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다비드 우리베 벨라스코는 1889년 12월 29일 칠라파(Chilapa) 교구에 속한 멕시코 남부 태평양 연안 게레로(Guerrero) 주(州)의 부에나비스타 데 쿠에야르(Buenavista de Cuellar)에서 가난한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칠라파의 신학교에서 수학한 후 1913년 3월 2일 사제품을 받았다. 그는 여러 지역에서 본당 사목을 수행했는데, 반가톨릭적인 멕시코 정부의 폭력에 직면해 많은 고초를 겪어야 했다. 그는 게레로의 이괄라(Iguala)에서 본당 사목을 하면서 개신교와 정부에 동조해 가톨릭교회에서 분리되려는 세력이 득세하던 지역이었기에 힘들게 사제직을 수행해야 했다. 1926년 가톨릭교회의 공적인 전례 거행이 금지되고 성당마저 폐쇄되자 그는 은밀히 사제직을 수행했다. 그러나 1927년 4월 7일 체포되어 모렐로스(Morelos) 주의 쿠에르나바카(Cuernavaca)로 끌려갔다. 그를 체포한 군인은 만일 그가 가톨릭교회를 반대하는 헌법에 서명하고 정부에 의해 설립된 어용(御用) 천주교회의 주교가 되는 것을 수용한다면 모든 형태의 권리를 보장하고 자유를 주겠다고 제의했다. 하지만 그는 굳건한 믿음으로 이 모든 제안과 회유를 단호히 거부했다. 감옥에서 쓴 마지막 글에서도 그는 박해자들이 자신을 모함해 적용한 모든 범죄 사실에 대해 결백하며, 하느님의 손길 안에서 모든 원수를 용서한다고 적었다. 그는 1927년 4월 12일 모렐로스 주의 산 호세 비스타 에르모사(San Jose Vista Hermosa) 역 근처로 끌려가 총에 맞아 살해되었다. 그의 유해는 고향 본당에 안치되었다. 성 다비드 우리베 벨라스코는 1992년 11월 22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복되었고, 2000년 5월 21일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같은 교황으로부터 멕시코 혁명정부의 부당한 종교 탄압에 저항해 발생한 크리스테로 전쟁(The Cristero War, 1926-1929년)과 관련해 순교한 성 크리스토포로 마가야네스(Christophorus Magallanes) 사제와 24명의 동료 순교자들 가운데 한 명으로 성인품에 올랐다. 로마 보편 전례력 안에서 그들의 기념일은 시성식이 거행된 5월 21일로 결정되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도 그들이 각각 순교한 날 목록에서 순교 사실을 전해주고, 5월 21일 목록에서 성 크리스토포로 마가야네스 사제와 동료 순교자들이 멕시코의 여러 지역에서 박해를 받으면서도 그리스도 왕을 고백하고 순교의 월계관을 썼다고 기록하였다.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는 같은 날 시성식에서 성 호세 마리아 데 예르모 이 파레스(Jose Maria de Yermo y Parres, 9월 20일) 신부와 멕시코 여성으로서는 처음으로 성녀 마리아 데 헤수스 사크라멘타도(Maria de Jesus Sacramentado, 7월 30일) 수녀를 성인품에 올려 모두 27위의 멕시코인 성인이 탄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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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 성인명 | 제목 | 작성자 | 작성일 | 조회수 | 추천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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