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아우구스티누스 웹스터(Augustinus Webster, 또는 아우구스티노 웹스터)는 케임브리지(Cambridge) 대학교에서 수학한 뒤 런던(London)의 신(Sheen) 수도원에서 카르투지오회 수도승이 되었다. 1531년에 그는 잉글랜드 링컨셔(Lincolnshire)의 악솔름(Axholme) 섬에 있는 멜우드의 성모 마리아(Our Lady of Melwood) 수도원의 원장이 되었다. 영국에서 종교개혁과 관련해 대혼란이 벌어질 때 영국 내에는 10개의 카르투지오회 은수 수도원이 있었다. 당시 사람들은 카르투지오회 수도원을 보통 ‘차터하우스’(charterhouse)라고 불렀다. 이는 카르투지오회를 설립한 성 브루노(Bruno, 10월 6일)가 첫 은수 수도원을 세운 프랑스의 샤르트뢰즈(Chartreuse) 지명에서 따온 이름이다. 카르투지오회 수도승들은 가난과 엄격한 삶을 통해 대중들에게 큰 존경을 받았다. 이는 헨리 8세(Henry VIII) 왕이 수도원을 해산하기로 한 이유 중 하나가 되었다. 1535년 2월 카르투지오회는 1534년에 헨리 8세 왕이 공포한 ‘수장령’(Act of Supremacy)에 따라 영국 교회의 최고 수위권이 국왕에게 있음을 서약하도록 요구받았다. 그래서 성 아우구스티노 웹스터는 이 사태에 대해 런던 수도원의 성 요한 후톤(Joannes Houghton)과 상의하기 위해 보베일(Beauvale) 수도원의 원장인 성 로베르토 로렌스(Robertus Lawrence)와 함께 런던으로 갔다. 이들 세 수도승은 신앙과 양심에 어긋나는 서약에 대한 면제를 탄원하고자 당시 국왕의 신임 속에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던 토머스 크롬웰(Thomas Cromwell)을 만나러 갔다가 체포되어 런던탑에 갇혔다. 1535년 4월 그들은 특별 위원회에 불려 나가 수장령을 거부한 죄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때 런던 교외 템스 강변의 아일워스(Isleworth) 본당 관내에 있는 시온(Zion) 수도원의 원장인 브리지타 수도회(Bridgettines) 소속 성 리카르도 레이놀즈(Richardus Reynolds) 신부도 함께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리고 1535년 5월 4일, 성 아우구스티노 웹스터는 같은 카르투지오회의 성 요한 후톤과 성 로베르토 로렌스, 그리고 성 리카르도 레이놀즈 신부와 아일워스의 본당 신부인 복자 요한 하일레(Joannes Haile)와 함께 런던의 타이번(Tyburn)으로 끌려가 교수형과 극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성 아우구스티노 웹스터와 동료 회원들은 영국에서 순교한 첫 카르투지오회 수도승들이다. 성 아우구스티노 웹스터 신부는 1886년 12월 29일 교황 레오 13세(Leo XII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70년 10월 25일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잉글랜드와 웨일스의 40위 순교자’(The Forty Martyrs of England and Wales) 중 한 명으로 성인품에 올랐다. 그의 축일은 개인적으로는 순교한 날인 5월 4일에 기념하고, 시성 후에는 40위 순교자의 일원으로서 시성일인 10월 25일에 기념해 왔었다. 2000년에 잉글랜드와 웨일스 교회의 새 전례력이 교황청에서 승인된 이후 40위 순교자들의 축일은 5월 4일로 옮겨져 종교개혁 시대에 순교한 모든 복자 · 성인들과 함께 ‘영국의 순교자’(The English Martyrs)라는 이름으로 전례 안에서 기념하고 있다. 이날은 종교개혁 시대 영국에서 순교한 영국 성공회의 순교자와 성인들의 기념일과 같은 날이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5월 4일 목록에서 각각 카르투지오회의 수도원장직을 맡은 성 요한 후톤, 성 로베르토 로렌스, 성 아우구스티노 웹스터 그리고 브리지타 수도회의 성 리카르도 레이놀즈 신부가 헨리 8세 왕 때에 두려움 없이 교부들의 신앙을 고백하고 런던의 타이번으로 끌려가 잔인하게 교수형과 극형을 받고 순교했고, 그들과 함께 런던 교외 아일워스의 본당 신부인 복자 요한 하일레도 같은 교수대에서 순교했다고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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