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교구 소속 본당. 강원도 양양군 양양읍 성내리 8 소재. 1921년 4월 17일 내평(內坪) 본당 관할 공소에서 본당으로 승격되었으며, 주보는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 관할 구역은 양양읍, 서면, 손양면, 현북면 전 지역과 현남면, 강현면 일부 지역, 관할 공소는 현북 1개소.
전사 양양 지방의 전승에 따르면, 병인박해 때 충북 제천의 배론[舟論] 교우촌에 거주하던 이 베드로가 양양면 화일리(禾日里)의 범뱅이골로 피신해 오면서 복음이 전파되었다고 한다. 그 후 이 베드로의 동생 이 바오로와 김덕수, 그리고 김덕수의 숙부가 범뱅이골로 이주해 오면서 교우촌이 형성되었다. 또 다른 전승은 양양 인근에 있는 속초의 싸리재(上道文里)에 관한 것으로, 충청도 청주에 살던 오광선이 병인박해를 피해 강릉 홍제동으로 이주하였고, 이어 맏아들 오춘영 바오로가 속초 도문동으로 이주하여 ‘싸리재 옹기점’을 일구었다고 한다. 범뱅이골과 싸리재는 영동 지역에서 최초로 형성된 신앙 공동체였다.
영동 지역에는 1882년 가을 뮈텔(G. Mutel, 閔德孝) 신부가 처음으로 파견되어 이듬해 봄까지 순방하면서 양양 최초의 공소인 쉬일(양양읍 파일리) 공소를 비롯하여 8개의 공소를 설립하였다. 그리고 1887년 싸리재 공소에 이어 장승골 공소, 한재 공소, 정바위 공소, 장두골 공소, 명지골 공소, 이목동 공소, 신흥 공소 등이 설립되어 양양 · 속초 지역에만 9개 공소가 되었다.
이 지역은 1883년 4월 드게트(V. Deguette, 崔東鎭) 신부가 설립한 ‘섭가지 본당’(이천군 산내면 龍浦里 섭골) 소속이었다. 그 후 함경도 안변에 있던 르 메르(Le Merre, 李類斯) 신부가 1888년 가을에 강원도 풍수원으로 거처를 옮겨 풍수원 본당을 설립하면서 잠시 이 본당 관할이 되었으나, 1890년부터는 다시 원산 본당으로 이관되었다. 1891년부터는 안변 본당 샤르즈뵈프(E. Chargeboeuf, 宋德望) 신부의 순방을 받았으며, 1896년 2월에는 안변 본당의 4대 주임 불라두(T. Bouladoux, 羅亨黙) 신부가 거처를 안변의 내평으로 이전하여 내평 본당을 설립하면서 이때부터 1921년까지 내평 본당 관할이 되었다.
본당 설립과 변모 영동 지역의 신자수는 점차 늘어났지만, 내평 본당과 멀리 떨어져 있어 본당 신부가 공소를 순방하는 데 어려움이 컸다. 이에 뮈텔 주교는 1921년 4월 17일 양양 본당을 설립하고 북간도 조양하(朝陽河) 본당에 있던 최문식(崔文植) 베드로 신부를 초대 주임으로 임명하였다. 처음에 최문식 신부는 속초 상도문리의 싸리재에 거주하였으나, 성담 겸 사제관으로 지은 초가집이 허술하였고, 전교 면에서도 희망이 없다고 판단하고 성당 이전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1922년 2월 17일 양양읍 서문리 282번지로 성당을 옮긴 뒤 인근의 토지를 매입하였으며, 같은 해 11월 성당 공사에 착수하여 12월 22일 완공하였다.
2대 주임 유재옥(劉載玉) 프란치스코 신부는 공소 회장 피정을 연 4회 이상 실시하였고, 청년회 · 부인회 등을 조직하였다. 그러나 1936년 여름 수해로 성당이 완전침수되자 성당 재신축 계획을 포기하고 시내 중심지로 이전하기로 한 뒤 현 성당 소재지의 부지 1,140평을 매입하였다. 이어 1939년 7월 3대 주임으로 이광재(李光在) 티모테오 신부가 부임하였다. 이광재 신부는 1909년 강원도 이천군 낙양면 냉골에서 태어나 1936년 3월 사제품을 받고 풍수원 본당의 보좌로 사목을 시작했다. 양양 본당에 부임한 이광재 신부는 1940년 2월 28일 성당(65평)과 교육회관(25평)을 완공하고 봉헌식을 거행하였으나, 해방 이후 38선 이북에 공산 정권이 들어서면서 소련군의 주둔으로 성당을 빼앗기고 말았다.
그런 가운데 1948년부터 연길 · 함흥 · 원산 지역의 성직자와 수도자들, 그리고 신자들이 양양 본당을 거쳐 남하하게 되자, 이광재 신부는 이들이 무사히 월남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었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양들을 두고 갈 수 없다.”라며 월남하지 않았다. 또한 북강원도 평강과 이천 본당에서 사목하던 신부들이 체포되자 이 지역까지 다니며 사목 활동을 하였다. 이광재 신부는 1950년 6월 24일 공산군에게 연행되어 원산 와우동 형무소에 갇혔다가 10월 9일 새벽 원산 방공호에서 인민군의 총탄을 맞고 순교하였다. 총탄을 맞고 쓰러져서도 피 흘리는 주변의 사람이 물을 달라고 하자 “제가 도와드릴게요, 제가 가져다드릴게요.”라고 외치며 순교하여 ‘양들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착한 목자’가 되었다.
전란 중 성당은 화재로 소실되었고, 본당 신부가 공석이 되면서 신자 공동체 역시 혼란에 빠졌다. 이에 주문진(注文津) 본당에 이어 동명동(東明洞) 본당에서 사목하던 맥고완(P. McGowan, 元) 신부가 1952년부터 1954년까지 양양 지역을 맡아 사목하면서 성당(65평)을 신축하였다. 그리고 4대 주임으로 부임한 설리반(T. Sullivan, 서) 신부는 부임한 지 얼마 안 된 1954년 11월 30일 성당 봉헌식을 거행하였고, 1956년에는 강현 공소(강현면 정암리 2구)를 설립하여 12월 25일에 강당을 신축하였으며, 1958년 1월 10일에는 현북면 상광정리에 460평의 대지를 매입한 뒤 11월 8일 32평의 현북 공소 강당을 신축했다. 또 1960년 4월 1일 수녀원 신축 공사에 착수하여 같은 해 7월 12일 2층으로 된 수녀원을 완공하였다. 한편 1960년대에 접어들어 한때 냉담자들이 많이 늘어나면서 본당 재정 상태가 매우 약화되기도 했다.
1972년 7대 주임으로 머레이(B. Murray, 함) 신부가 부임하여 학생회와 주일학교 육성에 힘을 쏟았으며, 9대 주임으로 부임한 린치(J. Lynch, 임) 신부는 가정 성화에 각별한 관심을 두고 사목하였다. 그리고 10대 주임 스미스(M. Smyth, 천) 신부는 이광재 신부의 깊은 신앙심과 순교 정신을 기리기 위해 1983년 10월 1일 경당 내에 이광재 신부 기념관을 건립하고 순교 기념각을 세웠다. 그 후 1988년 4월 6일 현재의 수녀원(55평)을 신축하였고, 성당이 협소하여 많은 불편이 따르자 1995년 10월 1일 성당을 증축(75평)하였으며, 이듬해 10월 4일 농어촌 무의탁 노인들을 위해 현북 가정 간호의 집을 개원하여 서울 성가 소비녀회에 운영을 위탁하였다. 14대 주임으로 부임한 이동주(李東周, 시몬) 신부는 지역민들과 함께하는 교회상을 정립하기 위해 부임 직후 ‘디모테오 어린이집’을 개원하였다. 한편 본당에서는 2000년 10월 8일 이광재 신부 순교 50주년 기념 미사를 봉헌하는 등 이광재 신부의 시복 · 시성을 위해 끊임없는 기도와 노력을 기울여 왔다.
이광재 신부 현양사업 양양 본당은 이광재 신부 순교 50주년 기념미사뿐 아니라 순교각(殉敎閣) 옆에 있는 옛 수녀원 건물에 ‘이광재 신부 기념관’을 개관하였으나 이광재 신부에 대해 증언해 줄 당시 생존자가 대부분 사망한 데다 전쟁으로 본당 유물을 대부분 잃어버려 기념관을 꾸미는데 부족한 점이 많았다. 그래서 평신도들을 중심으로 ‘이광재 신부 기념사업회’를 구성하여 이광재 신부의 유품과 사료 등을 모으고 생존자를 찾아 증언을 녹취하는 등의 노력을 기울였다. 기념관에는 양양 성당에서 마지막까지 사목했던 이광재 신부의 제의와 제구, 친필 교리서 등이 보존되어 있는데, 이는 신자들이 그것들을 옹기에 숨겨놓고 피난을 떠난 덕분이었다.
이광재 신부 기념사업회에서는 본당 100년사 편찬과 더불어 이광재 신부 기념사업을 적극적으로전개하여 기념관을 한국전쟁 순교자들의 정신을 본받는 교육의 장으로 만들고, 또 설악산과 낙산 해수욕장이 인근에 있는 본당 입지를 최대한 활용해 타지 신자들을 대상으로 기념관을 널리 홍보하였다. 양양 본당은 이광재 신부 현양 사업의 하나로 2009년 6월 9일 이광재 신부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석상 제막식과 기념미사를 봉헌했다.
춘천교구 또한 한국전쟁을 전후로 성직자 · 수도자 · 평신도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남하했던 역사의 현장을 재현하고 이광재 신부의 삶을 묵상할 수 있도록 순교일인 10월 9일을 교구 ‘성직자 추념의 날’로 정해 기념해왔고, 2000년부터는 해마다 순교일에 ‘38선 도보순례’를 실시하고 있다. ‘38선 티모테오 순례길’은 신앙과 자유를 찾아 38선을 넘어 남하하는 북녘 동포들의 피난길이었으며, 이광재 신부가 삼엄한 감시 속에서도 북녘의 성직자와 수도자, 신자들을 도와 38선 이남으로 내려갈 수 있게 한 생명의 길이었다.
2007년 6월 춘천교구는 1940-50년대에 그리스도교 신앙을 증언하다 죽임을 당하거나 실종된 순교자들의 시복 시성을 위한 본격적인 조사를 시작했다. 그동안 개인이나 단체 혹은 본당 등에서 6.25 전쟁 전후 북한군의 박해와 전쟁 과정에서 순교한 수많은 성직자 · 수도자 · 평신도에 대한 조사나 현양 사업이 있었으나 시복 시성을 전제로 교구 차원에서 조사에 들어간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2017년 9월 17일 춘천 교구장 김운회 주교는 춘천 죽림동 주교좌성당 성직자 묘역과 양양 성당을 성지로 선포했다. 현재 이광재 신부는 하느님의 종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위’ 안건으로 시복 절차가 진행 중이다. [출처 : 김성희, 한국가톨릭대사전 제9권과 관련 기사를 중심으로 편집(최종수정 2019년 12월 1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