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의 행정 명칭 ‘충남 부여군 내산면 금지리’의 깊은 계곡은 오래전부터 도앙골이라고 일컬어 왔다. 도앙골은 옛 교우촌이 있었던 유서 깊은 순교 사적지로 이존창 루도비코의 전교활동에 의해 교우촌을 이룬 곳이다. ‘도앙골’은 이 마을 계곡 주변에 개복숭아 나무가 많다 하여 생긴 도원곡(桃園谷)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중국에서 사제 서품을 받은 두 번째 한국인 사제 최양업 토마스 신부는 천신만고 끝에 1850년 1월 (혹은 1849년 말) 귀국하였다. 최양업 신부는 당시 중병을 앓고 있던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를 만난 다음 곧 바로 전라도를 시작하여 공소 순방에 들어갔다. 1850년 10월 1일 최양업 신부는 9개월 동안 자신의 사목활동을 은사인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고했는데 이 편지의 발신지를 ‘도앙골’이라 명하고 있다. 이 편지에 신자들의 참담한 현실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저는 교우촌을 순방하는 중에 지독한 가난에 찌든 사람들의 비참하고 궁핍한 처지를 자주 목격하게 됩니다. 그럴 때마다 저들을 도와줄 능력이 도무지 없는 저의 초라한 꼴을 보고 한없이 가슴이 미어집니다. 저들은 포악한 조정의 모진 학정 아래 온갖 가렴주구(苛斂誅求)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동포들로부터 오는 박해, 부모들로부터 오는 박해, 배우자들로부터 오는 박해뿐 아니라 친척들과 이웃들로부터도 박해를 받습니다. 그들은 모든 것을 빼앗기고 험준한 산속으로 들어가 이루 형언할 수 없이 초라한 움막을 짓고 2년이나 3년 동안만이라도 마음 놓고 편안히 살 수만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행복하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1866년 병인박해가 발생하자 도앙골에 살던 오 요한, 김사범, 김 루카, 김 바오로, 오 시몬 등이 체포되어 공주에서 치명하였다. 또한, 같은 해 도앙골에 살던 김순장 요한은 서짓골 신자들과 함께 갈매못에서 치명하신 다블뤼 성인 등 4위의 유해를 수습하여 서짓골에 안장하기도 하였다. 1890년에 도앙골에 다시 신자들이 모여 공소를 형성하였지만 1970년 공소가 폐쇄되었다. 하지만 2011년 9월 대전교구장 유흥식 라자로 주교의 주례로 ‘기도의 집’ 축복식을 봉헌하고, 같은 해 12월 22일 전임 교구장인 경갑룡 주교의 주례로 ‘탁덕 최양업 시성 기원비’ 제막식이 열렸다. 시성 기원비 옆에는 최양업 신부의 열정적인 사목을 기념하는 제대를 만들어 봉헌하였다. 또한 도앙골 성지 옆에는 삽티 성지가 있어, 두 곳을 잇는 도보순례길이 조성되어 있어 옛날의 의미를 살리고 있다. 신앙을 위해 산속에 숨어 어려운 삶을 이어갔던 선조들의 마음과 그들에게 더 많은 것을 해 주지 못해 안타까움을 지녔던 최양업 신부의 모습을 묵상해 보기에 더없이 좋은 성지이다. [출처 : 2020년 7월 12일 연중 제15주일 대전주보 4면]
※ 미사 : 순례자가 원하는 시간
※ 도보 순례 : 박해 시기 연통 산길(도앙골~삽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