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남경문 베드로(Petrus)는 서울의 중인 계급 집안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아버지는 1801년의 신유박해 전부터 천주교인이었으나, 일찍 세상을 떠나 그에게 신앙을 전해주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는 20세 때에 병이 들어 대세를 받고서야 입교하게 되었다. 이때 그를 권고한 사람이 박 베드로였기 때문에 자신도 베드로라고 하였다. 처음에 그는 금위영의 병정 노릇을 하다가 후에 조개젓 장사를 하였으며, 스물두 살 때에 허 바르바라(Barbara)와 혼인하였다. 처음에는 교리를 자세히 몰랐으므로 비싼 이자를 받는 돈놀이를 하였으나, 유방제(劉方濟, 파치피코) 신부로부터 그런 일은 교회가 금하는 것이라는 말을 듣고 대금업을 패하고 신부를 따라 공소 방문을 다녔다. 이러한 열성으로 그는 새로 입국한 선교사들로부터 회장에 임명되었다. 기해박해 때에 베드로는 포졸의 손에 잡힐 번하였으나 외교인 형제들의 도움으로 겨우 난을 면하였다. 그러나 박해가 끝난 후 선교 신부와 신자들이 모두 순교하자 혼자 남아 2, 3년 동안 스스로 타락한 생활을 하였다. 그러던 중 스스로 지난날을 뉘우치고 다시 열심한 생활을 하기 시작하였으며, 친구들에게 “이런 죄를 범하였으니 천국에 가려면 순교를 해야 하네”라는 말을 자주 하였다고 한다. 그는 매일 아침 해 돋기 전에 일어나 오랫동안 기도하고, 보속하는 뜻으로 추운 겨울에도 불을 때지 않고 지냈다. 남 베드로가 천주교 신자임이 널리 알려졌기 때문에, 1846년의 병오박해가 일어나자마자 포졸들은 그를 쉽게 체포하였는데 포졸들이 그를 끌고 가려고 할 때, 그의 아내가 팔에 매달려 “당신 없이 어떻게 살란 말이오?” 하며 붙잡으려 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제 다 틀렸소. 나는 이 이상 더 살 수 없소” 하고 아내를 물리쳤다. 베드로가 포청 옥에 갇혀 있을 때 그의 형제 하나가 그를 만나 보러 왔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가 음식과 옷을 들여보냈다. 그러나 베드로는 “옥 안에서 얻어먹는 음식과 지금 입고 있는 옷도 내게는 과하니 다른 것을 더 가져올 필요는 없다”고 이르게 하였다. 한번은 문초 중에 허리춤에서 군사의 패를 떼어 포장에게 바치며 “나는 천주께서 창조하신 물건으로 오늘까지 살아 왔고 또 나라에서 쌀도 많이 받아먹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죽는 길밖에 없으니 군사의 패를 도로 바칩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러자 포장이 “네가 배교만 한다면 살려 줄 뿐만 아니라 네 직업도 잃지 않게 해주마.” 하고 약속하였으나 베드로는 듣지 아니하였다. 이에 포장이 명하여 곤장으로 때리는데 어찌나 혹독하게 쳤던지 어깨 위에서 곤장이 부러져나가기까지 하였다. 관리가 신자들을 고발하라고 재촉하자 그는 죽은 사람의 이름을 몇 댈 뿐이었다. 형리들은 양 손목을 잡아매어 공중에 매달고 채찍으로 마구 갈겼다. 그리하여 베드로는 이런 매질을 이기지 못하여 숨을 거두니, 때는 1846년 9월 20일이요 나이는 40세였다. 그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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