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스위투누스 웰스(Swithunus Wells, 또는 스위투노 웰스)는 1536년 영국 잉글랜드 햄프셔(Hampshire)의 브램브리지(Brambridge)에서 태어났다. 종교 개혁 시기에 그의 가족은 지역 묘지에서 가톨릭 신자들의 장례를 비밀리에 도와주었고, 그들의 집은 가톨릭 사제들을 위한 은신처로 사용되었다. 성 스위투노 웰스는 좋은 교육을 받은 다재다능한 인재였다. 한때 그는 사우샘프턴(Southampton)의 백작 집에서 가정교사로 일했고, 여러 해 동안 월트셔(Wiltshire)의 한 학교에서 교사로 활동했다. 그는 1582년 학교의 자문기관으로부터 교황을 옹호한다는 의심을 받자 교사직을 떠났다. 그 당시 그는 프로테스탄트 예배에 참석하고 있었지만, 1583년에 가톨릭 교회와 화해하고 다시 돌아와서 사제들을 후원하며 그들의 은신처를 만드는 위험한 일을 수행했다. 1585년 그는 아내 앨리스(Alice)와 함께 런던으로 이주하여 그레이즈 인(Gray’s Inn)에 집을 마련했다. 그의 집은 영국 국교회에 반대하는 이들의 피신처였다. 1586년 6월 그는 동료들과 함께 체포되어 뉴게이트(Newgate) 감옥에 갇혔는데, 조카가 보석금을 내 풀려났다. 그리고 그해 8월에는 ‘배빙턴 음모’(Babington Plot)에 가담한 혐의로 재판을 받았는데 혐의가 없어 감옥에서 다시 풀려났다. 이어 사우샘프턴 백작을 위한 사명을 띠고 로마에 갔다가 돌아와서는 영국에서 은밀히 활동하는 가톨릭 사제들을 돕는 활동을 이어갔다. 1591년 11월 초 성 에드문도 제닝스(Edmundus Gennings)가 그의 집에서 미사를 봉헌할 때 ‘가톨릭 사제 사냥꾼’이 사람들과 함께 들이닥쳤다. 신자들은 미사가 끝날 때까지 문을 잠그고 버티다가 미사 후에 순순히 체포되었다. 그 당시 성 스위투노 웰스는 집에 없었다. 그의 아내 앨리스와 몇몇 평신도와 성 폴리도로 플라스딘(Polydorus Plasden) 신부도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다. 성 스위투노 웰스도 집에 돌아오자마자 체포되어 가톨릭 사제에게 은신처를 제공하고 미사 거행 장소를 제공하는 등 국법을 어긴 죄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12월 10일 그의 집 밖에는 교수대가 설치되었고, 그는 그곳에서 교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그의 아내 또한 1602년 감옥에서 숨을 거두었다. 성 스위투노 웰스는 1929년 12월 1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70년 10월 25일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잉글랜드와 웨일스의 40위 순교자’(The Forty Martyrs of England and Wales) 중 한 명으로 성인품에 올랐다. 그의 축일은 개인적으로는 순교한 날인 12월 10일에 기념하고, 시성 후에는 40위 순교자의 일원으로서 시성일인 10월 25일에 기념해 왔었다. 2000년에 잉글랜드와 웨일스 교회의 새 전례력이 교황청에서 승인된 이후 40위 순교자들의 축일은 5월 4일로 옮겨져 종교개혁 시대에 순교한 모든 복자 · 성인들과 함께 ‘영국의 순교자’(The English Martyrs)라는 이름으로 전례 안에서 기념하고 있다. 이날은 종교개혁 시대 영국에서 순교한 영국 성공회의 순교자와 성인들의 기념일과 같은 날이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12월 10일 목록에서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의 박해 때 성 에드문도 제닝스가 가톨릭 사제라는 이유로, 성 스위투노 웰스는 사제를 환대하고 도왔다는 이유로 사형을 선고받고 성 스위투노 웰스의 집 앞에서 고문을 받고 교수형으로 순교했다고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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