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광리 공소는 1887년에 설립된 강릉 지역 천주교의 모태로서 그동안 국내의 역사적인 소용돌이 속에서도 잡초처럼 신앙의 씨앗이 싹튼 곳이다.
강원도 영동 지역에 천주교가 적극적으로 전파되기 시작한 계기는 고종 3년(1866년) 대원군에 의해 일어난 병인박해라고 할 수 있다. 강릉 지방에 천주교 공소가 만들어진 시기는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에 “구한말 19세기 말경에 구정면 금광리와 내곡동 등지에 천주교인들이 이주하여 옹기 굽는 일이나 농사를 지으면서 은밀하게 전교를 하고 있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현존하고 있는 금광리 공소 현판에 ‘1887년 창립’이라고 적혀 있는 것과 부합한다. 이런 사실을 종합하면 신자들이 강릉에 이주한 것은 이보다 훨씬 이전이었을 것이다.
금광리 공소의 회장으로 오랫동안 봉사한 김중철(필립보) 씨의 증언에 의하면 그의 증조부, 증조모가 교우들과 함께 박해를 피해 경주에서 금광리로 왔다고 하며, 이영녀 씨도 그의 시아버지인 조중서(趙仲署) 씨가 소년 시절에 경기도 여주에서 금광리로 피난해 왔다고 한다. 또한 현북면 명지리 공소의 김정옥 씨도 그의 증조부인 김 요한이 대원군의 박해를 피해 금광리에 정착했다고 한다(노암동 본당 13년사).
공소 초기에는 원산의 백응만 신부가 배를 타고 와서 전교했고, 그 후 안변과 원산 본당의 주 신부, 표 신부도 배를 타고 와서 전교했다고 한다. 현재 금광리 공소는 1987년 설립된 강릉 소재 노암동 성당의 공소로, 현 공소 건물은 1950년대에 본래 있던 공소터에서 길가 쪽으로 이전했다고 한다. 오늘날 공소가 있는 지역이 행정구역상 어단리에 속하기 때문에 어단리 공소로 불리기도 했다. 공소 바로 옆에 김중철(필립보) 공소회장의 집이 있다.
지금까지 영동 지역 최초의 공소는 원산교구 소속인 구정면 금광리 공소라고 알려져 있었는데 “뮈텔 주교일기”를 자세히 분석한 최근의 연구결과에 의하면 현재 없어진 강릉시 구정면 금광리 삼정평 공소로 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금광리 공소가 본당이었던 과정 원산 본당에 소속되었던 영동 지방에 1921년 가을 판공 때 금광리 신자들은 최문식 양양 본당 주임신부에게 보좌신부인 이철연 신부를 금광리에 파견해 주도록 요청했다. 실제로 강릉 이남의 공소들은 신자 수도 많았으며, 상도문(양양) 본당(1921년 4월 17일 설립)과의 거리도 멀었다. 이에 최문식 신부는 보좌 이철연 신부를 그해 12월에 그곳으로 보내 금광리 본당(주문진 본당의 전신)을 설립하였다. 이처럼 영동 지역에는 1921년에 두 개의 본당이 설립되었다. 그러나 이곳 신자들이 열심이기는 하나 거주하기에 적당하지 않은 데다가 발전 가능성도 적었으므로 당시 경성교구 부주교이던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드브레(Devred, 兪) 주교의 지시로 1923년 주문진에 성당 부지를 매입했다. 그리고 1923년 11월 23일 금광리를 떠나 주문진(당시 신리면 橋項里 133)으로 이전하며, 이때부터 주문진 본당이란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했고 금광리는 주문진 본당 공소가 되었다. [출처 : 오영환, 한국의 성지 - http://www.paxkorea.kr, 2005, 내용 일부 수정 및 추가(최종수정 2019년 12월 1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