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암브로시우스 발로우(Ambrosius Barlow, 또는 암브로시오 발로우)는 영국 잉글랜드 맨체스터(Manchester)의 발로우 홀에서 아버지 알렉산더 발로우 경(Sir Alexander Barlow)과 어머니 메리(Mary)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발로우 집안은 가톨릭교회를 탄압하는 영국 성공회로 개종하기를 주저하였다. 성 암브로시오 발로우의 할아버지는 그가 태어나기 1년 전에 가톨릭 신앙을 지키다 감옥에서 사망했고, 아버지 역시 성공회의 새로운 규범을 따르지 않아 재산의 2/3를 몰수당했다. 이런 상황에서 태어난 그는 성공회에서 세례를 받고 성장하였다. 1607년 가톨릭 신앙으로 개종한 그는 사제 성소를 느껴 1614년에 프랑스 두에(Douai)에 있는 영국 신학교에 들어갔고, 그곳에서 공부하다가 에스파냐의 바야돌리드(Valladolid)의 성 알바노 왕립 대학으로 갔다. 다음 해인 1615년 두에로 돌아온 그는 성 베네딕토회에 입회하여 암브로시오라는 수도명을 받았다. 1617년 사제품을 받은 후 그는 영국으로 돌아와서 랭커셔(Lancashire)에서 가톨릭 신자에 대한 사목활동을 시작하였다. 그 후 그는 2년 6개월 동안 네 차례나 체포되었으나 매번 석방되었다. 그러나 1641년 3월 7일 국왕 찰스 1세(Charles I)가 모든 가톨릭 사제들에게 한 달 내에 나라 밖으로 떠나지 않으면 체포하여 반역자로 처벌 또는 처형한다는 문서에 서명하면서 위기를 맞이했다. 본당 신자들은 그에게 나라 밖으로 피신하거나 은신처에 숨을 것을 권했지만, 그는 이를 거부하고 자리를 지키다가 그해 부활 대축일에 체포되었다. 그는 석방을 조건으로 사제직을 포기하라는 재판관의 설득을 거절하고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그의 친구들이 나서서 중재하게 해달라는 부탁마저 거절한 그는, 그해 9월 10일 랭커스터 성(Lancaster Castle)에서 처형장으로 끌려가 교수형과 극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이날은 그가 캔터베리(Canterbury) 수도원의 원장으로 임명된 지 일주일째 되던 날이었다. 성 암브로시오 발로우 신부는 1929년 12월 1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70년 10월 25일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잉글랜드와 웨일스의 40위 순교자’(The Forty Martyrs of England and Wales) 중 한 명으로 성인품에 올랐다. 그의 축일은 개인적으로는 순교한 날인 9월 10일에 기념하고, 시성 후에는 40위 순교자의 일원으로서 시성일인 10월 25일에 기념해 왔었다. 2000년 잉글랜드와 웨일스 교회의 새 전례력이 교황청에서 승인된 이후 40위 순교자들의 축일은 5월 4일로 옮겨져 종교개혁 시대에 순교한 모든 복자 · 성인들과 함께 ‘영국의 순교자’(The English Martyrs)라는 이름으로 전례 안에서 기념하고 있다. 이날은 종교개혁 시대 영국에서 순교한 영국 성공회의 순교자와 성인들의 기념일과 같은 날이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9월 10일 목록에서 성 베네딕토회 신부인 성 암브로시오 발로우가 24년 동안 랭커스터 지역의 가톨릭 신자들의 신앙을 위해 사목하다가 부활 대축일 미사 강론 중에 체포되어 감옥에 갇힌 후 찰스 1세 왕 치하에서 가톨릭 사제라는 이유로 사형 선고를 받고 교수형으로 순교했다고 전해주었다. 그러면서 순교 장소를 기존에 알려진 랭커스터가 아닌 런던(London)의 타이번(Tyburn)으로 기록하였다. 그는 성 암브로시오 에드워드 발로우(Ambrosius Edward Barlow)로도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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