyushei Tomonaga de Santa Maria)와 13명의 동료 순교자들은 일본 나가사키(長崎) 지방에 교회를 설립하기 위해 노력하다가 당국에 의해 체포되어 1633년, 1634년, 1637년에 모두 순교하였다. 그들은 체포된 이후 잔혹한 고문을 당했고, 그 시신마저도 불태워진 후 다른 그리스도인들이 순교자의 유해를 공경하지 못하도록 나가사키 바다에 뿌려졌다. 이들 16명의 순교자를 출신 국가별로 보면 일본인 9명, 에스파냐인 4명, 프랑스인 1명, 이탈리아인 1명, 필리핀인 1명이다. 신분으로 보면 9명은 도미니코회 사제, 2명은 협력자(수련자) 형제, 2명은 제3회원, 그리고 3명은 평신도였다. 도미니코회 3회원이었던 오무라(Omura)의 성녀 마리나(Marina)와 성 안토니오 곤살레스(Antonius Gonzalez) 신부를 제외한 모든 순교자는 나가사키 해안 근처에 있는 니시자카(西坂, Nishizaka) 언덕에서 순교하였다. 이곳은 1697년에 일본 최초의 순교자들인 성 바오로 미키(Paulus MIki, 2월 6일)와 동료 순교자 25위가 십자가에 못 박혀 순교했던 곳이며, 또한 1617년에서 1632년 사이에 순교한 205위의 복자 중 다수가 순교했던 곳이었다. 에스파냐 출신의 도미니코회 사제인 성 도미니코 이바녜스 데 에르키시아가 1633년 8월 14일 처음 순교한 이후 필리핀 마닐라(Manila) 출신 평신도인 성 라우렌시오 루이스가 1637년 9월 29일 순교할 때까지 이들의 순교는 계속되었다. 총 16명의 순교자 중 13명이 도미니코회 사제이거나 수련자 또는 3회원이고 나머지 3명도 그들과 연관되어 있었다. 이들 순교자 대부분은 자기 나라에서 필리핀을 거쳐 일본으로 들어왔다. 성 도미니코 이바녜스 데 에르키시아는 1589년 에스파냐 북부 바스크 지방 기푸스코아(Gipuzkoa)의 레길(Regil)에서 태어나 도미니코회에 입회하였다. 에스파냐 관구 소속으로 신학 공부를 마친 그는 필리핀 선교를 위해 1610년 에스파냐를 떠나 멕시코를 거쳐 필리핀으로 향했다. 그는 1587년 필리핀에 설립된 도미니코회(설교자회)의 묵주기도의 성모 마리아 선교 관구 소속으로 1611년에 마닐라에 도착해 이듬해에 사제품을 받았다. 그리고 루손섬(Luzon Is.) 북쪽에서 선교사로 활동하고, 가톨릭으로 개종한 중국 이민자들의 정착지인 비논도(Binondo)에서도 사목했다. 그 뒤에는 마닐라의 산토 토마스(Santo Tomas) 대학교에서 교수로 활동하였다. 그러던 중 일본의 그리스도교 박해로 인해 도미니코회 선교사가 부족하다는 말을 듣고 1623년에 상인으로 위장해 일본으로 들어가 신분을 숨기고 활동했다. 그런데 그가 도착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에스파냐 사람과 선교사의 일본 거주를 금지하는 칙령이 발표되었다. 그는 10년 정도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신분을 숨기고 활동하며 신자들을 위로하고 배교자들을 주님과 화해시키고 성사를 집전하였다. 감시를 피하려고 주로 밤에 활동하며 한곳에 오래 머물지 않았다. 1625년에는 관구 대리로 임명되어 2년 동안 일본 북부 지방에 머물렀다. 당국의 집요한 추적을 받던 그는 1633년 7월에 어느 배교자의 고발로 체포되어 나고야(Nagoya)의 감옥에 갇혔다. 그 후 나가사키로 압송되어 혹독한 심문과 끔찍한 고문을 받았다. 십자가형이나 참수형 외에 당시 대표적인 고문 방법으로는 물고문이나 손톱 아래 날카로운 대나무나 쇠바늘을 꽂아 고통을 주는 것뿐 아니라 가장 끔찍한 고문인 ‘아나츠루시’(Ana-tsurushi)도 있었다. 이는 죄인을 밧줄로 묶어 거꾸로 매달고 관자놀이에 작은 구멍을 내 머리로 쏠린 피를 조금씩 빼내며 더러운 오물로 가득한 구덩이에 몸통을 집어넣는 잔혹한 고문이었다. 성 도미니코 이바녜스 데 에르키시아는 8월 13일 교수대에 거꾸로 묶여 아나츠루시 고문을 당하다가 다음날인 8월 14일 44살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그의 시신은 불태워져 재마저 바다에 뿌려졌다. 성 도미니코 이바녜스 데 에르키시아 신부는 선교활동을 수행하면서 일본인 평신도이자 도미니코회 협력자인 성 프란치스코 쇼예몬(Franciscus Shoyemon) 형제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성 프란치스코 쇼예몬은 가톨릭으로 개종한 후 선교사를 위한 통역가이자 교리교사로 헌신하였다. 그러던 중 1633년 체포되어 감옥에 갇혀 처형을 기다리던 중 사형선고를 받고 투옥된 성 도미니코 이바녜스 데 에르키시아 신부를 만났다. 그는 죽기 전에 도미니코회에 입회하기를 청했고, 감옥에서 성 도미니코 이바녜스 데 에르키시아 신부에 의해 도미니코회에 받아들여졌다. 그리고 8월 14일에 성 프란치스코 쇼예몬은 도미니코회 수련자로서 영적 사부와 함께 주님을 증거하며 순교의 길로 들어갔고, 시신도 화장되어 함께 바다에 뿌려졌다. 성 라우렌시오 루이스와 성 도미니코 이바녜스 데 에르키시아와 성모 마리아의 성 야고보 큐세이 토모나가와 13명의 동료 순교자들은 1981년 2월 18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 10월 22일)에 의해 순교자 대부분과 인연이 있는 도시인 필리핀의 마닐라에서 복자품에 올랐다. 이는 역사상 처음으로 로마 밖에서 거행된 시복식이었다. 그리고 그들 모두 1987년 10월 18일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같은 교황에 의해 시성되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8월 14일 목록에서 일본의 나가사키에서 도미니코회의 사제이자 교리교사였던 성 도미니코 이바녜스 데 에르키시아와 같은 수도회의 수련자이자 교리교사였던 성 프란치스코 쇼예몬이 도쿠가와 이에미츠(德川家光) 쇼군이 통치하던 시대에 그리스도의 이름에 대한 증오로 가진 이들에 의해 살해당했다고 기록하였다. 개정 “로마 순교록”은 ‘일본의 16위 순교자들’이 순교한 날에 그들의 행적을 기록해 기념하도록 하고 있는데, ‘성 라우렌시오 루이스와 15명의 동료 순교자들’로서 16위 순교자 모두를 함께 기념하는 날은 9월 28일로 정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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