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남종삼 요한(南鍾三, Joannes)은 1817년(순조 17년) 남탄교(南坦敎)의 아들로 충주(忠州)에서 태어나 장성한 뒤에 큰아버지인 남상교 아우구스티노(南尙敎, Augustinus)의 양자로 들어갔다. 남상교는 정약용 요한(丁若鏞, Joannes)의 학통을 이은 농학자(農學者)로 충주 목사와 돈녕부(敦寧府) 동지사(同知事)를 지냈다. 그는 일찍부터 서학서(西學書)를 접하면서 진리를 깨달아 입교했는데, 관직이 신앙생활에 방해되자 이를 포기하고 산골 마을인 묘재(山尺, 현 충청북도 제천시 봉양읍 학산리)로 거처를 옮겨 은거 생활을 시작했다. 성 남종삼 요한은 22살 때인 1838년(헌종 4년) 문과에 급제한 이후 홍문관 교리(校理), 영해 현감(寧海 顯監) 등을 거쳐 철종 때에 승정원(承政院)의 승지(承旨, 正三品)까지 올랐고, 고종 초에는 학덕을 인정받아 왕실에서 교육을 담당하였다. 이러한 그가 천주교 신앙을 갖게 된 것은 물론 부친의 영향이 컸겠으나 무엇보다도 학자인 그 자신이 서학서를 가까이하며 학문을 통해 신앙을 크게 꽃피웠음은 부인할 수 없다. 이것은 그가 지은 천주가사(天主歌詞)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관직에 있으면서도 신앙생활을 충분히 할 수 있고, 만일 신앙생활에 지장을 초래하는 경우 관직에서 물러나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관직과 신앙생활을 병행하던 성 남종삼 요한은 나라의 공식 예절이 있을 때마다 조상 숭배행위에 참여해야 했기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면서도 쉽게 관직을 떠날 수 없었던 이유 중 하나는 가문의 생계를 꾸려가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세속의 관직 때문에 당시 외국인 선교사들로부터 미움을 받아 성사까지 막힌 경우가 있었으나, 방인 사제인 최양업 토마스(崔良業, Thomas) 신부와의 두터운 교분으로 그의 신앙생활은 크게 진보하였다. 그래서 그가 영해 현감으로 있을 때, 남들이 상상할 수 없는 선정(善政)을 베풀었다. 그는 재물과 부녀자를 멀리하고 청백리(淸白吏)로서 의덕과 겸손의 청빈한 생활을 하여 모든 이들에게 존경을 받았으나 동료 관리들에게는 시기와 경멸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러다가 지방의 관리가 향교(鄕校)의 제사에 참석하지 않는다고 해서 말썽이 생기자 즉시 사표를 낼 정도로 신앙이 깊었다. 관료 생활과 신앙생활을 병행하고자 했던 그는 철종 때에 다시 승지가 되었고, 고종 초에는 왕족 자제들의 교육을 담당하였다. 1864년(고종 원년) 이후 자주 러시아 선박이 함경도 국경을 넘나들며 통상을 강요하는 일이 발생했다. 당시 고종의 부친으로 조선의 실질적인 집권자였던 흥선 대원군(興宣大院君)은 이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이때 조선의 신자들은 신앙의 자유를 얻을 좋은 기회라고 생각해 조선에 잠입해 비밀리에 선교 활동 중이던 프랑스 선교사들의 힘을 빌리고자 했다. 1865년 말 홍봉주 토마스(洪鳳周, Thomas)와 이유일 안토니오(李惟一, Antonius) 등은 ‘이이제이(以夷制夷)의 방아책(防俄策)’을 대원군에게 건의하였다. 대원군이 쉽게 받아들이지 않을 때 성 남종삼은 홍봉주 등과 뜻을 같이하여 다시금 방아책을 건의하였다. 프랑스 주교들을 통해 프랑스와 영국 등 서구 열강들과 조선이 동맹을 맺으면 러시아의 남하를 막을 수 있고, 조선도 문호를 개방하여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일 수 있으며, 천주교 신자들은 신앙의 자유를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결국 대원군도 그 건의를 받아들여 조선에서 활동 중인 프랑스 선교사들과 만나 논의하겠다고 마음을 정했다. 성 남종삼과 동료들은 이 소식을 즉시 성 베르뇌 시메온(Berneux Simeon)과 성 다블뤼 안토니오(Daveluy Antonius) 주교에게 전하고자 했다. 그러나 지방 순회 중인 주교들의 거처 확인과 연락이 어려워 시간이 지체되었다. 1866년 1월 소식을 전해 들은 성 다블뤼 안토니오와 성 베르뇌 시메온 주교가 급하게 상경했을 때는 이미 러시아인들이 물러가면서 러시아의 침략 위험이 저절로 사라진 때라 대원군의 마음도 바뀐 뒤였다. 게다가 반대파 대신들의 정치적 공세와 중국에서의 천주교 박해가 확산하고 있다는 와전된 소식 등이 전해지면서 대원군의 태도가 돌변하였다. 그는 쇄국정책(鎖國政策)을 강화하고 천주교에 대한 박해를 통해 정치적 문제를 풀어가고자 했다. 그래서 1866년 정월(음력)을 기해 서양 선교사들에 대한 사형선고와 천주교 신자들에 대한 체포령을 선포하면서 병인박해(丙寅迫害)가 시작되었다. 박해가 시작되기 전에 대원군으로부터 낙향을 권유받은 성 남종삼 요한은 성 베르뇌 시메온 주교를 방문한 다음 관직을 버리고 신앙생활에 전념하고자 묘재에 은거해 있던 부친을 찾아갔다. 자초지종을 들은 부친으로부터 “네가 충성스러운 신하의 도리는 다했다만 그 때문에 분명 목숨을 잃게 될 것이다. 너더러 네 사형 선고문에 서명을 하게 하거든 성교(聖敎)에 대해 욕된 표현은 일체 지우는 것을 잊지 말라.”는 준엄한 가르침과 격려를 받고 순교를 각오한 그는 다시 상경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그는 이웃해 있는 배론(舟論)의 신학당을 찾아가 고해성사를 받고 서울로 향했다. 그 무렵 이미 박해가 시작되었고 그에게도 체포령이 내려졌다는 소식을 듣고 잠시 고양군(高陽郡)에서 피신하려 했으나 3월 1일 잔버들이란 마을에서 체포되어 바로 의금부로 압송되었다. 당시 의금부에는 성 베르뇌 시메온 주교와 홍봉주 토마스를 비롯해 여러 선교사와 신자들이 투옥되어 있었다. 성 남종삼 요한이 체포된 이후 함께 국문하라는 지시에 따라 다음날부터 국청(鞫廳)이 개설되었다. 성 남종삼은 조정의 대신들로부터 6회에 걸친 신문을 받으며 배교를 강요당했다. 그러나 모진 고문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신앙을 지켰을 뿐 아니라 천주교가 정도(正道)라는 호교론을 펴나갔다. 그는 천주교는 하느님을 섬기고 충(忠)과 효(孝)를 다하는 학문이기에 배교란 있을 수 없다며 자신에게 내려진 사학도(邪學徒)의 우두머리요 외세와 내통한 흉악한 계책을 꾸몄다는 죄목에 대해 당당히 자기 뜻을 밝혔다. 결국 그는 모반부도(謀叛不道)의 죄목으로 참수형의 선고를 받고, 1866년 3월 7일(음력 1월 21일)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동료인 홍봉주 토마스와 함께 순교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는 50세였다. 순교 후 성 남종삼 요한의 시신은 용산 왜고개에 매장되었다가 1909년 5월 28일 성 최형(崔炯) 베드로의 유해와 함께 발굴되어 명동 주교관으로 옮겼다가 6월 17일 명동 성당 지하 성당에 안치되었다. 그리고 1968년 시복식을 계기로 다시 절두산 순교성지 내의 병인박해 100주년 기념성당 지하에 마련된 성해실로 옮겨 안치하였다. 이때 성인의 유해 일부를 의령(宜寧) 남씨 가족 묘소인 장흥면 울대리에 모셔 안장하였다. 그가 순교한 후 가족들도 모두 체포되어 순교하거나 유배형을 당했다. 부친 남상교는 공주로 압송된 후 순교하였고, 장자인 남명희(南明熙)는 전주 진영으로 끌려가 전주천의 초록바위에서 순교하였다. 부인 이조이 필로메나(李召史, Philomena) 또한 유배지인 창녕에서 치명하였고, 함께 경상도 지역 유배지로 간 막내아들 남규희와 두 딸은 노비 생활을 하며 고초를 겪었다. 이렇게 성 남종삼 요한의 가문에서 3대에 걸쳐 4명의 순교자가 탄생하였다. 그는 1968년 10월 6일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병인박해 순교자 24위’의 한 명으로 시복되었다. 그리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을 기념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103위 한국 순교성인’ 중 한 명으로 성인품에 올랐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3월 7일 목록에서 한국의 서울에서 성 남종삼 요한이 순교했다고 기록하였다. 그의 축일은 9월 20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에 함께 경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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