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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 데 베탕쿠르트(4.25)

베드로 데 베탕쿠르트(4.25) 기본정보 [기본정보] [사진/그림] [자료실] 인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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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명 베드로 데 베탕쿠르트 (Peter de Betancurt)
축일 4월 25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3회원, 설립자
활동지역 과테말라(Guatemala)
활동연도 1626-1667년
같은이름 베드루스, 베탄커, 베탄쿠르트, 베탕커, 페드로, 페트루스, 피터
성인 기본정보

   성 베드로 데 베탕쿠르트(Petrus de Betancurt)는 1626년 3월 21일(또는 19일) 아프리카 북서부 대서양에 위치한 에스파냐령 카나리아 제도(Canary Islands)에 속한 테네리페(Tenerife) 섬의 빌라플로르(Vilaflor)에서 태어났다. 영웅적인 성덕으로 잘 알려진 그의 생애는 복음에 대한 충실함으로 대변된다. 그는 카나리아 제도의 노르만족 정복자들 중 하나인 후안 데 베탕쿠르트(Juan de Betancurt)의 후손이었지만, 그의 부모와 가족은 매우 가난했다. 그래서 그는 어려서부터 얼마 안 되는 양떼를 돌보는 목동으로 일을 시작했다. 그의 부모는 그가 신앙 안에서 건강하게 자라도록 돌보았고, 어린 베드로는 자연스럽게 깊은 명상적 영혼을 갖고 성장했다. 그래서 그는 소년 시절부터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들 안에서 하느님을 보는 법을 배워나갔다.

   서인도 제도(West Indies, 오늘날의 아메리카)에서 사는 사람들의 비참한 생활상에 대해 들었을 때, 그는 그곳에 그리스도의 메시지를 전해야 할 강력한 소명을 느꼈다. 그래서 24세가 된 1650년, 성 베드로 데 베탕쿠르트는 자신의 한 친척이 총독의 비서로 일하고 있던 과테말라를 향해 출발했다. 하지만 그가 준비한 돈은 아바나(Havana)에서 이미 다 떨어졌다. 그래서 그는 부두에서 힘든 일을 하며 비용을 지불해야 했고, 또 과테말라시티까지 갈 여비 또한 마련해야 했다. 이렇게 힘든 여정 끝에 그는 무사히 과테말라시티에 도착했다.

   당시 너무나 가난했던 그는 하루를 버틸 빵을 얻기 위해 구호품을 나누어주던 프란치스코 수도원 앞에 줄을 서야 했다. 하지만 여기에서 그는 자신을 환대하고 또 일생 동안 그의 상담자가 되어준 유명한 선교사였던 페르난도 에스피노(Fernando Espino) 수사를 만나게 되었다. 페르난도 수사는 그 지방의 직물공장에서 일할 수 있도록 일자리도 찾아주었다. 1653년 성 베드로 데 베탕쿠르트는 그 지방의 예수회 대학에 들어가 사제가 되고 싶어 하는 소망이 자신 안에 있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산 보르자(San Borgia)에 있는 예수회 대학에 들어갔지만 학업에 자질이 부족해 중도에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하느님의 섭리는 다시 한 번 그를 도와 이곳에서 장차 그의 고해신부가 되어줄 예수회의 마누엘 로보(Manuel Lobo) 신부를 만나게 해주었다.

   페르난도 에스피노 수사는 그에게 평수사로서 프란치스코회에 입회할 것을 권유했지만, 그는 하느님께서 자신이 세상 안에 남아 살아가길 원하심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1655년 프란치스코 재속 3회에 입회해 서원하면서 성 요셉의 베드로(Pedro of St. Joseph)라는 이름을 받았다. 이때부터 성 베드로 데 베탕쿠르트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고된 일과 속에서 고통 받는 이들을 위해 자신의 모든 시간을 헌신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인간에 대한 너그러움과 진실한 인류애를 갖고 하느님의 뜻에 자신의 모든 것을 투신하면서 아프리카 출신 노예들과 비인간적인 노동으로 고통 받는 인디오들, 이민자들, 버려진 아이들의 사도가 되어갔다. 그리스도의 사랑에 고무된 그는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고자 노력했다. 1658년 그는 한 작은 오두막집을 얻어, 도시의 병원으로부터 버려졌지만 여전히 간호가 필요한 가난한 이들을 위한 병원으로 변모시켰다. 이 병원은 ‘베들레헴의 성모님’으로 명명되었다.

   그는 노숙자들을 위한 쉼터와 가난하고 버려진 아이들을 위한 학교를 설립하고 작은 경당도 지었다. 가난한 이들을 돕기 위해 시민들과 교회당국으로부터 모금활동을 펼쳤고, 가난한 사제들의 미사 봉헌을 위해 거리에서 기금을 모금하기도 하고, 이른 시간에 봉헌되는 미사를 위해 기부함으로써 가난한 사람들이 일 때문에 미사에 빠지지 않도록 배려했다. 그는 어린이들의 교육을 위한 시설 안에 작은 경당도 마련했다. 그리고 매년 8월 18일에 그는 어린이들을 모아 프란치스코회 수사들이 바치던 성모님의 칠락 묵주기도를 암송했고, 이 관습은 오늘날까지도 과테말라에서 계속되고 있다.

   그는 자신과 뜻을 같이 하는 남녀 젊은이들을 모아 조직했고, 이는 후에 베들레헴 형제회와 베들레헴 자매회로 발전했다. 그는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하기 위해 기도와 절제와 인내에 기초하여 가난한 이들과 병든 이들 그리고 불행한 이들을 위해 봉사하는 활동 사도직을 포함하는 새로운 규칙서도 작성했다. 베들레헴 수도회는 이렇게 설립되었다. 전 생애를 통해 그의 영적 묵상의 중심 주제는 ‘베들레헴의 소년 예수’였다. 늘 가난한 이들 안에서 소년 예수의 얼굴을 보고 그들에게 경건하게 봉사했던 그는 1667년 4월 25일 41세를 일기로 과테말라시티에서 선종해 안티구아(Antigua)에 있는 성 프란치스코 성당에 묻혔다.

   성 베드로 데 산 호세 데 베탕쿠르트(Pedro de San Jose de Betancurt)의 시복시성을 위한 심사는 이미 1709년에 시작되었다. 그는 1980년 6월 22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2002년 7월 30일 아메리카 대륙 순방 중 사목방문을 위해 과테말라를 찾은 같은 교황으로부터 과테말라시티에서 시성되었다. 이로써 그는 과테말라뿐만 아니라 중앙아메리카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성인품에 올랐다. 일생 동안 가난한 이들과 함께 살며 그들을 위해 헌신했던 그는 ‘아메리카의 성 프란치스코’로 불리며 존경을 받고 있다. 그의 축일은 성 마르코(Marcus) 복음사가와 겹치는 관계로 전날인 4월 24일에 기념하기도 한다.

참고자료

  • 한국교회사연구소 엮음, 송영웅 옮김, 오늘 성인(성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시성한 성인들) - ‘성 페드로 데 산 호세 데 베탕쿠르트’, 서울(한국교회사연구소), 2014년, 171-175쪽.

사진/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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