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남문은 한국 최초의 순교자 윤지충 바오로와 권상연 야고보 그리고 호남의 사도 유항검 아우구스티노와 초대 전주 지방 교회의 지도급 인물들이 처형된 곳이다.
호남 고속도로에서 전주 나들목으로 빠져 나와 팔달로를 따라 순창 방향으로 직진, 약 5분 거리를 달리면 '경기전'을 알리는 도로 표지판이 있는 네거리가 나온다. 이 표지판을 따라 좌회전하면 바로 전동 성당이 나오고 성당 맞은편에는 이성계의 영정이 있는 경기전, 네거리 건너편에는 '풍남문'이 자리 잡고 있다.
호남의 사도 유항검과 그의 동료들이 복음 전파에 온 힘을 쏟고 있던 1790년경, 조선의 천주교인들에게는 처음으로 큰 시련이 닥쳐왔다. 천주교의 전례와 유교 의식간의 충돌이라 할 수 있는 제사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1789년에 이어 두 번째로 1790년 9월 중국 북경에 파견된 윤유일 바오로는 선교사 파견에 대한 북경 구베아 주교의 약속과 함께 조상 제사 금지라는 회신을 갖고 돌아왔다. 이로부터 소위 '진산 사건'으로 알려진 한국 교회 최초의 순교사가 시작됐다.
윤지충은 25세에 진사에 급제하고 이듬해 서울에 갔다가 명례방 김범우 토마스의 집에서 서학을 접한다. 그로부터 얼마 후 정약용 형제들의 지도로 열렬한 신자가 되고 다시 그의 외사촌인 권상연에게 전교한다.
1791년(신해년) 여름, 진산에 살던 진사 윤지충이 모친상을 당했다. 그는 외종사촌인 권상연과 상의한 후, 모친의 유언과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전통 의식인 유교식 장례와 제사를 폐하고 신주를 불태웠다. 그 후 전통 사상을 거스르는 이 행위는 천주교 박해의 구실이 되었고, 그해 12월 8일(음력 11월 13일) 윤지충과 권상연은 전주 옥에서 나와 남문 밖으로 끌려나가 참수형을 받았다. 이로써 윤지충과 권상연은 한국 교회 최초의 순교자로 기록되었다.
윤지충이 전라 관찰사에게 적어서 남겼다는 '공술서(供述書)'는 한국 교회사에서 천주교에 대한 최초의 공식 변론으로 기록 되고 있다. 견고한 신앙을 조목조목 정연하고 조리 깊게 적은 이 변론은 훗날 신도들의 영적 독서로 읽혀졌고, 정약종 아우구스티노의 아들로 기해박해 때 순교한 정하상 바오로 성인이 쓴 "상재상서(上宰相書)"의 뼈대가 되었다.
1801년(신유년) 천주교 박해령이 내리자 3월 호남에 검거 선풍이 일어 많은 신자들이 체포되어 고초를 겪었다. 그리고 그해 10월 24일(음력 9월 17일) 전주 남문 밖에서 호남의 사도 유항검은 대역 부도죄, 유관검 · 윤지헌 프란치스코는 역적 모의죄로 능지처참되었고, 김유산 토마스 · 이우집은 불고지죄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그 후 90년 만에 그 자리에는 전동 성당이 자리를 잡아 초대 교회의 굳건한 신앙을 기리고 있다. 이곳에서 순교한 이들 중에서 윤지충과 권상연, 유항검, 윤지충의 동생 윤지헌은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되었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내용 일부 수정 및 추가(최종수정 2015년 11월 1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