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울대리의 의령 남씨 가족 묘소에는 1866년 병인박해 때 서소문 밖에서 순교한 성 남종삼(南鐘三) 요한과 공주에서 순교한 성인의 부친 남상교(南尙敎) 아우구스티노, 창녕으로 유배 갔다가 치명한 부인 이조이 필로메나와 창녕으로 유배 갔던 막내아들 남규희(南揆熙)의 묘가 있다. 전주 진영으로 끌려갔다가 순교한 장자 남명희(南明熙)의 묘는 없다. 서울대교구 길음동 성당 울대리 묘지 정문에서 왼쪽으로 표지석을 따라 10여 분 걸어 올라가면 ‘성 남종삼 요한과 가족 묘소’에 이르게 된다.
남종삼 성인은 103위 한국 성인 중에서 가장 높은 벼슬에 오른 분이다. 원래 생부는 남탄교(南坦敎)이나 장성한 뒤 슬하에 아들이 없던 백부 남상교의 양자로 들어갔다. 남상교는 정약용의 학통을 이은 농학자(農學者)로 충주 목사와 돈녕부(敦寧府) 동지사(同知事)를 지냈다. 남종삼의 학문과 사상 형성, 그리고 훗날 천주교에 입교한 데에는 부친의 영향을 컸다.
남종삼이 언제 입교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부친이 일찍부터 입교하여 신앙을 지켜 온 사실로 미루어볼 때 양자로 들어간 지 얼마 안 되어 천주교 교리를 알게 된 것으로 보인다. 입교한 뒤에도 자신의 관직 때문에 드러나게 교회 활동을 하지는 않았다. 기록에 나타나는 최초의 교회 활동은 1861년에 입국한 리델(Ridel) 신부에게 조선말을 가르친 것이나, 이전부터 이미 베르뇌(Berneux) · 다블뤼(Daveluy) 주교 등과 교류하면서 교회 일에 참여하고 있었다.
남종삼의 입교 후 가족들도 모두 천주교를 믿게 되었는데, 아버지 남상교는 관직에서 물러나 신앙생활에 더욱 전념하고자 충청북도 제천의 묘재로 이사해 은거 생활을 시작했다. 남상교는 이곳에 살면서 1866년 병인박해 때 공주 진영으로 이송되어 순교할 때까지 아들 남종삼이 찾아오면 가르침을 베풀며 신앙과 조국애를 일깨워 주었다.
높은 학문을 성취한 남종삼은 일찍이 과거에 급제해 지방 장관을 거쳐 철종 때에는 승지 벼슬에 오르고 고종 초에는 왕족의 자제를 가르치기도 했다. 그는 당시 부패한 많은 관리 중에서 돋보이는 청백리로, 의덕과 겸손의 가난한 생활을 통해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동료 관리들에게는 시기와 질시의 대상이 되는 한편 향교 제사 문제로 신앙과 관직 두 가지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했을 때 당당히 관직을 내놓았다. 남상교와 남종삼 부자의 묘재 정착은 평소 가까이 지내던 이들과의 교류가 계명을 지키며 신앙생활을 하는 데 어려움을 초래했기 때문에 내린 결정이었다. 이들 부자에게는 높은 벼슬, 명예와 권세, 안락한 생활 등 양반으로 누릴 수 있는 영화와 특권을 스스로 끊어 버린 일대 결단이었다.
철종이 승하하고 고종이 즉위하던 1863년 말경, 흥선 대원군이 정권을 잡으면서 남종삼은 좌승지로 발탁되어 다시 임금 앞에서 경서를 논하게 되었다. 그때 두만강을 사이에 둔 러시아가 수시로 우리나라를 침범하여 통상을 요구했다. 조야는 어찌할 줄 모르던 차에 남종삼은 ‘이이제이(以夷制夷)의 방아책(防我策)’이라 하여 국내의 프랑스 주교를 통해 한불 수교를 맺고 서양의 세력을 이용해 러시아를 물리칠 것을 건의했다.
흥선 대원군은 그의 건의를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런데 베르뇌 주교와 다블뤼 부주교가 모두 황해도와 충청도에서 전교 여행을 떠난 뒤라 약속 시각 내에 찾아내지 못하자 흥선 대원군의 초조는 분노로 바뀌었다. 평안도에서 소식을 전해 들은 베르뇌 주교가 급히 서울로 올라왔지만, 그때는 이미 러시아인들이 물러간 후였다. 상황이 급변하자 흥선 대원군은 다시 쇄국정책을 강화하고 정권 유지의 방편으로 천주교를 탄압하기 시작했다.
남종삼 승지는 일이 그르친 것을 깨닫고 묘재로 내려가 부친에게 이런 사실을 알렸다. 부친 남상교는 그의 말을 듣고 “너는 천주교를 위해 충(忠)을 다하였으나 그로 말미암아 너의 신명(身命)을 잃게 되었으니 앞으로 악형을 당하더라도 성교(聖敎)를 욕되게 하는 언동을 삼가라." 하고 가르쳤다.
부친의 준엄한 가르침을 받은 남종삼은 순교를 각오하고 배론 신학당을 찾아 푸르티에 신부, 프티니콜라 신부로부터 성사를 받고 한양으로 향했다. 이미 한양으로부터 체포령이 떨어져 있던 그는 결국 한양까지 가지 못하고 고양(高陽) 땅 잔버들이란 마을에서 체포되어 의금부로 끌려갔다. 의금부에서 배교를 강요당하며 심한 고문과 곤장을 맞으면서도 신앙을 지킨 남종삼은 참수형이 결정되어 홍봉주, 이선이, 최형, 정의배, 전장운, 그리고 베르뇌 · 다블뤼 주교와 함께 병인년 3월 7일 서소문 밖 네거리로 끌려가 참수되었다.
이후 남종삼의 시신은 홍봉주의 시신과 함께 용산 왜고개에 매장되었다가 1909년 유해가 발굴되어 명동 성당에 안치되었고, 1968년 10월 6일 시복식을 앞두고 1967년 10월 다시 절두산 순교성지 성해실로 옮겨져 안치되었다. 이때 성인의 유해 일부를 가족 묘소인 장흥면 울대리에 모셔 안장하였다.
한편 남종삼이 순교한 후 그의 가족도 모두 체포되어 부친 남상교는 공주 진영으로, 장자 남명희는 전주 진영으로 끌려가 순교하고, 부인 이조이 또한 유배지인 창녕에서 치명하고, 함께 경상도 지역 유배지로 간 막내아들 남규희와 두 딸 데레사와 막달레나는 노비 생활을 하게 되었다. 이렇게 3대에 걸쳐 4명이 순교하고, 나머지 가족 또한 유배지에서 고초를 겪었다. 남종삼 요한은 1984년 5월 6일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2004년 12월 30일 서울대교구 한국순교자현양위원회에서는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아 순례의 발길이 뜸했던 성 남종삼 요한과 가족 묘소를 성역화하기 위해 묘소 안내 표지석 4개를 설치하였다. 길음동 본당과 종친회의 협조를 얻어 “천주교 순교 성인 승지 남종삼 요한 묘”라고 새겨진 와비를 성인 묘역까지 올라가는 길 중간중간에 설치하였다.
성 남종삼 요한과 가족 묘소가 속한 의정부교구에서는 남종삼 성인의 순교 정신을 현양하고 본받기 위해 의정부 주교좌성당에서 출발해서 사패산을 넘어 남종삼 성인 묘와 순교자 황사영 알렉시오의 묘까지 순례하는 ‘순교자의 길’을 개발하여 실시하였다. 본당 관할구역 내에 묘소가 있는 송추 성당은 매월 마지막 주 토요일에 황사영 묘와 성 남종삼 묘 도보 순례 후 성 남종삼 가족 묘소에서 미사를 봉헌하고 있다. 의정부교구는 2018년 8월 24일자 공문을 통해 송추 성당을 남종삼 요한 성인과 가족 순교자 묘소와 황사영 알렉시오 순교자 묘소 순례지로 지정했다. 그리고 같은 해 9월 20일 기존의 복자 표기 남종삼 성인 묘비 옆에 성인 묘비를 새로 세우고 제막식을 거행했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내용 일부 수정 및 추가(최종수정 2021년 4월 1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