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향(文鄕)과 예향(藝鄕), 절향(節鄕)의 고장 강릉(江陵)은 산 호수 바다 삼박자를 고루 갖춘 천혜의 수려한 자연경관과 전통문화가 살아 숨 쉬는 고도(古都)이다. 고구려 시대부터 도시가 형성돼 ‘하시랑’, ‘하슬라(何瑟羅)’로 불려 왔던 고도 강릉에도 어김없이 순교의 보혈(寶血)이 서려 있다. 바로 KBS 강릉 방송국 옆에 있는 강릉 대도호부 관아가 그 현장이다. 강릉 대도호부 관아는 고려 시대부터 조선 시대에 걸쳐 중앙의 관리들이 강릉에 내려오면 머물던 행정 기관이다. 1994년 7월 11일 강릉 임영관지라는 명칭으로 사적 제388호로 지정되었다가, 2014년 11월 27일 강릉 대도호부 관아로 변경되었다.
조선 시대 기록에 따르면 고려 태종 19년(936년)에 세워져 모두 83칸의 건물이 있었으나 대부분 일제에 의해 철거되고 옛 모습이 남아 있는 것은 국보 제51호로 지정된 ‘임영관 삼문(臨瀛館三門)’인 ‘객사문(客舍門)’과 강원도 유형 문화재 제7호로 지정된 ‘칠사당(七事堂)’ 뿐이다. 나머지 건물들은 1998년 정식 발굴조사를 시행해 2006년 1차로 복원을 마친 건물들이다. 현재도 여러 건물에 대한 복원 작업이 진행 중이다. 임영관 삼문 길 건너편에는 고전미와 현대미가 절묘하게 조화된 임당동 성당이 자리하고 있어 유서 깊은 교회의 건축 양식도 감상할 수 있다.
강원도 지방, 특히 춘천 교구 내 영동 지역의 순교 기록을 찾기란 문헌상 애로점이 많다. 강릉 지역의 순교자로 교회 공식 문헌에 나타나고 있는 이는 “치명일기”(致命日記)에 기록되어 있는 심능석 스테파노와 이유일 안토니오 정도이다. “치명일기”에 있는 심 스테파노에 관한 내용을 보면 “본디 강릉 굴아위에 살더니, 무진 5월에 경포(포도청 포졸)에게 잡혀 지금 풍수원 사는 최 바오로와 함께 갇히었다. 치명하니 나이는 29세 된 줄은 알되 치명한 곳은 자세히 모르노라.”라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교회사학자들의 연구 결과와 지금까지 구전으로 전해 오는 내용을 종합해 보면 강릉에서 병인박해가 한창이던 1868년 5월에 이유일 안토니오와 심능석 스테파노 등이 체포되어 서울의 좌포도청으로 옮겨져 그곳에서 심문을 받고 순교했다. 이들이 서울로 이송되기 전에 강릉 대도호부 관아를 경유했을 가능성이 크다. 현재 심 스테파노와 이 안토니오는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 안건으로 한국 천주교회에서 시복을 추진하고 있다.
1971년 12월 15일 강원도 유형 문화재 제7호로 지정된 칠사당은 대도호 부윤(大都護府尹)이 주재하던 조선 시대 관공서로 호적(戶籍), 농사(農事), 병무(兵務), 교육(敎育), 세금(稅金), 재판(裁判), 풍속(風俗)에 관한 일곱 가지 정사(政社)를 시행하던 곳이다. 따라서 ‘칠사당’이란 현판은 은유적인 표현이 아니고 실제적인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이 건물의 최초 건립 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인조 10년(1632년)에 중건하고, 영조 2년(1726년)에 중수했으며, 고종 3년(1866년)에는 진위병(鎭衛兵)의 군영으로 쓰이다가 이듬해 화재로 타 버린 것을 강릉 부사 조명하(趙命夏)가 중건했다고 한다.
교회사학자들은 여러 순교자 증언록을 인용해 이곳 칠사당에서 병인박해 때 심문도 없이 목이 잘리는 참수형으로 많은 교우가 순교했다고 말하고 있다. 칠사당 동헌 마당 한가운데에는 체포된 천주교인들을 묶어 갖은 고문을 가하며 심문했던 것으로 전해지는 고목이 아직도 푸르름을 간직한 채 남아 있다. 현재 강릉에 남아 있는 유일한 조선 시대 관청 건물인 칠사당은 한쪽이 다락 형식으로 된 ‘ㄱ’자 형태의 건조물로 전국에서도 보기 드문 단아한 조선 시대의 건축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칠사당 뒤편에 있는 임영관 삼문(객사문)은 고려 말에 지어진 것으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문으로 강원도 내 건축물 중 유일하게 국보 제51호로 지정된 문화재이다. 간결하고 소박한 주심포(柱心包)계 양식과 맞배지붕의 삼문(三門)으로, 배흘림기둥은 현존하는 목조 문화재 중 가장 크고 기둥과 지붕이 만나는 곳의 세련된 조각 솜씨는 고려 말과 조선 초기 건축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임영관 삼문(객사문)은 노후와 변형으로 인해 완전해체한 후 보수하여, 고려 태조가 재위 19년(936년)에 창건했다는 임영관 내의 전대청(殿大廳), 중대청(中大廳), 동대청(東大廳), 서헌(西軒) 등과 함께 2006년 10월 복원되었다.
강릉 대도호부 관아 안에 들어서면 박해 시대 천주교인들이 무수한 고문에 못 이겨 신음하던 처절한 모습을 떠올리게 되는데, 이곳에서 바라다보이는 임당동 성당의 전경은 자유로운 신앙생활에 만취해 있는 우리가 신앙 선조들로부터 얼마나 값진 은혜를 받고 있는가를 절감하게 해준다.
강릉 대도호부 관아 인근에 있는 임당동 성당은 고전미와 현대미가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 수려한 교회 건축물로 정평이 나 있다. 강릉을 찾으면 꼭 한번 방문하여 전례에 참례할 것을 권한다. 중국인 건축가 가(賈) 요셉이 설계해 1954년에 착공, 1955년에 완공된 현재의 임당동 성당은 고딕 양식을 변형한 장방형 건물로 정면 중앙부 종탑과 성당 외곽이 원형 그대로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어 1950년대 성당 건축의 전형을 감상할 수 있다.
2010년 2월 19일 임당동 성당은 근대 종교 건축물로서의 그 가치를 인정받아 등록문화재 제457호로 지정되어 강릉시의 제1호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가 되었다. 특히 임당동 성당 중앙부의 뾰족한 종탑과 지붕 장식, 첨두형 아치 창호 장식, 원형 그대로 완벽하게 보존된 외벽 부축벽 등이 그 가치를 인정받았다. 임당동 성당은 1950년대의 전형적인 고딕 양식 성당이라는 문화적 가치뿐만 아니라 영동 지역 신앙의 중심지로서, 영동 지역 많은 본당의 모(母)본당이라는 역사성도 겸비하고 있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내용 일부 수정 및 추가(최종수정 2019년 12월 1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