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백산맥 자락의 문경 지방과 충청도의 경계지역에 있는 주흘산(1106m), 조령산(1017m), 백화산(1063m), 대미산(1115m) 등은 이 지방에서 최고봉에 속하는 산들이다. 이 산들 사이의 조령(642m), 이화령(548m), 하늘재(525m) 등은 옛날부터 경상도에서 서울로 가는 이름난 통로로 숱한 전설과 애환을 간직하고 있다.
특히 일명 ‘새재’라고 하는 조령(鳥嶺)은 예로부터 영남 지방에서 서울로 가는 통로이며 군사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요새였다. 그런 이유로 조선조 숙종 34년(1708년)에 영남의 현관인 이곳에 관문과 성벽을 축조하였다. 제1관문인 주흘관(主屹關), 제2관문인 조곡관(鳥谷關), 제3관문인 조령관(鳥嶺關)이 서 있는데 각각 약 3km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이렇게 이 지방이 충청북도와 경계를 이루는 영남의 관문이기에 서울로 과거(科擧)나 일을 보러가는 이들은 물론, 최양업 토마스 신부와 경상북도의 사도인 칼래(Calais, 姜, 1833-1884년) 신부 등 선교사들과 교우들이 몰래 관문 옆 수구문(水口門)을 통해서 충청도와 경상도를 넘나들며 전교 활동과 피난길로 이용했던 유서 깊은 곳이다. 특히 관문과 이화령 고개 갈림길에 위치한 진안리(陳安里)는 최양업 신부가 사목활동에 대한 보고를 위해 서울로 가다가 갑자기 병을 얻어 선종한 곳이다.
최양업 토마스(崔良業, 1821-1861년) 신부는 1821년 3월, 충청남도 청양의 다락골 인근에 있는 새터 교우촌에서 순교 성인 최경환 프란치스코(崔京煥, 1805-1839년)와 순교 복자 이성례 마리아(李聖禮, 1801-1840년)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836년 15세 때 모방(Manbant, 羅, 1803-1839년) 신부에 의해 한국의 첫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최방제 프란치스코 하비에르(崔方濟, 1820?∼1837년), 성 김대건 안드레아(金大建, 1821-1846년)와 함께 마카오 유학길에 올랐다. 1837년 11월 동료인 최방제가 열병으로 사망하는 아픔을 겪었고, 부제 때인 1846년에는 한국의 첫 사제이자 동료인 김대건 신부의 순교 소식을 듣게 되었다. 이런 아픔을 겪은 후 1849년 4월 15일, 마침내 상해 서가회(徐家匯) 성당에서 강남 대목구장으로 있던 마레스카(Maresca) 주교로부터 사제품을 받고 한국의 두 번째 사제가 되었다.
그 해 12월 변문을 떠나 어렵게 조선으로 입국한 최양업 신부는 휴식을 취할 겨를도 없이 5개 도(道)의 산간벽지를 찾아다니며 각처에 숨어 있는 신자들을 순방하고 성사를 집전하였다. 진천 배티를 사목중심지로 삼은 그의 열정적인 사목 활동은 이후 11년 6개월 여 동안 꾸준히 계속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휴식기간을 이용하여 한문 교리서 및 기도서를 한글로 번역하였고, 선교사들의 한국 입국을 도왔으며, 신학생들을 말레이 반도에 있는 페낭(Penang) 신학교로 보냈고, 순교자들에 대한 기록을 수집하였다.
1860년의 경신박해 때 최양업 신부는 몇 명의 신자들과 함께 경상남도 언양의 죽림굴에서 3개월간 피신하기도 했다. 이때 스승에게 보낸 마지막 서한에서 “이것이 저의 마지막 하직 인사가 될 듯합니다. 저는 어디를 가든지 계속 추적하는 포위망을 빠져 나갈 수 있는 희망이 없습니다. 이 불쌍하고 가련한 우리 포교지를 여러 신부님들의 끈질긴 염려와 지칠 줄 모르는 애덕에 거듭거듭 맡깁니다.”라고 쓰기도 했다.
다행히 죽림굴에서 빠져나온 최양업 신부는 경상도 남부 지방의 사목방문을 다 마친 후, 베르뇌(Berneux, 張, 1814-1866년) 주교에게 성무집행 결과를 보고하기 위해 길을 나섰다. 새재와 이화령의 갈림길인 문경 진안리의 오리터 주막에 들렀다가 식중독에 과로가 겹쳐 장티푸스 합병증으로 1861년 6월 15일에 문경읍 또는 진천의 한 작은 교우촌에서 선종하고 말았으니, 이때 그의 나이 40세였다.
최양업 신부가 사경을 헤매고 있을 때 배론 성 요셉 신학교의 교장으로 있던 푸르티에(Pourthie, 申, 1830-1866년) 신부가 소식을 듣고 달려와 임종을 지키며 병자성사를 주었다. 선종 후 최양업 신부의 시신은 잘 알려지지 않은 한 작은 교우촌에 가매장되었다가, 11월 초 베르뇌 주교에 의해 성대한 장례가 치러진 후 배론 신학교 뒷산으로 옮겨 안장되었다. 1942년 12월에는 제천의 신자들이 무덤을 단장하고 그 앞에 묘비를 세웠다.
땀의 순교자인 최양업 신부는 이렇듯 당시 유일한 한국인 신부로서 5개 도(道)를 끊임없이 넘나들며 교우들을 방문하고 성사를 집전하며 관헌의 눈을 피해 다니다 기진맥진하여 선종한 것이다. 안동교구는 문경 성당을 중심으로 1999년 진안리 오리터에 마련한 356평 규모의 부지에 대한 토목공사를 시행하고, 2000년 5월과 11월에 대형 십자가와 돌 제대를 설치했다. 이어 조경공사를 마친 후 2002년 9월 29일 안동교구 교구장 권혁주 주교의 주례로 성지 축복식을 가졌다. 그 이후로도 십자가의 길을 조성하고, 돌 제대 뒤편에 조형 벽체를 세우는 등 순례자를 배려한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현재 한국 교회는 '하느님의 종'으로 선정된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에 대한 시복시성 절차를 진행하고 있다. [최종수정 2016년 1월 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