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교회가 처음으로 맞이한 사제인 중국인 주문모 신부가 1801년 신유박해로 장렬하게 순교한 후 조선 교회는 또다시 목자 없는 양떼 신세가 됐다. 그 후 30년 만인 1831년 조선 교구는 중국 북경 교구로부터 독립해 명실 공히 교회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이와 함께 1836년과 1837년 사이에 프랑스 파리 외방 전교회 소속 선교사인 모방, 샤스탕 신부와 앵베르 주교가 입국한다. 이들 성직자들은 외인과 포졸들의 눈을 피해 상복 차림으로 변장하고 먹을 것도 여의치 못한 채 험한 산길을 걸어 다니며 전국 각지의 신자들을 찾아 다녔다.
제한적인 활동을 해야 하는 어려움 속에서도 복음 전파에 힘쓴 결과 이들은 입국한 후 불과 1년 만에 신자가 9천여 명으로 늘어나는 성과를 얻는다. 방인 사제 양성을 위해 최양업, 최방제, 김대건 등 세 소년을 뽑아 마카오로 유학을 보내는 한편 정하상 등 네 명의 열심한 신자들에게 라틴어와 신학을 가르쳐 신부로 키우고자 했던 것이 모두 이때의 일이다.
앵베르 주교는 지방을 돌아다니던 중 외국 선교사들의 입국이 알려져 교우들에 대한 탄압이 가열되자 수원에서 가까운 어느 교우집에 몸을 숨겼고, 여기서 그는 다른 두 신부에게 중국으로 피신할 것을 당부하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아 단념하고 몸조심을 당부하고 임지로 돌려보낸다.
바로 이즈음 한 배교자로 인해 이들의 거처가 알려지고 포졸들이 들이닥친다. 앵베르 주교는 화가 여러 교우들에게 미칠 것을 염려하여 스스로 잡힌 몸이 되는 동시에 동료 신부들에게도 스스로 자수해 순교할 것을 권했다.
이리하여 1839년 기해박해가 시작되면서 세 명의 외국인 사제는 새남터에서 순교의 월계관을 쓰게 된다. 이들이 곤장을 맞고 팔을 뒤로 결박당한 채 형장으로 끌려오는 모습은 참으로 참담한 대목을 이룬다.
희광이들은 이들의 옷을 벗기고 겨드랑이 밑에 몽둥이를 끼워 처형 장소에 이르러서는 머리채를 모두 기둥에 매고 나서 목을 쳤다. 이 때 주교의 나이 43세,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는 35세로 동갑이었다.
사흘 동안 이들의 시신은 새남터 모래사장에 버려져 있었다. 그 동안 교우들이 그들의 시신을 찾아오기 위해 노력하다가 몇 명이 체포되기도 하였으나, 마침내 20여일 만에 감시의 눈이 소홀해진 틈을 타서 몇몇 교우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시신을 수습해 일단 노고산(老姑山, 현 서강대학교 뒷산)에 안장하였다.
그리고 4년 후인 1943년 당시 유해를 훔쳐 낸 교우들 중 하나인 박 바오로는 복잡한 서울 근교에 순교자의 유해를 모신 것이 불안해 자신의 선산인 삼성산(三聖山, 현 관악구 신림동)에 세 성직자의 시체를 다시 옮겨 모시고, 후에 그 사실을 어린 아들 박순집(베드로)에게 알려 주었다.
부친의 고귀한 뜻과 용감한 행동을 이어가기로 결심한 박순집은 1866년 병인박해 때 새남터에서 순교한 베르뇌 주교와 브르트니에르 · 볼리외 · 도리 · 프티니콜라 · 푸르티에 신부, 우세영(알렉시오)의 시신을 박순지 요한 등 몇몇 신자들과 함께 찾아내어 새남터 부근에 임시 매장한 후 다시 노고산 인근의 왜고개로 옮겨 모셨다. 그리고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순교한 남종삼(요한)과 최형(베드로)의 시신 또한 찾아내어 왜고개에 안장하였다.
박해가 끝난 후 제7대 조선 교구장 블랑 주교는 순교자들의 행적을 조사하였고, 박순집은 자신이 보고 들은 것과 순교자들의 유해가 묻혀 있는 곳 그리고 자기 집안의 순교자들의 행적을 교회법정에서 증언하였다. 이 증언록이 “박순집 증언록”으로 총 3권에 153명의 순교자 행적이 기록되어 현재 절두산 순교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순교자들의 시복 수속이 진행되던 1901년 박순집의 도움으로 노고산에 4년간 매장되었다가 삼성산으로 옮겨 모신 앵베르 주교와 모방 · 샤스탕 신부의 유해가 발굴되어 10월 21일 용산 예수성심신학교로 옮겼다가 같은 해 11월 2일 명동 성당 지하묘지에 안장되었다.
시복을 앞둔 1924년 명동 성당 지하묘지가 개봉되어 유해 일부가 로마와 파리 외방전교회 등으로 분배되었고, 1967년 절두산에 순교 기념성당이 건립되면서 명동 성당에 안장되었던 순교 복자들의 유해 대부분이 기념성당 지하 성해실로 옮겨졌다. 현재 절두산 순교성지 성해실에는 총 27위의 성인 유해와 성명 미상의 순교자 유해 1위가 모셔져 있다. 103위 성인 중에서 현재까지 유해가 전해지는 것은 27위뿐이다.
세 선교사뿐만 아니라 1866년 3월 9일(음력 1월 23일) 최형과 함께 사형선고를 받고 그 날로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되어 순교한 전장운(全長雲, 요한), 3월 10일 사형선고를 받고 다음 날 제자 우세영과 함께 새남터에서 군문 효수형을 받고 순교한 정의배(丁義培, 마르코)의 시신은 처형된 지 며칠 후 부인들이 포졸들에게 돈을 주고 거두어 노고산에 안장하였다고 전해진다.
1835년 한강변에서 누나 이 아가타와 함께 체포되어 포청과 형조에서 가혹한 고문을 당한 후 1838년 11월 24일 형조 옥에서 병사한 이호영(베드로)의 시신도 노고산에 묻혔다가 현재는 절두산 성해실에 모셔져 있다. 1839년 9월 12일 포도청 옥에서 숨을 거둔 최경환(프란치스코) 역시 둘째 아들 최의정 등이 수습해 노고산 근처에 가매장했다가 수리산으로 이장했고, 복자품에 오른 뒤인 1930년 5월에는 명동 성당 지하묘지로, 1967년에는 다시 절두산 순교성지 성해실로 옮겨 안장되었다.
이렇듯 노고산은 천주교 박해 때 여러 처형장과 지리적으로 가까운 이유로 많은 순교자들의 시신이 매장되었던 유서 깊은 성지이다. 현재 노고산 일대에는 예수회에서 운영하는 서강대학교가 자리하고 있다. 순교자들의 땅 위에 학교 부지를 마련한 서강대학교는 2009년 6월 15일 기해박해 당시 새남터에서 순교한 후 노고산에 4년 동안 매장되었던 앵베르 주교와 모방 · 샤스탕 신부를 기리기 위해 정문에서 가까운 가브리엘관 앞 소나무밭에 세 성인의 순교 현양비를 세우고 정진석 추기경의 주례로 축복식을 거행하였다.
조각가 이춘만(크리스티나) 씨가 제작한 3개의 순교 현양비는 각각 가로 1m, 세로 1.5-2m의 규모로, 앞면에 각 성인의 얼굴 동판과 약력이 기록되어 있다. 현양비 건립 기금 일체는 환주복지재단 이관진(베드로) 이사장이 기탁했으며, 비문은 김남조(마리아 막달레나) 시인이 썼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내용 일부 수정 및 추가(최종수정 2020년 2월 1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