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교구 소속 본당. 충남 부여군 구룡면 금사리(金寺里) 334 소재. 1901년 4월 27일 공주 본당에서 분리 설립되었으며, 주보는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공소 시대 부여 지역은 일찍부터 천주교 신앙이 전파되어 1801년의 신유박해(辛酉迫害)를 전후해서는 이미 천주교 신자들이 거주하고 있다는 기록이 나타난다. 그러나 이웃의 공주 · 청양 · 논산 · 서천 등과 같이 신자가 많지 않았으므로 1866년의 병인박해(丙寅迫害) 때 몇몇 순교자가 탄생하기 전까지는 큰 박해를 받지 않았다. 그러다가 박해가 끝난 뒤 주변 지역의 신자들이 이곳으로 이주해 오면서 신자들의 공동체가 형성되기 시작하였는데, 그중 가장 먼저 신자들이 정착한 곳은 청양의 산간 지대와 가까운 부여군의 은산면 · 외산면 · 내산면 지역이었다.
박해 후 이 지역을 처음 방문한 두세(Doucet, 丁加彌) 신부와 ‘양촌 본당’(陽村本堂, 현 합덕 본당의 전신)의 퀴틀리에 신부도 바로 이 지역에 나마리 공소(현 운산면 羅嶺里의 羅馬里), 도앙골 공소(현 내산면 金池里), 여내골 공소(외산면 前場里) 등을 설립하였다. 구룡면에서 처음 설립된 공소는 1891년에 설립된 고당 공소(구룡면 龍塘里의 姑堂)였다.
이 공소들은 1897년 6월부터는 양촌 본당에서 신설 ‘공주 본당’(公州本堂)으로 이관되면서 기낭(Guinand, 陳普安) 신부의 방문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공주로부터 거리가 멀었을 뿐만 아니라 공소나 신자수도 점차 증가하는 추세였으므로 기낭 신부는 이곳에 본당을 신설해주도록 교구장 뮈텔(Mutel, 閔德孝) 주교에게 요청하였고, 그 뒤를 이어 공주 본당을 맡게 된 파스키에(Pasquier, 朱若瑟) 신부도 같은 요청을 하였다.
또 소양리(금사리의 金陽里)의 손우기, 윤영식 등은 1900년에 상경하여 뮈텔 주교에게 본당 설립을 건의하였으며, 파스키에 신부도 이듬해 초에 다시 한 번 이를 요청하였다. 그러는 동안 부여 지역에는 손사(외사면 佳德里의 遜沙), 갈덕리(옥산면 加德里), 상터 공소(외산면 花城里), 벌말 공소(은산면 長閥里), 기막내 공소(외산면 화성리), 소양리 공소(금사리 본당의 전신) 등이 신설되었다.
본당 설립과 정착 뮈텔 주교는 1900년에 있은 신자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부여 지역에 본당을 신설할 것을 결심하고 이듬해 4월 27일, 연례 피정이 끝남과 동시에 1900년 10월 9일에 입국하여 한글을 배우고 있던 공베르(J. Gombert, 孔安世) 쥴리앙 신부를 부여 지방에 파견하였다. 공베르 신부는 이때 파스키에 신부와 함께 군산을 거쳐 서천 용아실(현 서천군 마서면 德岩里의 龍臥谷) 공소와 부여 갈덕리 공소에 머무르면서 본당의 중심지를 물색하였다.
처음 공베르 신부가 정착하고자 한 곳은 갈덕리나 규암(현 부여군 규암면)이었으나, 마침 소양리에 적당한 장소가 나타나면서 이곳이 본당 중심지가 되었다. 따라서 처음 본당의 이름은 당시의 행정 구역명을 따라 ‘홍산 본당’(鴻山本堂) 또는 ‘소양리 본당’으로 불리었다. 당시 공베르 신부가 매입한 것은 흉가로 여겨지던 가옥 3동과 대지, 논과 산 등이었다. 이후 신자들은 공베르 신부가 고용한 중국인 기술자와 함께 성당 건립 공사를 시작하여 1906년 성당을 완공하고, 계속하여 사제관과 사랑채를 완공한 뒤 1913년 9월 2일 뮈텔 주교의 집전으로 축성식을 가졌다.
설립 당시 본당의 관할 구역은 충남 남서부 지역(부여군 · 논산군 · 청양군 · 예산군 일부, 홍성군, 서산군 안면도, 보령군, 서천군)이었으나, 1908년 합덕 본당에서 ‘수곡 본당’(水谷本堂, 서산 본당의 전신)이 분리되면서 서산군 지역을 새 본당으로 이관하였다. 이후 공베르 신부는 23년간을 본당에 재임하면서 성당 시설을 완비하는 한편 전교 활동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1902년 17개 공소에 신자수 882명이던 것이 이듬해에 이미 1,000명 이상으로 증가하였으며, 1923년에는 26개 공소에 1,644명을 기록하였다.
분할과 변모 그 후에도 본당은 어느 정도까지 성장을 계속하게 되었지만, 본당 신부가 자주 교체되고 본당의 분할로 관할 구역이 축소되면서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우선 제3대 정규량(鄭圭良) 레오 신부는 1924년에는 성당 사랑채에 2년제 ‘계명 여자 학술 강습회’ 2학급을 신설하여 주민 교육에 공헌하였고(1932년까지 지속), 4대 이여구(李汝球) 마티아 신부는 청년회를 조직하여 개척 사업에 헌신하였다. 또 이 신부는 성당 지붕을 개량하고, 1936년 ‘서천 본당’(舒川本堂)을 분리하였으며, 6대 김영식(金永植) 베드로 신부는 목조 초가 수녀원을 건립하고, 부인회를 조직하였다. 그러나 서천 본당의 분할로 본당의 관할 구역은 크게 축소되었으며, 지리적인 여건으로 인해 교세가 크게 늘지 않게 되었다. 서천 본당은 6년 뒤인 1942년 ‘장항 본당’(長項本堂)의 설립과 동시에 그 공소로 격하되었다.
그 후 본당 신자들은 6 · 25 동란을 맞이하여 본당 신부를 잃게 되었다. 이때 제9대 몰리마르(J. Molimard, 牟) 요셉 신부는 성당과 부속 건물이 몰수되는 상황에서도 끝까지 성당을 지키다가 1950년 8월에 체포되었고, 대전으로 압송되어 갖은 고문을 당한 끝에 9월 26일 대전 작은 형제회 수도원 지하실에서 총살당하였다. 몰리마르 신부의 유해는 순교 직후 수도원 묘지에 안장되었고, 1960년 대전교구 공원묘원으로 옮겨졌다가 2003년 5월 10일 초대 주임으로 사목했던 수원교구 평택 성당 구내에 안장되었다.
몰리마르 신부의 순교로 인해 당시 논산 본당에 있던 생제(P. Singer, 成載德) 베드로 신부가 본당의 제10대 주임을 겸하여 신자들을 돌보게 되었다. 12대 김영환(金英煥) 타대오 신부는 성당에 전기를 시설하고 안나회를 조직하였으며, 삽티 · 역말 · 논티 공소를 신설하고, 성모 동고상과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동고상, 14처상을 마련하였다. 또 신자들은 규암 공소의 신자들과 함께 성당 건립에 노력하여 1955년 9월에는 규암 본당(窺岩本堂)을 분할하게 되었다.
이어 본당에 부임한 13대 제제구(R. Jezegou, 최세구) 로베르 신부는 8개의 공소를 신설하는 한편, 외국 보조금으로 이들 강당 8개를 건립하였다. 또 사제관과 성당 내부를 수리하고 곳곳에 교리반을 조직하여 많은 영세자를 탄생시켰으며, 1955년 홍산에 새 부지를 매입하고 1957년부터 성당 신축 공사를 시작하여 이듬해 5월 이를 완공함과 동시에 ‘홍산 준본당’(鴻山準本堂)을 분리 신설하여 그 초대 주임을 겸하였다. 그의 노력으로 본당의 신자수는 1960년 말에 이르러 설립 이후 가장 많은 숫자인 2,174명을 기록하게 되었지만, 이후 홍산 본당의 분리로 인해 다시 교세가 축소되었다.
그러다가 15대 김동억(金東億) 바오로 신부가 부임하여 침체되어 있던 청년회를 재발족시키고, 성모 동고상을 건립하는 한편 보(洑)를 완공하여 농업용수를 확보하였다. 또 18대 윤예원(尹禮源) 토마스 신부는 1967년 부임 후 새 성당 건립에 노력하여 1968년 9월 12일 현재의 성당을 완공하였다. 아울러 본당은 이후 신부가 자주 교체되지 않음으로써 안정을 찾게 되었다. [출처 : 차기진, 한국가톨릭대사전 제2권, 1995년, 내용 일부 수정 및 추가(최종수정 2011년 11월 7일)]
금사리 본당의 옛 성당은 본당 설립과 함께 착공해 6년의 공사 기간을 거쳐 1906년에 완공되었다. 당시 초대 주임인 공베르 신부는 중국인 기술자들을 고용했고, 신자들도 손수 건축 일을 도왔다. 벽돌은 직접 황토를 구워 만들었으며 벽체는 윗부분은 붉은 벽돌로, 아랫부분은 회색 벽돌로 쌓았다. 지붕에는 기와를 얹었다.
한 · 양 절충의 고딕식인 이 성당 건물은 단층 55평으로, 내부 중앙에 나무 기둥을 일렬로 세워 전례공간을 둘로 나눈 이랑식(二廊食)이 특징이다. 보통 다른 성당들이 세 개의 회랑으로 나뉜 삼랑식(三廊食)인 것과 다른 점이다. 바로 이 점이 금사리 성당만이 갖는 건축사적 의미이다. 성당 완공 후 계속해서 25평 규모의 사제관과 30평 규모의 사랑채도 건립하여 1913년 9월 2일 뮈텔 주교 주례로 봉헌식을 가졌다.
점점 늘어나는 신자들을 수용하기 위해 1968년 옛 성당 옆에 새 성당을 건립했는데, 그 당시 본당의 신자수는 1,500여명에 공소는 12개에 달했다. 1979년에는 수녀원을 건립해 전교수녀가 부임했고, 신용협동조합을 설립하고 밤 농장도 운영해 본당 재정에도 보탰다. 이러한 활발한 활동 속에 충청남도 서남부 지역 성소의 못자리로 성직자와 수도자를 다수 배출했다.
하지만 1970년대 이후 농촌이 쇠락하면서 금사리 성당도 그 영향을 받았다. 신자수가 지속적으로 감소하면서 노인 신자들만 남게 되자 본당 수녀원도 1995년에 철수했다. 한편 옛 사제관은 수리하여 1993년 축복식을 갖고 ‘대건의 집’으로 명명한 후 회합실로 사용하고 있다.
금사리 본당은 2006년 옛 성당 건립 100주년을 앞두고 2003년부터 대대적인 복원 작업에 들어가 2005년 3월 공사를 마쳤다. 복원 공사에 앞서 2001년 성당 복원을 위한 자문위원회를 구성해 노인 신자들의 증언 등을 토대로 설계도면을 다시 작성하는 과정을 거쳐 전면 복원 공사를 시작하였다. 성당 입구 성모상 앞에 놓여있는 돌제대 한쪽에 ‘1913년 9월 2일 민 주교 축성’이라고 쓰여 있는 글씨가 본당의 오랜 역사를 잘 말해주고 있다. 이 돌제대는 1968년 새 성당을 건립한 후 1971년 규암 성당으로 옮겨갔다가 복원 작업 후에 원래대로 제자리에 놓여졌다.
옛 성당 지붕은 원래 기와였으나 지붕 무게 때문에 한쪽 벽에 금이 가 1928년 기와를 함석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신자들이 증가하면서 성당이 비좁아지자 1960년에 지붕 트러스를 보강하고 중앙 기둥을 없앴다. 그러다가 외벽에 금이 가고 기울어지는 현상까지 나타나자 1968년 74평의 콘크리트 블록조 성당 건물을 옛 성당 옆에 새로 건립하였다. 새 성당 건립 당시 본당을 지역사회의 중심지인 태양리로 옮기려 했으나 서남부 지역의 유서 깊은 금사리의 특성을 감안해 현 위치에 그대로 두었다.
옛 성당은 전면적인 복원 공사에 앞서 이미 1998년에도 부분적인 복원 공사를 시행했다. 그런데 부실공사 탓인지 새로 깐 마룻바닥이 일어나고 양철 지붕이 2000년 2월 돌풍에 날아가 버려 전면적인 복원 공사가 재개된 것이다. 벽 전체를 헐어 다시 쌓고 새 성당을 건립하면서 없앴던 종탑도 복원하였다. 벽돌은 원래 재료를 30% 이상 사용했고 지붕은 동판으로 변경했다. 복원 공사를 마무리한 후 2006년 5월 9일 교구장 주교 주례로 성당 건립 100주년 기념미사를 봉헌하고 복원된 성당에 대한 축복식을 거행하였다.
금사리 본당의 옛 성당은 충청남도 부여군에 세워진 첫 고딕식 건물로 우리나라 전통 목조 건물의 특징을 많이 갖고 있는 초기 성당 건물 중의 하나이다. 아담하면서도 고전적인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는 옛 금사리 성당은 1996년 11월 21일 충청남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었고, 이어 1998년 7월 25일 충청남도 기념물 제143호로 변경 지정되었다. [출처 : 관련 신문 기사를 중심으로 편집(최종수정 2015년 10월 2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