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남도 당진시 합덕읍에 위치한 신리 성지는 지금은 말끔하게 단장되었지만 불과 2000년대 초까지만 해도 구불구불한 길에 특별한 지형지물이 없어 택시 기사나 주민들에게 물어물어 찾아가야만 했다.
20-30평 정도 됨직한 자그마하고, 낡은 함석지붕으로 인해 조금은 초라해 보이는 공소 건물이 철조망에 둘러싸여 볼품없는 모습으로 서 있을 뿐이었다. 이곳이 바로 손자선 토마스(孫--, ?-1866년) 성인의 생가이자 조선교구 제5대 교구장인 다블뤼 안(Daveluy, 安敦伊, 1818-1866년) 주교가 머물며 내포 지방의 선교활동을 지휘하던 주교관이자 교구청이었다. 마당에는 순교 복자 기념비와 성모상이 그 허전함을 달래주었었다.
‘천주강생 1815년’에 지어진 이 생가는 박해시대 이래로 여러 차례 소유주가 바뀌었고 그 구조 또한 개조를 거듭해왔다. 하지만 1866년의 병인박해 때 다블뤼 주교를 비롯한 여러 신부들이 체포되기 전에 피신한 이곳에는 거의 기적적으로 당시의 유물들이 보존되어 오고 있다. 원래 초가집이었던 생가가 해방 후 양철 지붕으로 개량되었고, 1964년부터는 강당 형태로 개축되어 공소로 사용되었으나 본당 중심의 사목이 강화되면서 방치되기에 이르렀다.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으로 조선 교구 제5대 교구장을 지낸 다블뤼 주교는 1845년 7월 하순 상해로 가서 한국 교회 최초의 방인 사제 김대건 안드레아(金大建, 1821-1846년) 신부와 함께 그 해 10월 12일 전라도 강경의 황산포(黃山浦)에 첫발을 내디뎠다.
그 후 그는 1866년 병인박해의 와중에 순교하기까지 21년 동안 조선의 선교사로 활약, 당시 가장 오랫동안 조선에서 활동한 선교사가 되었다. 그의 가장 큰 업적은 한국 천주교회사와 조선 순교사의 편찬이었다. 그는 이 중요하고도 어려운 일을 교구장으로부터 위촉받아 1857년부터 새 자료를 발굴해 프랑스어로 옮기고 목격 증인들을 찾아 순교자들에 대한 증언을 수집하는 데 힘썼다.
특히 1859년을 전후해 그는 윤지충 바오로(尹持忠, 1759-1791년) 등 주요 순교자들의 전기를 파리 본부로 보내는 한편, 조선 천주교회사의 편찬을 위해 조선사에 관한 비망기와 조선 순교사에 관한 비망기를 저술해 1862년 모두 파리로 보냄으로써 후세의 귀중한 사료가 될 수 있었다. 더욱이 1863년 그의 집에 불이 나 조선말과 한문으로 된 “치명일기”와 주석책 등 귀중한 자료들이 모두 타 버렸기 때문에 이 책은 한층 더 가치 있는 것이 되었다.
바로 신리의 주교관에서 수집하고 기록한 순교사 및 역사 자료 7권이 1862년 10월 홍콩의 리부아 신부를 통해 파리로 전해져 달레의 “한국 천주교회사” 두 권으로 나오게 된 것이다.
또한 다블뤼 주교는 연풍 출신의 성 황석두 루카와 함께 신리에서 “영세대의”(領洗大義), “성찰기략”(省察記略), “신명초행”(神命初行), “회죄직지”(悔罪直指), “성교요리문답”(聖敎要理問答), “천주성교예규”(天主聖敎禮規) 등과 같은 수많은 교회 서적들을 집필하고 출판했다. 이처럼 신리는 한국 교회사의 귀중한 보고이자 최초의 근대적 출판 인쇄가 시작된 곳이다.
이 집에는 다블뤼 주교가 체포되기 바로 전날인 1866년 3월 11일 고향의 부모님께 마지막으로 보낸 눈물겨운 최후의 편지가 기념으로 액자 속에 끼워져 있다. 이 편지는 만주의 베롤(Verolls, 方) 주교에게 보내 프랑스에 있는 부모에게 전달하게 한, 이 세상에서는 마지막으로 올린 글(上書)이었다.
그는 1866년 베르뇌 주교에 이어 3월 11일 신리에서 1km 떨어진 거더리에서 붙잡혀 한양으로 압송되어 옥중에서 갖은 고문을 받고, 충청남도 보령의 수영(갈매못 해변)으로 이송되어 3월 30일 주님 수난 성금요일에 참수되었다. 베르뇌 주교를 도와 9년 동안을 부주교로서 그리고 주교의 순교 후 조선 교구의 제5대 주교가 된 지 21일 만에 장엄하게 순교한 것이다.
그 후 그는 1968년 10월 6일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복자위에 올랐고, 1984년 5월 6일에는 한국 천주교 전래 2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시성되었다.
이토록 유서 깊은 신리 순교사적지는 2002년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수녀들이 파견되면서 그 중요성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대전교구는 2003년 말 다블뤼 주교가 쓰던 옛 주교관(손자선 성인 생가)을 교회사적 고증을 거쳐 본래의 초가집으로 복원하고, 2004년 성역화를 본격화하면서 기념성당의 첫 삽을 뜨고 부지매입과 진입로 확장, 편의시설 확충 등을 거쳐 2006년 5월 6일 2년 가까운 공사 끝에 완공한 성 다블뤼 안토니오 · 성 손자선 토마스 기념성당 및 사제관과 복원된 주교관에 대한 축복식을 가졌다.
2008년 12월 22일에는 ‘당진 신리 다블뤼 주교 유적지’라는 명칭으로 충청남도 기념물 제176호로 등록되었고, 2009년 기념성당 외벽에 순교자들의 부활을 주제로 대형 부조상을 설치하고 다음해 7월말 야외성당(다블뤼 광장) 공사를 마무리하였다. 2013년 4월 20일 신리 성지 내에 성 다블뤼 기념관과 순교자 기념공원 기공식을 갖고 본격적인 공사에 들어가, 2014년 5월 6일 다블뤼 주교 시성 30주년을 기념해 봉헌식을 가졌다. 지하 2층 지상 4층의 성 다블뤼 기념관은 다블뤼 성인의 유품과 교회서적 등을 전시하고 있고, 기념공원에는 신리 성지에서 잡혀간 다섯 성인을 기리는 야외 경당을 봉헌하였다.
2017년 3월 25일에는 성 다블뤼 기념관 지하 2층에 국내 유일의 순교미술관을 개관하였다. 원로 한국화가인 이종상 요셉 화백이 신리 교우촌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성직자와 순교자들의 행적을 그린 순교 기록화 13점과 신리 성지 출신 순교성인 5위의 영정을 우리나라의 전통 채색 기법과 초상화 기법으로 제작해 봉헌하였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내용 일부 수정 및 추가(최종수정 2023년 8월 1일)]
신리와 갈매못 - 성인들의 체포와 순교지
여사울이 초기 교회의 못자리였다면, ‘신리’(당진군 합덕읍 新里) 일대는 박해 후기의 사적지였다. 내포 공동체는 거듭되는 박해로 수많은 순교자가 나왔지만 끈질기게 복음의 생명력을 이어가면서 언제나 새로운 지도자들을 탄생시켰다. 그 중에서도 우리는 거더리(예산군 고덕면 상궁리) 출신의 성인 손자선(孫 토마스)을 기억하고 있다. 1866년에 공주 관아에서 자신의 살점을 물어뜯어 신앙을 증거한 분으로 너무나 유명하기 때문이다.
이 거더리와 붙어 있는 마을이 바로 신리이다. 현재의 행정 구역상으로는 두 마을이 구분되어 있지만 교회사의 기록에 나타나는 거더리와 신리는 결국 같은 지역으로, 성 다블뤼(Daveluy, 安敦伊) 주교가 체포되었던 박해 시대의 교우촌이었다.
다블뤼 주교는 1845년 10월, 한국에 입국한 이래 주로 내포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한국 순교사와 교회사 자료 수집에 열중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저 유명한 다블뤼 주교의 “비망기”(備忘記)가 이 곳 신리에서 작성될 수 있었다. 그러나 1863년 주교의 거처에 화재가 발생하여 오랫동안 수집해 놓았던 귀중한 자료들이 타 버리고 말았다. 다행한 것은 다블뤼 주교가 그 전에 이미 순교사와 교회사를 정리하여 프랑스로 보낸 점이었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났을 때, 다블뤼 주교는 신리(거더리)에 있는 손치호(니콜라오) 회장 집에 머물고 있었다. 손 회장은 바로 손자선 성인의 숙부이다. 주교는 그 때 이웃에 있던 오매트르(Aumaitre, 吳) 신부와 위앵(Huin, 閔) 신부를 불러오게 하여 피신할 방도를 의논하고 헤어졌는데, 3월 11일 포졸들이 거더리로 몰려와 주교와 복사인 성 황석두(黃錫斗, 루가)를 체포하고 말았다. 이어 위앵 신부가 멀지 않은 소재(예산군 봉산명 금치리)에서 체포되었고, 오매트르 신부가 거더리에 들렀다가 체포되고 말았다.
다블뤼 주교 일행은 서울로 압송된 후 몇 차례의 신문에 이어 군문효수형의 판결을 받게 되었다. 이 때 제천 배론에서 체포된 성 장주기(張周基, 요셉) 회장이 그들 일행에 포함되었다. 그런 다음 이들 5명은 새 처형 장소로 결정된 ‘갈매못’(보령군 오천면 영보리의 고마 수영)으로 이송되어 3월 30일에 순교하였다. 굳이 이곳까지 순교자들을 끌고 와서 처형한 이유는 궁중에서 고종비(高宗妃)의 간택이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 후 여사울의 이존창 생가 터와 신리의 주교 댁은 오랫동안 잊혀져 오게 되었다. 그러나 신리의 주교 댁만은 인근 교우들 때문에 성 손자선이 태어난 곳이며, 다블뤼 주교의 거처라고 알려져 왔다. 이에 합덕 본당의 페랭(Perrin, 白) 신부는 1927년에 교우들의 협조를 얻어 이를 매입한 뒤 순교 기념비를 건립하고 축성식을 갖게 되었다. 당시까지도 신리 성지는 초가집이었으나, 훗날 지금과 같이 함석지붕을 새로 이었다고 한다.
이처럼 여사울은 내포 교회가 시작된 곳이며 신리는 내포 교회가 박해를 극복해 나가던 교우촌이었고, 갈매못은 성인들의 순교 터였다. 이들은 한국 천주교회 안에서 보이지 않는 역사의 끈으로 이어져 왔으며, 그 끈은 오늘의 교회를 지탱해 주고 있는 생명선과 같은 것이 되었다. 체포되기 직전에 다블뤼 주교가 동료인 만주 교구장에게 쓴 1866년 3월 10일자 서한에서 순교자의 마지막 행로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교구장 베르뇌 주교와 선교사들이 체포되었습니다. 피할 길이 없습니다. 내 차례도 올 것이니, 제가 싸움터에서 견디어 낼 수 있기를 하느님께 청합니다. [출처 : 차기진, 사목, 1999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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